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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회복수기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치료받은 환자분들의 생생한 회복 경험담입니다.
알코올 중독 치료를 통해 새 삶의 희망을 찾으신 환자분들의 진솔한 회복 수기가
알코올중독으로 고통받고 있는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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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알코올 중독 아버지와 아들의 편지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특별부록②]   알코올 중독 아버지와 아들의 편지①아버지는 혼자가 아닙니다- 첫 번째 편지 -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께... 그동안 아버지가 받아왔던 편지가 많았겠지만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실한 마음으로 편지를씁니다.   지금껏 아버지 원망도 많이 하고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후회도 많이 했습니다. 어머니와 같이 살았던 지난 세월은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불행의 나날들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실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 자신이 부끄러웠지만 술을 마시고 어머니를 막 대하는 아버지가 너무 싫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하시고 아주머니와 만나 함께 사시면서 처음에는 그냥 따라갔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점점 채워갔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무언가 바뀐 새로운 삶을 바랐는데 우리 가족 앞에 놓인 미래는 어둠으로만 가득 찬 것 같았습니다. 금전적인 어려움, 가족들 간의 의사소통 단절과 불화로 인한 어려움 등 때문에 앞으로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무엇보다 아무 말 없이 아주머니와 살게 된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저에게는 고통이었습니다. 의사소통 차이로 인한 갈등은 아주머니와 같이 살면서 가장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시고 일도 제대로 하지 않으시던 아버지가 저에게는 그저 무책임한 가장으로밖에 보이질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저도 참 저만 생각하고 이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와 살 때는 제가 어린 나이긴 하였지만 조금이라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가족들에게 힘이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머니와 함께 살게 된 이후 아버지의 마음은 생각하지 않고 너무 저만 생각했었다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듭니다. 아버지가 아주머니와 어떻게 만나셨던 간에 아버지가 저를 데리고 함께 살기로 하셨다면 그것은 신중히 고려하신 후에 결정하신 것일 텐데... 새로운 환경과 처음 본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에 너무 싫어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일을 안 하고 술을 마셨을 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얘기도 나누고 서로 상의하며 살았더라면 지금의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 텐데 라는 후회가 들기도 합니다. 집안 사정이 어려운 것을 알면서도 학원에 보내달라 떼나 쓰고 용돈도 남들보다 더 많이 받고... 지금 생각하면 제가 참으로 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제 말을 들어주시려 노력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합니다.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생각했으면 아버지가 홀로 지내시면서 지금같이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지는 않으 셨을 텐데... 그래서 요즘은 아버지 혼자 어려움을 겪으시는 것을 보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혼자가 아닙니다. 주위에 수많은 사람이 아버지를 지켜보고 있고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아들도 아버지와 같이 이 어려움을 이겨나가고 싶습니다. 한때 제 마음속에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찼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교회에 갔는데 어른들이 말씀하시더군요. “너를 낳아 준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어떻게 지내시던지 아버지란다.”라고요. 그 말을 들으면서 처음에는 아무것도 못 해주는 아버지가 무슨 아버지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그 말이 맴돌아 마음속 깊이 생각해보니 무슨 뜻인지 조금은 이해가 갔습니다. 아버지는 그동안 그렇게 힘들게 지내시면서도 언제나 저를 보면 환한 얼굴로 안아주셨고 심지어 아버지가 아프실 때도 자는 저에게 오셔서 어디 아프지 않은지 물어보며 다리를 주물러 주셨습니다. 또한 하교해 집에 오면 밥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 노력하셨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그동안 물질적인 것만 생각했던 저 자신이 너무도 부끄럽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가 저에게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 숙이며 미안하다고 하실 때마다 저는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대로 아버지와 저는 한 가족이며 부모와 자식으로 만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가장 가까운 관계입니다. 저에게 부모와 자식 관계란 어려움이 있으면 서로 나누어 무거운 짐을 덜고 기쁨이 있으면 나누어 배가 되는 것이며, 누군가 실수하면 지적해주고 감싸줘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버지께 바라는 점은 그동안 아버지가 저에게 미안한 것이 있으시더라도 다 잊으시고 다시 새롭게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술도 끊으시고 몸도 단련하시고 영적으로도 수련하시면서 아버지가 다시 예전의 건강을 회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가족을 위한 것이고 저를 위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와의 이혼 때문에 술이라는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 육체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상처받고 또 마음 속의 상처가 덧나 힘들어하시면서 우리 가정이 흔들리게 되었는데, 그 흔들린 가정을 아버지와 우리 식구들이 힘을 합쳐 일으킬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병원에서 퇴원해 하루빨리 회복되셔서 가족들과 같이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평안한 가정에서 우뚝 선 아버지가 계셔 우리 집안에 위엄이 있고 웃음이 넘치는 가정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집안의 어둠에 가려져 술에 취해 우울해 있는 아버지가 아니라 집안에 생기가 돌고 아버지가 힘이 넘치셔 우리 가족 모두에게 힘을 주시는 아버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집안에서 다들 밥 한 끼 나누어 먹을 수 있는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여행도 가고 교회도 가면서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길 소망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아버지가 우리가 가족들과 사랑을 나누고 다시 힘을 내실 때 가능합니다. 아버지 하루빨리 육체적으로 심적으로 겪고 계신 병에서 회복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병에서 회복되셔서 우리 가정을 다시 일으켜 주시길 아버지께 부탁드립니다. 우리 가정을 일으키는 핵심은 아버지이시며 우리 가정을 밝고 화목하게 이끌어가는 데에 중심에 계신 분도 아버지입니다.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사랑합니다.                   - 두 번째 편지 -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께... 어느 순간 내가 바뀌면 아버지도 바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매일 일이 끝나면 근처에 있는 교회에 가서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부유한 가정에 살기 원하지 않습니다. 단지 저희 아버지가 술이라는 악마에서 빠져나와 가족끼리 나눌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아버지와 함께하며 행복한 가정 안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께 이런 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고 그런 마음을 편지에 담아 아버지께 전해드렸습니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아버지가 천천히 변해가시기 시작했습니다.   무뚝뚝한 아버지가 로맨틱하고 사랑스러운 아버지로, 무책임하게만 느껴졌던 아버지가 가정을 위해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아버지로,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줄 알았던 아버지가 타인을 위해 자기자신을 헌신하는 아버지로... 그렇게 서서히 아버지는 마치 내가 어렸을 때 멀리서 우러러보고 존경하던 아버지로 바뀌어 가고 계셨습니다. 어렸을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아버지의 얼굴에 늘어난 주름살과 그 늘어난 주름살만큼이나 늘어난 사랑 그리고 멀게만 느껴졌던 아버지가 제 옆에서 언제나 저를 지켜보며 응원해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 이렇게 바뀐 아버지와 지내는 것이 자연스럽지만은 않습니다. 아마도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술이라는 덫에서 나와 이제야 조금 더 가까워지나 했는데 제가 호주로 유학을 가게 되어 너무나 아쉽습니다. 방학 때 나와도 학비 때문에 매일 일하느라 정신이 없어 잘 찾아뵙지도 못하고 때로는 저 자신만 생각하는 것 같아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유학 간 이후로 몇 번 안 되는 기회였지만 뵐 때마다 아버지의 저를 향한 사랑을 느낄 수 있어 너무나 기쁩니다. 얼마 전 함께 저녁 식사를 하였을 때 아버지가 “너의 비전은 뭐니? 이 녀석 아빠한테는 왜 이런 얘기도 안 해?”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버지에게 이런 질문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어색했지만 아버지가 저에게 사랑과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느낄 수 있어 참으로 좋았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면서 느끼는 것은 하루빨리 모든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모두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농담도 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밥 한 끼를 먹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볼 때까지 건강하시고 항상 행복하며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살길 기도하겠습니다. 비록 육체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언제나 주님의 품 안에서 우리 가족은 하나이고 저도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호주에서 아버지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아버지를 생각하며 9월 11일 씀.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특별부록②]   알코올 중독 아버지와 아들의 편지②못난 아비를 용서해다오   -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답장 -   사랑하는 아들에게...너의 인생을 앞에서 똑바로 이끌고 힘을 실어 주지 못한 못난 아비를 용서해다오. 인간의 삶이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 것이 이치인 것 같구나. 네가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견스러운지 항상 너의 얼굴을 떠올리면 기분이 들뜨고 마음이 상쾌해진단다.   사실 네가 볼 때 항상 부족하게 느껴지고 어떨 때는 모순투성이인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아비는 솔직히 모범이 되는 역할을 하나도 제대로 한 것이 없었음을 시인한다. 하지만 어쩌겠니 과거는 흘러갔고 훌륭하게 성장하여 나를 이해해주려 노력하는 너의 바람에 조금이라도 부응하려면 술과 완전히 단절할 수밖에 없는 것을... 최대한 나의 모든 노력과 성의를 다하여 열심히 살아갈 것을 다짐해본다.   네가 먼 곳으로 공부를 하러 가서 한참을 고생하며 지낼 일을 생각하니 또다시 마음이 요동치는구나. 이 아비는 마음을 가라앉혀 담담하게 고쳐먹고 너와 계속 소식을 주고받으며 속마음을 나누고 싶다. 최고가 되어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이 봉사하며 평생을 많이 보다는 깊이 있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람을 가져본다. 너의 인격이 다른 사람들에게 향기를 뿜어내어 너를 마음속으로 존중해 줄 때 너의 가치가 진정 빛을 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항상 사랑하고 베풀 줄 아는 멋진 아들을 떠올리며 아비의 역할을 주어진 데로 잘하고 싶다. 아줌마에게도 따뜻한 말 정다운 말 한마디 건네주렴. 파이팅! 함께 힘내자. 아들아 사랑한다.        

다사랑 2021-02-09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인생은 채우고 또 비우는 과정의 연속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대상]   인생은 채우고 또 비우는 과정의 연속   김○○   안녕하세요. 올해 43세인 알코올 중독자 김입니다. 2009년 다사랑중앙병원 첫 입원을 시작으로 2020년 현재까지 병원에서 회복을 기대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11년 동안 병원을 오가며 짧게는 1개월에서 길게는 2년 6개월까지 술을 안 마시고 지내봤지만 그 기간들은 병원이란 울타리 안에 있었기에 아직 퇴원 후 단주 1년을 넘겨보지 못한 만성 초심자입니다. 저같은 환자를 중독자들 사이에선 병원 의존에 걸렸다고 말합니다. 병원 안에서는 2년 동안 술을 먹지 않았지만 퇴원 후에는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입원을 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 저의 10년의 시간을 정리해 봅니다.   2007년, 어머니께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릴 적부터 의존 성향이 짙었던 저는 어머니에게 의존하던 마마보이였습니다. 아버지가 무서워 어머니에게만 의존하면서도 어머니의 말은 잘 듣지 않는 청개구리였습니다. 2006년, 어머니의 암 선고 이후 6개월 동안 병간호를 했지만 어머니의 건강이 아닌 저에게 어머니가 필요해 마지못해 했던 일이었습니다. 저는 평소에도 술을 많이 마셨던 터라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부재에 당황한 제가 마음을 달래고자 다시 술병을 드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와 형에게 의존해 살아보자는 생각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내세워 방에 틀어박혀 술을 먹었습니다. 우선 같이 살던 아버지가 대상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께서 폭언과 폭행으로 격한 감정을 표출하셨지만 저는 아랑곳 하지 않고 시내에 월세 방을 얻어 술을 먹었습니다. 형이 제 친구들에게 수소문해서 찾아내기 전까지 저는 그렇게 개·돼지처럼 살았습니다.   2009년 1월, 형은 저를 이곳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시켰고 그렇게 의왕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입원했을 땐 크고 깨끗한 시설 그리고 학교처럼 교육을 한다는 것과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이 멀쩡하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집안 가족 중 알코올 중독자인 삼촌이 정신병원을 다니셨는데 그때 들은 것과 내가 들어온 이곳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습니다.   관리병동 생활이 적응될 무렵 상담사가 개방으로 가볼 것을 권유했고 처음엔 거절했지만 내려가면 밖으로 산책도 가능하다기에 알았다고 했습니다. 개방으로 내려가려면 1단계 발표를 해야 한다기에 연극으로 가족과 치료진에게 단주 각오를 보여준 뒤 더 자유로운 개방병동으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산책을 갔을 때 슈퍼에 들러 소주병을 봐도 그렇게 갈망이 오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제 성격상 남들보다 튀는 행동을 잘하지 않는 성격이어서인지 그런 상황은 쉽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개방병동 9주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원내에서 3개월 동안 재활을 했습니다. 처음 병원 생활에서 원내 재활까지 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고 주위에서 추켜세웠지만 사실 저에게 돌아갈 집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만의 집에서 생활했고, 형은 형의 집에서 생활했기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제가 갈 곳은 없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재활의 목적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생계유지를 하는 것이 제가 재활을 하는 목적이었습니다. 별다른 기술이 없었기에 젊음을 믿고 막노동을 시작했습니다. 힘들었지만 병원 환우들 속에 끼어 몇 달을 다녔고 퇴원할 즈음 월세보증금 정도를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퇴원을 했습니다.   하지만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입원해야 했습니다. 병원에서는 잘 참고 하던 일도 병원 밖에서 해보니 쉽지 않았습니다. 잘하면 잘한다, 못하면 못하다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막노동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직업소개소를 거쳐 일을 구한 뒤 일을 하고 돌아온 집은 찬바람만 맴돌았습니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 했기에 십여 일을 나갔지만 돈의 여유가 생기자 생계보다는 공허함을 메우려는 욕구가 거세게 일었습니다. 욕구충족 뒤로 생계 일을 미루는 행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거기에 알코올을 더하니 생계고 뭐고 살아가는 것까지 부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끼니를 대신해 술을 먹었습니다.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았지만 술이 필요했고 술만이 때때로 찾아오는 신체적, 정신적 허기를 채워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다시 형이 나를 발견하고 또 입원을 시켜주었습니다. 다시 입원하자 담당 상담사가 왜 술을 먹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 핑계를 대고 있었습니다. 예전 교육에서 들은 것을 기억해내 입원 시기가 어머니 돌아가신 시기와 겹쳐 심적으로 우울해서 마셨다고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 당시엔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밝혀 낼 수 없는 핑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핑계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재활로 다시 왔습니다.   저는 저번과 똑같이 또 급한 대로 막노동을 시작했고 그렇게 원외 재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겼습니다. 제가 믿고 있던 제 몸에 이상이 생긴 거였습니다. 몸에 생긴 이상으로 급기야 수술을 받아야 했고 그 후로는 막노동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수술 후 병원의 배려로 재활 병동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몸을 회복하는데 무려 1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몸을 회복하는 1년의 시간 동안 아버지께서 병원비를 부담해 주셨습니다. 그냥 돈을 받는 것이 마음에 걸려 1년 과정의 기술 학교를 다녔습니다. 하지만 몸이 회복이 되기 전에 매일 학교에 다녔던 것이 저의 몸에 약간의 장애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매월 나오는 병원비와 생활비는 아버지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1년간 학교에서 배울 기술을 토대로 직장을 구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고, 저는 배운 것과 전혀 다른 직종에서 직업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출·퇴근을 하면서 퇴원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퇴원 준비라는 것은 내가 나가서 살 집을 구하기 위해 돈을 모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치료진이 A.A.모임을 권유하면서 퇴원 후 단주와 회복에 대해 가르쳐주셨지만 건성으로 대답하고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새로 얻은 직업은 예전 막노동과 전혀 달랐습니다. 내 노력에 대한 성과도 분명했고 병원에서 생활하며 술도 마시지 않고 착실히 다니니 빠르게 승진해 퇴원 할 무렵에는 회사에서 중요한 직책까지 올라갔습니다. 퇴원 할 무렵에는 전보다 훨씬 좋은 집에, 열심히 일할 회사까지... 이제 병원생활은 그만하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퇴원 후 직장을 다니면서 회사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술이 두려워 망설였지만 회사 내 제 위치와 높은 급여가 저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내가 저들보다 훨씬 뛰어나고 잘나가는데 이깟 술 한 잔 정도야’하며 회사 사람들과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음주가 계속되자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술만 찾아다녔습니다. 경쟁사회에서 술에 정신이 뺏기자 도태되는 것은 한순간이었습니다. 실적이 미미하자 회사의 압력은 저 같은 중독자가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내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꽤 괜찮은 모습으로 퇴원을 했었기에 다사랑중앙병원을 다시 간다는 것이 내키지 않아 일반 병원에 잠시 입원을 해보았지만 그때뿐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술만 먹은 게 아니라 수면제를 같이 먹었습니다.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환시와 환청에 시달렸고 급기야 제 손으로 112에 신고해 경찰이 찾아오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달리자 제 발로 다사랑중앙병원으로 찾아가게 되었고 다시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증상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1단계를 인정하게 되었고 나름 진실 된 1단계 발표 후 개방으로 내려왔습니다. 개방 9주 동안 병원 근처에서 진행되는 A.A.모임에 참석했지만 모임 속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해 한쪽 발은 빼놓은 행동으로 일관하다가 집이 아직 있다는 핑계로 형을 설득해 개방만 마친 후 아무런 계획 없이 퇴원하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내가 어질러놓은 집을 치우면서 다시 잘해보자 다짐하였고 몇 차례 집 근처 A.A.모임에도 참석했지만 참석만 하는 노력은 단주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실천 없는 열망은 이내 식어버렸고 생활비를 부담하고자 전세를 월세로 돌리고 직업을 구하려 했으나 몇 년 전 수술 후유증으로 무릎이 아파 다리를 절고 다니니 직장이 구해지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전세를 뺀 돈으로 스포츠 경기에 베팅하는 사행성 게임에 손을 댔습니다. 처음에는 흥미로 시작했지만 이내 점점 빠지게 되었고 술만 먹지 못할 뿐 생활은 엉망으로 변해 사설 도박으로까지 이어져 남은 돈도 모두 날리고 말았습니다.   술도 모자라 도박까지...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이럴 수 있나 싶었습니다. 그렇게 노력해서 얻은 직장에 집까지 모두 날리고 살겠다고 끼니를 챙겨 먹는 내 자신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상황을 이 지경까지 만들어 놓고 술 때문에 고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슈퍼에 들러 술을 사는 제 모습에 스스로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삶에서 독립적으로 성취한 게 별로 없는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기생충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디가서 죽을 용기조차 없어 그마저도 제일 잘하는 술을 먹고 죽자며 계속 술만 마셨습니다. 10일이 자나자 온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지만 계속 술을 마셨습니다. 술에 취해도 정신을 잃지 않고 발작이 오는 것을 또렷이 느끼며 침대에 쓰러졌습니다. 다시 눈을 뜨자 대학병원 응급실이었습니다. 일생을 무책임하게 가족들을 피 말리면서 그렇게 쉽게 죽으려고 한 게 잘못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형은 이번에도 저를 살려주었습니다.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대답대신 한숨만 나왔습니다.   그렇게 대학병원에서 일주일 동안 치료를 받고 다시 다사랑중앙병원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 계획표를 작성해 실천하는 습관을 기르고 매일 일기를 쓰면서 나의 감정 상태를 알아가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원외 재활보다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있는 원내 재활을 하면서 남는 시간에는 A.A.모임에 다녔습니다.   그렇게 전에는 해보지 않았던 회복 프로그램들을 수행하면서 순조롭게 퇴원할 수 있을 듯 했으나 유례없는 코로나 사태가 발생해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임시방편으로 아는 지인의 집으로 퇴원했습니다. A.A.모임까지 중단되자 병원 생활을 오랫동안 했지만 초심자였던 제가 버티기는 힘들었습니다. 하루하루가 막막했습니다. 그렇게 버티다 또 재음주를 하였고 아는 지인의 도움으로 그리고 다사랑중앙병원의 배려로 다시 입원해 관리, 개방병동을 지나 현재 재활 병동에서 원내 재활을 하면서 다시 희망을 꿈꾸고 있습니다.   저희 집안은 알코올 중독에 대한 가족력이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음주를 하기 전부터 의존이 심한 성격이었습니다. 주위 가족들의 노력으로 기생충처럼 살았음에도 내가 복이 많은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10년 전 이병원에서 알코올 중독 진단을 받았음에도 끝까지 부정하고 저를 도와주려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의심하며 나는 평생 젊고 건강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았습니다. 제 고집대로 살다가 실패를 해보고 나서 이렇게 10년을 정리해보니 후회가 많이 되지만 과거 속에 사는 것 또한 회복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병원에서 배운 대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2층 테라스에 적혀 있는 글귀가 생각이 납니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우고 또 비우는 과정의 연속이다.-   단주를 하면서 행복으로 채우고 병원에서 배운 회복 프로그램과 A.A.모임 참석을 통해 비우는 연습을 계속 하겠습니다. 힘들면 천천히 가더라도 계속 가겠습니다. 두서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사랑 2021-02-09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혼자가 아닌 함께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최우수상]   혼자가 아닌 함께   여○○ 2017년 5월 ? 나는 다르다 -   정신을 차린 나는 우선 상황부터 파악했다. 분명히 밀양강 주변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낯선 곳에서 정신을 차린 것이다. 하얀 환자복이 우선 눈에 들어왔고 팔에 바늘이 꽂혀 있는 것을 보니 병원이 확실했다. M병원인가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고 복도에 나오자 무엇인가 단단히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고 복도에는 온통 환자복 입은 사람들 밖에 없었다. 데스크로 가자 보호사라는 분이 설명해주셨고 이곳이 알코올 전문 병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무엇보다 여기가 밀양이 아닌 경기도 의왕시라는 것에 놀랐다.   분명 멀쩡하게 상담까지 받고 입원 수속을 다 했다는데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정신을 수습한 후 병원 구경을 다녔다. 원래 벌어진 일에는 크게 후회하고 집착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폐쇄 병동이 있다는 것이 또 알코올 전문 병원이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냥 술을 마신 후에 나타나는 몸의 이상 징후들이 조금 더 심각해지면 내과나 한번 가봐야겠다 생각했지 병원에 입원할줄 꿈에도 몰랐다.   단체 생활은 익숙해서 그다지 거부감은 안 들었지만 운영하던 학원 걱정이 됐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병원 생활을 시작했다. 딱히 힘든 일은 없었다. 다만 학생들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이 걱정됐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3년간 우리 학원에서 함께 공부하며 수능까지 보게 되는 학생들과 끝까지 함께 하고 싶었다. 주변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로 보호자 동의가 있어야 퇴원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우리 부모님 성향상 병원 프로그램을 모두 마쳐야 퇴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충 날짜를 헤아려보니 간신히 시험 100일 전에는 복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퇴원을 빨리 해야겠다는 생각에 병원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머릿속에는 온통 퇴원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병원 프로그램을 예정대로 끝내야 했고 중간에 어떤 변수도 생겨서는 안됐다. 그 당시 ‘나는 병원에 있는 사람들과는 달라. 나는 그냥 하루 폭주했을 뿐이야, 너무 힘들게 일했어. 좀 쉬러 왔다 생각하자. 쉬면서 운동도 좀 하고 어차피 병원에 있으면 술을 못 마시니 끊어버리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심각성을 몰랐다.   2017년 9월 ? 좌 절 -   다사랑중앙병원에서 대학병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온통 한 마디를 생각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그동안 수고했다, 많이 아팠지, 이제 편히 쉬어라, 사랑해, 미안해, 고생했어 등 동생의 마지막 가는 길에 해주고 싶은 말을 생각해내려 애써 보았지만 울음만 나왔다. 내 동생은 2개월 전 술 문제로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했다. 3일 만에 몸상태가 너무 안 좋아져 대학병원으로 이송됐고 두 달간 응급실에 입원해 있었다. 오늘을 넘기기 힘들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엄청난 죄책감과 후회, 슬픔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온통 머릿속에는 동생과 술 마신 기억밖에 없다. 내가 동생을 죽이려고 그렇게 같이 술을 마셨구나, 동생 죽인 미친 새끼, 형이 그리 술을 처먹으니 동생도 술을 그렇게 마시지. 등등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렸다. 더욱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동생이 누워있던 응급실 침대를 보면서 두려움이 밀려드는 것이었다. 동생 대신 내가 그 침대에 누워있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평소에 언제든지 동생을 위해 목숨도 내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었는데 순간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두려움을 느끼는 내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가증스러웠다. 죽고 싶었다.   2017년 9월 11일 오후 9:26분 동생은 죽었고 내 마음도 죽었다. 장례식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상주라는 자리가 참 힘든 자리였다. 오시는 분들마다 모두 나를 욕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단지 동생을 죽인 형이였다. 사형 집행일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묵묵히 장례식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차라리 대성통곡하고 싶었다. 쓰러져 오열하며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죄인이다. 장례식이 끝나는 순간까지 울지 않았다. 죄책감이 장례식장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있는 슬퍼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아 갔다.   하지만 화장터에서 동생의 유골함을 받고 난 후 돌아오는 버스에서 울음이 터졌다. 유골함을 처음 받았을 땐 뜨거워 놓칠 뻔했다. 동생은 얼마나 뜨거웠을까? 죽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생각났다. 아들 하나를 잃으시고 이제 하나밖에 안 남았다. 그런데 하나밖에 안 남은 아들이 정신병자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다. 술로 현실에서 도망갔던 것처럼 죽음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서 부모님보다 하루만 더 살기로 결심을 했다. 죄인으로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자고 결심했다.   동생의 뼈를 산에 뿌려줄 때 다짐했다. 내가 다시 술을 마신다면 개라고..   2017년 11월 - 더 깊은 곳으로 -   모든 것을 다 잃었다. 동생이 죽은 지 2개월 후, 병원에서 퇴원한 지 3일. 학원을 정리하고자 밀양으로 내려왔다. 세상에 얼마 안 남은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동업자들과 밤새 책임 공방을 펼쳤다. 어차피 정리하려고 간 길이였지만 너무 서러웠다. 언제 또 경상남도에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남해로 향했다.   남해 독일마을은 학원을 창업했을 때 놀러와 동업자들과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곳이다. 펜션에 처음 들어갈 때 두 손에는 탄산수와 몇 가지 간식거리가 있었다. 배불리 먹고 일찍 자야지 하는 생각에 챙겨갔다. 병원에서 퇴원한지도 얼마 안 됐고 술을 마실 생각은 전혀 없었다. 텔레비전을 보다 잠들었고 눈을 떠보니 새벽 1시였다. 바닷가라도 구경하자 하고 나갔고 돌아오는 길 두 손에는 소주가 들려있었다. 시원하게 마시고 죽자. 어차피 서울에 가도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나 같은 자식은 차라리 없어져 주는 것이 효도하는 거야’하는 미친 합리화가 시작됐다. 지금 생각해 보니 술 마시려는 핑계였을 뿐이었다. 그 후로 10일 동안 흔히 말하는 장취라는 것에 빠졌다.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좀비처럼 생활했다. 아무 생각 없이 오직 술만 찾아 마셨다. 방에서 하루에 10병이 넘는 소주병이 매일 같이 계속해서 나오자 모텔 주인도 걱정이 됐는지 믹스커피 한 박스와 귤 몇 개를 주시면서 “아저씨 안주도 좀 먹어가면서 마셔요. 몸상해요.”라고 하셨다. 고마웠다.   고마운 마음이 드는 순간 주변 상황이 신경쓰였다. 부모님은 어쩌고 계실까, 학생들 시험은 잘 봤을까 하는 생각들이 들었다. 그러다 새벽에 한 아저씨의 울음소리에 잠을 깼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생각이 나서 운다는 인터뷰 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생 화장터에서 오열하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우나에 가서 목욕을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께 죄송하다, 병원에 다시 입원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병원 치료진들을 볼 면목이 없어서 술은 깨고 입원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엄청난 금단에 시달렸다. 이불을 아무리 덮어도 추웠고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 죽은 동생의 시퍼런 얼굴이 눈앞에 떠다녔고 목을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갈증이 들었다. 재음주를 하게 된 나에게 남은 것은 죽을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죄책감과 자기혐오, 그리고 알코올 중독자라는 주홍글씨뿐이었다. 2018년 1월 ? 혼자가 아닌 함께 -   그렇게 두 번째 병원생활이 시작됐다. 다사랑중앙병원은 이제 익숙한 곳이고 편안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술 생각과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치료진들도 모두 잘해주셨고 같이 입원해 있던 형, 동생들과도 친했다. 같이 운동도 하고 교육도 받으며 술의 갈망을 이겨나갔다. 동생 장례를 치르면서 다짐했던 단주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고, 동생을 떠나보낸 후 바로 이어진 재음주 때문에 스스로가 알코올 중독자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혼자는 술을 끊을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퇴원일이 가까워지면서 걱정이 됐다. 병원이라는 보호막이 없어지면 또 술을 마시겠지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또다시 술을 마신다면 이젠 확실하게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는 동생을 죽인 형으로 죄인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래야 죽어서 동생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술이다. 자신이 없었다. 무엇이든 해야 했다.   병원 수업 시간에 배운 것들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우선 잡념이 들지 않게 바쁘게 생활하자라는 생각에 개방 병동에서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에 집중했다. 성인이 된 후 80kg 밑으로 내려가 본 적이 없던 몸무게는 어느새 70kg초반이 되어있었다. 새벽에 운동을 하고 낮엔 병원 수업을 듣고 밤엔 A.A.모임을 나갔다. 딱히 A.A.모임이 좋아 참석한 것은 아니다. 밤에 병원에 누워있어 봤자 잡념만 들었다. 그러다 혹여 잠이라도 들면 새벽에 깨어나 온갖 생각에 길고 괴로운 밤을 보낼 것이 뻔했다. 그럴 바에는 모임이나 참석하자 하는 마음으로 다녔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A.A.모임 생활이 시작됐다. 오전에 운동을 하고 3시, 5시, 7시30분 모임을 다녔다. 처음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역시나 사람을 사귀는 일이었다. 원래 낯을 좀 가리는 스타일인데다 여러 가지 일들로 의기소침해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경험담이라도 자주하면 사람들과 금방 친해진다던데 그것 마저도 쉽지 않았다. 경험담을 한 번 하면 집에 돌아가서 악몽을 꾸고 가위에 눌리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우선 경험담은 포기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생각해봤다. 모임이 끝난 후에는 여러 가지로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모임 1시간 전에 도착해 준비를 돕는 것이었다. 사람들도 별로 없고 그룹에서 봉사하시는 분들과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봉사자분들과 친해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다른 멤버 선생님들과도 어울리게 됐다. 이후 경험담도 가끔씩 할 수 있게 됐다. 처음에는 아무래도 동생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했기에 동생에 대한 경험담을 주로 했다. 가족의 죽음을 겪은 멤버 선생님들께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나처럼 알코올 중독 때문에 가족을 잃은 경우가 무척 많았다.   경험담엔 신기한 힘이 있다. 다른 사람의 경험담을 듣다보면 그 사람과 굉장히 오랫동안 만나왔다는 착각이 든다. 공감의 힘일까? 어느샌가 모임 시간이 기다려졌고,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스케줄이 A.A.모임이 되었다. 후원자도 생겼고 후원자의 제안으로 3개월이 지난 후 바로 사회봉사를 시작했다. 사회봉사 덕분에 사람들과 더욱 잘 어울릴 수 있었다. 모임을 진행하며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눈을 마주치게 됐고, 먼저 알아봐주시고 인사해주시는 멤버들도 많아졌다.   후원자를 처음 만났을 때 나에게 해주신 말씀이 있다. “선생님, 모임에 다닐 수 있는 여지를 많이 만들어 두세요.” 이 한 문장은 모임 생활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사람들 마다 모임에 나오는 이유가 각자 다르다. 봉사를 맡아 책임감을 갖고 소속감을 느끼며 다니는 사람들, 멤버들과 맛있는 식사를 하러 오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러 나오는 사람들, 당구를 치러 오는 사람들 등등 모임에 다니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존재한다.   이런 이유들이 모임에 참석 하게 되는 여지가 되고 이런 여지들이 모여 모임 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해준다. 항상 즐거울 수는 없지만 적어도 술 마실 때의 아비규환 속으로 되돌아가진 않을 것이다. 하루하루 자신이 모임에 참석할 이유를 만들면 된다. 꼭 이유가 하나일 필요도 없다. 정답은 없다. 하지만 목적은 하나다. 우리는 오늘 하루 술을 안 마시기 위해 모인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다. 나는 혼자 술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읽어주신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다사랑 2021-02-09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마시지 않을 때의 즐거움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우수상]   마시지 않을 때의 즐거움   한○○   “엄마, 예전에 엄마 술 마실 때 내가 침대 밑에 숨겨 놓은 용돈 몰래 꺼내서 마셨던 거 기억나?” 아!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고 술 마실 때였다면 한 잔 마시고 변명이라도 해볼 텐데... “그런 적도 있었남? 엄마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 미안해 딸.” 정말로 기억이 없다.   어디 기억 못하는 일이 그 뿐이겠는가. 아빠 닮아서 술 마신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28살 때부터 소주를 글라스에 마셨고 이후 거의 매번 필름이 끊어진 것 같다. 술이 센 편이라 많이 마셔도 얼굴색하나 안 변하고, 발음도 꼬이지 않고 같이 술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뒷정리까지 깔끔히 하던 나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술친구들과 헤어지고 난 후 내 손에는 소주 3병이 든 검정봉지가 들려져 있었다. 집에 도착하면 조용히 방에 들어가 딸들에게 들릴까 수건으로 뚜껑을 따고 병째로 꿀꺽꿀꺽 술을 마셨다. 그 많은 술로도 나는 깊이 잠들지 못했고 새벽이 되면 취한 정신과 몸을 이끌고 가게에 나갔다. 새벽부터 가게에 출근한 나는 직원들이 해야 할 일을 미리 해두었다. 직원들이 할 일까지 하는 부지런한 사장으로 인정받으며 술을 마셔도 괜찮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일을 마치고 가게를 나서면 동네 주태백들을 만나 대장 노릇을 하느라 술값 내는 통큰 여사장 흉내를 내고 멀쩡한 척 집으로 돌아가지만 다음 날 기억이 없다.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다. 내일은 정말 마시자 말아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해도 아침이면 똑같이 반복된 하루를 살았다.   ‘아! 젠장, 나도 진짜 똑같네.’내가 술을 마시고도 멀쩡한 척했던 이유는 알코올 중독자인 우리 아빠(본인이 모임서 알코올중독자라고 했다)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였다. 돈은 벌어오지 않고 평생 술만 마시며 어린 자식들에게 술값도 안주고 술을 사오라고 쫒아내던 아빠. 사오지 않고 학교로 도망가면 학교에 쫒아오고,때리고, 살림살이까지 부수며 온 집안을 지옥으로 만든 아빠처럼 절대 살고 싶지 않았다. 한 번은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친구가 어릴 적 내가 벙어리인줄 알았다고 말했다. 사실 당시 나는 아빠가 언제 학교에 쫒아올지 몰라 친구들 무리에 끼지도 못하고 고개 숙이며 지냈고, 남의 집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어른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싫어 더 좁은 골목으로 숨어 다녔다. 그냥 누가 말을 시킬까 두려워 아예 말을 하지 않는 아이였다.   성인이 되면 사는 게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육남매 중 남동생과 여동생 하나에게 술문제가 생겼다. 아빠와 남동생 그리고 여동생이 술에 취해 칼을 휘두르며 싸우는 날이면 평생을 남편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한 엄마도 겁에 질려 멀리 시집 간 나에게 다급히 전화를 하곤 했다. 다행히 당시에는 술을 조절하며 마실 수 있던 때라서 나는 차를 운전해 친정으로 갔고 먼저 남동생에게 맞고 있는 아빠를 몸으로 감싸며 피신시킨 후 119나 112에 전화해 상황을 마무리했다. 밤을 꼬박 새워 벌어진 일들을 정리하고 다시 운전해 집으로 돌아간 후에는 남편에게 엄마가 갑자기 아파 응급실에 가느라 말도 못하고 갔노라고 거짓말했다. 창피해서 도저히 처제와 처남이 장인이랑 칼싸움을 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일이 한 달에 2~3번씩 벌어졌고 그때마다 오는 엄마의 전화에 나는 거짓말로 남편을 속이고 친정으로 향했다.   내가 술을 마시면서도 긴 시간을 악착같이 버틴 이유는 바로 평생 고생한 엄마다. 나까지 잘못된다면 정말 엄마가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은 진행성 질병이었다. 아침마다 엄마와 아이들을 위해 마시지 말자고 다짐해도 저녁이면 나는 취해있었고 그런 스스로가 한심해 또 술잔을 들었다.   간 수치가 오르자 큰 병원에 가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서울 큰 병원을 다녀오는 차 안에서 배가 고프다며 엄마를 속여 식당에 가서 술을 마셨다. 결국 침대에 누워 술을 마시는 지경에 이르렀고 급기야는 그 불쌍한 엄마에게 폭력까지 휘둘렀다. 물론 기억은 없다. 엄마는 그런 나에게 간 수치만이라도 떨어뜨리고 나오면 다시 몸을 챙겨가며 술을 마시면 되니 알코올 전문병원에 입원하자고 설득했다. 엄마에게 한 짓이 미안해 알겠다고 했다. 어쩌면 내 맘속에서 더는 버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도...   그렇게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했고 알코올 중독에 대해 많이 듣고 배웠다. 그래도 그건 내 이야기가 아니라고 부인했다. 내가 평생 술을 마시면 안되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는 말에 심장이 멈추는 느낌이 들었고, 숨을 못 쉴 정도의 답답함이 밀려왔다. 인정하면 절대 안될 것 같았다. 그리고 억울했다. 나는 경제 활동도 했고 엄마한테 폭력을 휘둘렀지만 그것이 문제라면 나보단 동생들이 입원해야 맞다고 생각했다. 간 수치만 떨어지면 빨리 퇴원해서 불쌍한 엄마를 도와야 된다고 생각했다.   상담사 선생님이 병원 안에 있는 A.A.모임에 나가보자고 하셨다. 처음 나간 A.A.모임은 충격적이었다. 나보다 더 딱한 사람들도 많았고 아빠에게 더 많이 시달린 사람도 많았다. 그렇게 험하게 살아온 인생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다니! 저들은 창피하지도 않은가? 심지어 심한 욕도 서슴없이 해댔다. 대리만족인지 내 속이 다 시원해졌다.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는 내가 평생 살아온 이야기를 해도 될 것만 같았다. 이후 아침 일찍 병원에서 외출을 나오면 하루 종일 모임만 찾아다녔다. 모임 안에서는 쉼 없이 내 속의 이야기를 쏟아놨다. 심지어 오래된 멤버 선생님은 그런 나에게 정직하다고 했다. 그것이 나를 칭찬하는 소리 같아 기분이 좋아져 더 많이 경험담을 하고 다녔다. 그즈음 인천에서 1박2일로 진행되는 큰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가족 중 알코올 중독자가 있는 아이들이 모인 알라틴 모임에서 한 아이가 자신의 경험을 얘기했다. 그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울면서 말했다. 두려웠고, 무서웠고, 도망가고 싶었고, 누가 말려줬으면 좋겠다고...   어릴 적 내 마음의 소리였다. 나도 어릴 적 엄마가 우릴 버리고 도망 갈까 두려워 하기 싫지만 힘든 집안일을 했었고, 술을 안 사온다며 재떨이를 던지고 낫을 들고 쫒아오는 아빠를 피해 도망갈 곳이 없었다. 심지어 어린 동생들까지 건사하다 보니 매는 항상 내 몫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니 눈물이 쉬지 않고 흘렀다.   울다울다 문득 집에 있는 두 딸이 생각났다. 내가 또 다시 술을 마시면 우리 아이들도 나처럼 삐뚤어진 시각으로 힘든 삶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알코올 중독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술을 평생 못 마신다는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만 둬야겠다.’ 그 뒤로 나는 내 생각들을 접어두고 술을 안 마시려는 사람들만 만나러 다녔고, 안 마시려는 사람들의 제안대로 행동했다. 모임에 봉사를 오라면 “네”로 답했다. 퇴원 후 지방의 집으로 내려갔으나 지역에는 모임이 없어 첫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모임을 참여한 후 막차를 타고 돌아갔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내 뜻대로 살다가 망가진 삶인데 또 마음대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감사하게도 술을 마시지 않으니 작은 딸이 나처럼 불편한 성격이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모임에서 들은 대로 나는 아이를 어쩔 수 없지만 누군가의 도움은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주변에 도움을 청해 서울과 춘천, 부천, 천안에 있는 알라틴 모임으로 아이를 데려갔다. 지금은 아이가 많이 편안해져 대학에 들어갔고, 사회복지를 전공으로 공부하고 있다. 아이의 꿈은 자기처럼 힘들었던 아이들을 돕는 거란다. 모임에서 어느 멤버 선생님이 그런 말을 했다. 술을 마실 때보다 마시지 않을 때의 즐거움이 더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마시지 못한다고...   알코올 중독자는 알코올 중독자를 느낌 적으로 알 수 있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 집에서 몇 달을 나가지도 못하던 어느 날, 혹시 집에 숨겨둔 술이 있나 비틀거리며 찾아 헤매다 다시 침대에 기어들어와 누워있었다. 그런데 그때 나만큼이나 술에 찌들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아빠가 “미친년”이라는 말을 하고는 본인이 아끼던 소주 한 병을 내 머리 맡에 놓고 가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늘 내 걱정에 잠 못 자던 엄마보다 중독자 아빠가 내 마음을 더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퇴원 후 몇 해가 지난 지금, 술문제가 있던 남동생은 식구들을 모두 빚더미 위해 올려놓고 사라졌고 여동생은 6개월을 목표로 알코올 전문병원에 입원 중이다. 나는 마시지도 못하고, 안 마시지도 못하고, 무섭고 두려웠을 나의 사랑하는 여동생 귀에 어느 선생님의 귀한 단주경험담이 전달되기를 매일 기도드린다. 그리고 지금까지 평온하게 살 수 있게 도와주신 A.A.모임 멤버 선생님들과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다사랑 2021-02-09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수치심을 이겨내는 용기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   수치심을 이겨내는 용기   정○○   외래 진료 후 김태영 원장님께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를 권유받아 이 글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며 쓰게 되었다. 단주를 시작한지 2년이 되어간다. 공모전 참가를 결정하고 2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쓴 일기와 병원 생활 중 마음가짐을 다지기 위해 정리했던 메모, 그 동안 읽었던 책, 병원에서 수업 받았던 자료 등을 읽어 봤다.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요즘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도 많고 제약도 많은 생활을 하고 있지만 내 안의 감정 변화를 인정하고, 좋은 방향으로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애쓰며 하루하루 지내고 있다. 운동도 규칙적으로 열심히 하고 있고, 술 마시지 않은 맑은 정신으로 일상을 보내며, 예전에 느끼기 어려웠던 사소한 일상에서의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   2018년 9월 28일, 나는 ‘더 이상 미루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했다. 병원 근처 식당에서 스스로에게 마지막이라 위로하며 소주 2병을 마시고 입원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2017년 3월경 경제적 파탄과 가정 불화 등으로 견디기 힘든 혼란을 겪으며 점차 술이 늘었다. 사실 돌아보면 25년간 쉬지 않고 마신 술.. 고3 수능 시험 전날 마셨던 술이 나와 내 가족들에게 이런 큰 좌절과 슬픔을 줄 것이라고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 동안은 술이 내 사업과 인간 관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가족들과 지인들 모두 나와 술 마시는 것이 즐겁다고 말했다. 과음으로 실수가 없진 않았지만 실보다는 득이 많다고 생각했다. 술이 내 삶을 조금씩 갉아먹고 밑바닥까지 데려올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2017년부터 점점 늘어가던 술이 2018년 초여름부터는 점심 반주가 일상이 되었고 결국 아침에 눈을 뜨면 물이 아닌 술을 마시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오늘까지만 마시자’, ‘있는 술만 마시고 그만 마시자’라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시도 때도 없이 편의점으로 달려가서 술을 사고 있었다. 술냄새가 날까 걱정하며 가족들 또는 타인들 옆을 지날 때면 숨을 참으며 ‘이렇게 하면 모르겠지’라고 어리석은 생각을 하며 마시고 또 마셨다. ‘이래서는 안되겠구나’, ‘나는 중독이다’, ‘병원치료가 필요하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저런 핑계와 합리화로 입원을 미루며 술을 마셨다. 그러나 점차 금단이 심해졌고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을 때 결국 병원에 입원했다.   입원해서 처음 접한 병원 생활은 견디기 힘들었다. ‘난 너희와 다르다’, ‘난 원래 이런 병원에 있을 사람이 아닌 잘나가는 전문직 사업가다’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꽤 많은 날을 보냈다. 차츰 신체 건강이 회복되고 병원 생활이 익숙해졌고 수업을 듣고, 책을 보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점차 마음가짐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문득 돌아보니 기뻐서, 슬퍼서, 화나서 등등 내 감정과 모든 생각, 행동이 술을 마시기 위한 핑계가 아니었나 싶었다. 내 인생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함께한 가족 여행도 당당하게 술 마시기 위한 핑계가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들자 혼란에 빠졌다.병원의 도움을 받기 위해 입원했으니 우선 무조건 전문가를 따르자는 생각이 들었고 원장님과 상담사님을 믿고 회복을 위한 적극적인 치료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본격적으로 병원 교재를 보며 공부를 시작하니 책과 교재의 모든 내용이 내 모습을 훔쳐보고 써놓은 듯했다. 부끄러워서 숨고 싶을 만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거짓, 허영, 허세, 투사, 합리화, 조급함, 집착, 완벽주의, 선택적 사고, 극단적 사고, 책임 회피, 열등감, 충동성 등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많은 부분이 일치했다. 이를 계기로 내 자신의 결점과 돌아보기를 반복했다.그리고 결국 타인 아닌 나 때문에 ‘나로 인해 발생하지 않아도 될 일들이 벌어졌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수치심을 이겨내는 용기, 치부까지 드러내는 대담함이 글귀를 되새기며 차근차근 내 자신을 오픈하기로 했다. 우선 치료진에게 그리고 가족과 주변사람들에게 시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용기내 담당 상담사에게 내 자신을 숨김없이 오픈하고 털어놓았다. 이후 가족과 대화를 시작했고 4단계 발표를 했다. 이러한 내 결점에 대한 숨김없는 시인이 회복의 시작점이 되었던 것 같다.   지금도 병원 생활의 리듬을 유지하며 네시 반 기상, 열시 취침을 지키고 있다. 기상 후에는 먼저 메모를 읽으며 매일 새롭게 마음을 다지고 하루를 시작한다. 힘들고 지칠 때도 많지만 매일을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생활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렇게 몸에 밴 생활의 리듬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 단주 생활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오늘도 내 가방에는 응급 수첩과 병원 생활 중 정리해 놓은 메모 수첩, 병원에서 준 공동체철학, 받아들임, 평온함을 청하는 기도 등이 들어있고 생각날 때면 틈틈이 이것들을 펼쳐보곤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원외 재활을 끝까지 채우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퇴원해 당시에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컸지만 17개월의 병원 생활이 없었다면 나의 단주와 회복은 불가능했다는 것에 나와 가족 모두가 공감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싶다.김태영 원장님, 우렁찬 상담사님, 병원 모든 관계자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2020년 9월 12일

다사랑 2021-02-09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다시 찾게 된 나의 20대 청춘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   다시 찾게 된 나의 20대 청춘   황○○   안녕하세요. 현재 다사랑중앙병원 재활 병동에 입원중이며 병원 치료 과정을 통해 20대의 새로운 꿈을 갖게 된 알코올 중독자 입니다. 먼저 저는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회복수기를 쓸 수 있게 도와주시고 항상 옆에서 응원해주시는 가족과 치료진들, 환우 선생님, 위대하신 힘께 감사합니다.   2018년 10월 말 스스로 알코올 중독자라고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24살의 나이로 가족들에 의해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했던 당시 술을 5년밖에 먹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는 제가 중독자로 병원에 강제 입원하게 된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이 어렸을 때 아버지의 술문제로 힘들어했던 어머니 때문이라고 탓하고 투사하였습니다. 그저 저도 남들처럼 술을 즐기고 좋아했던 것뿐인데 아버지의 술문제를 저에게 투영시키시고 이상한 병원에 입원시켜 저를 문제아로 낙인찍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갑자기 단절된 생활의 두려움, 첫직장을 스스로 정리하지 못했다는 좌절과 분노에 더 이상 가족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왜곡된 사고로 병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술 때문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지만 술을 끊어야겠다는 생각보다 겉으로만 중독자임을 인정하고 빨리 퇴원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입원 당시 저에겐 2년 정도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있었습니다. 입원 후에도 헤어지지 않고 연락되었고 병원에 찾아오는 남자친구가 있었기에 병원 프로그램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겉으로만 잘 지내는 척하며 남자친구를 세상과 연결된 유일한 희망의 끈이라고 믿으며 생활했습니다. 입원한지 3개월 즈음 개방 병동으로 내려가지 않으면 퇴원시켜주지 않겠다는 부모님의 말씀에 전동을 준비하던 중 다른 여자가 만나보고 싶다는 이유로 남자친구에게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았습니다.   입원시키신 부모님께 이별의 고통을 투사하며 퇴원을 요구했습니다. 저와 공동의존이 심하신 엄마는 제가 불안해하니 함께 힘들어 하셨지만 상담사 선생님의 조언으로 저와 거리를 두고 한동안 면회도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무력감은 그야말로 밑바닥이었습니다. 부모님, 남자친구, 병원 그 무엇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무력감을 경험했습니다. 처음 병원에 입원했을 때 내 인생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불행이 모두 나에게 왔다며 현실을 도피하려고만 했습니다. 신을 원망하고 내 인생은 망했다고 생각하며 끝없는 동굴을 파고들어갔습니다.   관리 병동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체기를 보내던 중 상담사 선생님의 진심어린 권유에 ‘그래, 개방 병동이 다르다니 한 번 어떤 곳인지 가보자.’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항상 퇴원만 하고 싶었던 저는 위대하신 힘의 도움으로 개방 병동으로 전동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문제를 제대로 보기 시작한 것은 전동 후 4단계 자서전을 쓸 때부터였습니다. 저에게 술이 어떤 의미고 어렸을 때부터 남들과는 다른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중요한 일을 해야 할 때면 실수하기 일쑤였고 눈치 없이 상황에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여 의도치 않게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문제는 성인이 되어서도 해결되지 않았고 저는 아닌 척 했지만 문제들은 계속 말썽이 되었습니다. 어릴 때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아니라고 부정하기만 했던 병, ADHD라는 것을 4단계 발표를 통하여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술을 마시면 실수할 수 있다며 술에 취해서 잘못을 해도 그냥 넘어가는 음주에 관대한 세상에 술을 마시면 문제가 있는 나도 남들과 똑같은 평범한 사람이란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지기를 바라면서 시작했던 술은 첫 잔부터 평범치 못했습니다. 저의 첫 술은 성인이 된 기쁨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첫 잔을 들며 제가 했던 말은 “취할 때까지 마셔보자!”였습니다. 그렇게 첫 음주와 함께 필름이 끊겼습니다. 처음부터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소주 반 병에서 한 병이면 취했던 저는 술을 더 먹기 위해, 알딸딸한 느낌을 더 길게 느끼기 위해 술 마시고 토하기를 반복했습니다. 술을 마시고 친구들과 어울리면 제가 더없이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내가 바라던 삶이라고 생각하며 이제 행복해질 일밖에 안 남았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술로 인해 엄마와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제가 블랙아웃 되는 모습에 불안해하시며 저를 따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술을 마음대로, 먹고 싶은 만큼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엄마의 걱정이 간섭으로 왜곡돼 보였습니다. 술을 마신 지 2년이 되지 않아 엄마의 눈을 피해 혼자 몰래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집에서 TV를 보며 아빠가 사다놓은 술을 찾아 훔쳐 마셨습니다. 제가 아빠의 술에 손을 대자 부모님의 갈등은 심각해졌고 결국 집에서 술이 사라졌습니다.   친구들을 만나서만 술을 마시겠다고 당당히 얘기하고서는 술을 숨기고 혼자 몰래 마셨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러가기 전에도 집에서 술을 마셨고 편의점에서 혼자 일하는 동안에도 내내 술을 마셨습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술에 취해 있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러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취업도 했지만 일보다 술이 먼저인 상황이 반복됐고 업무에 차질이 생겼음에도 나는 아니겠지하며 술문제를 계속 부정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서도 술문제를 인정하지 못하고 부정하던 저였지만 1단계 발표 후 술문제를 인정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제 삶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의 실패자라고 생각했던 ‘알코올 중독자’라는 말이 제가 인생을 새롭게 살 수 있는 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고 지내며 맑은 정신으로 모두 느끼고 기억하는 하루하루가 감사한 삶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꿈은 저와 같은 ADHD로 힘들어하는 아이들에게 제가 받은 도움을 나누어주며 꿈을 찾아주고 회복하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에게 새로운 꿈을 꿈꾸게 해주신 다사랑중앙병원에 감사드리며, 2년이라는 시간동안 병원과 함께 술 먹지 않는 오늘을 살 수 있는 회복하는 알코올 중독자가 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김석산 원장님과 강상아 선생님, 같이 생활하고 있는 개방·재활 선생님들 모두에게 너무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다사랑 2021-02-09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술 마시지 않는 알코올 중독자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   술 마시지 않는 알코올 중독자   홍○○   2남1녀 중 장남으로 서울 태생이다. 미군에서 일하시던 아버지와 전업주부셨던 어머니. 지극히 평범한 가정이었고 행복했다. 마냥 개구쟁이던 내게 변화가 시작된 것은 초등 3학년. 설명하시던 선생님께 “그거 책에 있는데요!”라고 말했다가 짧은 몽둥이로 머리를 맞고 잠시 기절했었는데 그 이후 밤마다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밤이 두려웠고 심한 모멸감에 친구들이 이를 알게 될까 전전긍긍했다.   그렇게 성격이 소심해지고 감추는 버릇이 생겼다. 친구들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잘 사귀지 못했다. 중학교 2학년이 지나면서 문제는 멈추었지만 집안 환경은 내게 또다른 시련을 주었다. 아버지가 파킨슨병으로 투병하게 되셨고 어머니는 부업을 시작하셨다. 학교에서 투명 인간처럼 행동했고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같은 어릴 적 환경이 나의 중독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상담사 선생님께서 읽어보라고 권해주신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라는 책을 접하고 나서다.   내가 처음 술을 마신 건 초등학교 때이다. 아버지 심부름으로 주전자에 막걸리를 받아 오면서 길에서 홀짝홀짝 마셨는데 그 맛이 아주 달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친구가 오시거나 옆집 아저씨와 바둑을 두시면서 아버지가 막걸리를 드셨던 모습을 슬쩍 본 것을 빼고는 아버지가 술을 마시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다. 아마 내 중독이 아버지로부터 유전된 것은 아닌 듯싶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집에서 나는 착하고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아이였다. 어머니께서도 “니들 키울 때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나 사실 그건 순전히 어머니의 생각으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아픈 아버지를 돌보는 어머니의 억척스러움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 마음을 숨기고 성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반항하고 싶은 10대였지만 그렇게 억누르며 보냈다. 술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첫 잔은 고3 학력고사가 끝난 12월 어느 날이다. 친구가 집에 술을 준비하고 나를 초대했다. 한 잔으로 그 자리는 끝났지만 머리가 빙빙 돌던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강렬하게 남아있다.   이후 대입에 실패한 나는 동네에 있던 방위산업체에 다니면서 일이 끝나면 동료들과 술을 마셨다. 취한 동료가 진열장 유리를 몸으로 깨고 들어가는 모습도 보았고 술 마시고 싸우는 동료를 말리려다가 병으로 어깨를 맞아 찢어지는 상처를 입기도 했다. 처음 겪는 격렬한 사건들이었다. 부모님이 아실까 두려워 집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내 꼴을 봐줄 만하다. 이렇게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나를 걱정하는 부모님께 죄스러운 마음이 있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술의 양이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한 건 군복무 시절이다. 점호가 끝나면 침상 밑에 늘 대기하고 있던 술을 꺼내 내무반 전체가 물컵으로 마셨다. 강제성이 있었지만 난 즐기고 있었다. 제대 후 사회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일과가 끝나면 술을 마시는 게 일상이었다. 그리고 걱정하는 부모님의 말씀이 잔소리로 들려 대들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커지고 화를 이기지 못해 주먹으로 벽을 치고 대문 옆에 있던 화장실 유리창을 손으로 쳐서 12바늘을 꿰매기도 했다.   올바른 이성이 작동하지 않았다. 옳고 그름 없이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한 잔으로 시작된 술이 어느새 3차까지 가서는 필름이 끊겨 길거리에서 팬티만 입은 채 깨어난 적도 있었다. 고작 서른을 시작하는 나이였다. 아마 이때부터 중독이 시작됐다고 생각된다. 거의 매일 마시기 시작했으니까.   부모님과의 갈등은 점점 심해져 결국 따로 살자 선언하셨고 부모님은 서울을 떠났다. 그런데도 나는 그런 결정이 부모님 때문이지 나의 행동 때문이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홀로 떨어져 생활하는 동안 부모를 원망하며 술병을 기울였고 어떤 날은 직장상사 때문이라고 또 어떤 날은 세상이 나를 몰라준다고 술을 마셨다. 쉬는 날은 심심해서 TV를 보면서 마셨다.   몸에서 술기운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늘 축축하게 젖어 있도록 술을 마셨다. 화장실 가는 것도 귀찮아 주방 싱크대에 소변을 보기도 하고 자면서 침대에 그대로 싸기도 했지만 부끄러운 마음도 없었기에 청소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술이 떨어져 술을 사러 자전거를 끌고 가다가 골목길에서 자빠지고 나서야 조금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이러다 죽겠다고...   이런 모습을 보게 된 어머니는 집으로 가자고 설득하셨다. 그래도 살겠다고 뻔뻔하게도 순순히 응했다. 부모님과 생활하면서 술을 끊고 운동도 하고 어머니가 차려준 밥도 거르지 않고 잘 먹었다.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정신도 맑아졌다. 그러나 다시 일하면서 잠이 잘 오질 않는다는 핑계로 한 병씩만 마시기로 약속했고 얼마 간은 그랬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아 두 병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부모님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나를 살려주셨기에...   몇 년은 그래도 평화롭게 흘러갔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태어났다. 하지만 고부간 갈등이 빚어졌고 문제는 점점 복잡해졌지만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술을 찾았다. 수레바퀴처럼 다시 술이 나를 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내와의 갈등 역시 술이 주범이었고 부모님과의 갈등 역시 술이 주범이었다. 왜 이때는 몰랐을까? 술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후에 `중독성 사고’라는 책을 보니 이에 관련된 비유가 잘 되어있었다. (p59 중독자의 난독증)   결국 부모님과 분가했다. 갈등을 피하려고 그런 것이었지만 술은 내 곁에 있었다. 난 너 때문에 마실 수밖에 없다고 계속 외쳤다. 술로 한 달에 한두 번은 결근하고 아내는 내 대신 회사에 아프다는 핑계를 대야만 했다. 급기야 필름이 끊긴 상태로 아내를 죽이겠다 협박했고 두려움에 휩싸인 아내는 경찰을 불렀고 나는 구급차에 묶여 병원으로 실려 갔다. 이 사건이 내가 처음 입원하던 11년 전 일이다. 병원에서 한 달을 보내고 퇴원한 이후 A.A.모임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많다는 것에 놀랐고 위안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술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고 알코올 전문병원에서 보호사로 일했다. 그러나 절주는 되었지만 단주는 이루지 못했다. 처음부터 나를 지켜보던 선생님께서 입원을 하라고 권했지만 많은 알코올 환자를 보면서 나는 절주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키워가고 있었다. `왜 그들은 못 하지?‘하는 허무맹랑한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다. 밤 근무가 끝나면 낮에 잠이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내의 동의를 억지로 끌어내 술을 마셨다. 그러다 결국 술에 취해 출근하지 못해 잘리는 신세가 되고야 말았다. 이것이 보호사로 근무한 18개월의 기록이다.   알코올 병원이라는 족쇄가 풀리자 나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운전하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술은 음주 후 뺑소니까지 저지르게 만들었다. 다시 단주하리라 마음먹고 스스로 병원에 입원해서 9개월을 보냈다. 그러나 잘 될 것 같은 마음과는 달리 갈 길이 멀었다. 결국 단주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술을 마셨다. 이제는 이유도 없었다. 그럴듯한 이유도 없이 그냥 어쩔 수가 없었다.   결혼해서 사는 동안 술을 끊겠다고 아내에게 써준 각서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나열할 수도 없다. 입만 열만 거짓말이었고 나 자신도 스스로에게 질려 거짓말하는 것도 싫었다. 그냥 죽고 싶었다. 술 한 병만 마시겠다고 아내가 일하는 일터에 찾아가 애원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하고... 새벽에 눈을 뜨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 24시간 마트까지 걸어가 술을 사서는 바로 반병을 꿀꺽 마셔야 편안해지고 숨이 쉬어졌다. 그리고 후회. 아내와 마찰...   물병에 술을 부어 길거리에서 버젓이 마시는 짜릿함도, 운전하면서 술을 마시는 전율도, 화장실에서 토사물을 확인하고 다시 조금씩 목으로 흘려 넣어야만 했던 비참함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나가서 술 먹다 죽어버리라’는 아내의 절규에 그러겠다고 술과 수면제 수십 알을 먹었다. 깨어난 것은 병원 중환자실. 퇴원하는 날 점심에도 술을 마셨다. 아내는 지쳐 화도 내지 않았다. 다음날 법원으로 가서 합의 이혼을 작성했고 난 또 술을 마셔 병원에 입원했다. 어떻게든 이혼은 피하고자 입원했지만 도무지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병원에서 개방 과정을 수료하고 재활까지 끝나면 술문제도 끝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중독 관련 책을 통해 ‘그렇구나’ 이해했다고 생각만 한 것이다. 원장님 수업에서 회복은 단주+변화다. 그 변화는 실천이었다. 습관을 만들기 위해 책, 모임, 일기를 적어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기질적으로 지속성이 부족했다. 성격은 변화될 수가 있지만 기질은 어렵다고 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만 싶었다. 술에 지쳤다.   그래도 이혼만은 피하고 싶었다. 혼자 산다는 것은 내게 곧 죽음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내의 잔소리 없이 술을 멀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내가 살기 위해 이혼은 불가능했다. 그러려면 술을 끊어야만 했다. 그리고 술을 끊으려면 실천해야 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알코올 중독자로써 내가 살아야만 하는 길이 이 길밖에 없다는 것에 눈물이 났다.   더는 이렇게 살아선 안 된다는 의지가 다시금 나를 모임으로 이끌었다. 모임에서 감춰왔던 나를 끄집어낼수록 홀가분해졌다. 자유를 찾은 느낌이 들었다. 과거의 난 술 마시는 모습을 감추기 위해 얼마나 애썼던가. 또 그 부작용을 덮으려고 아니라고 얼마나 부정했던가. 나를 드러낼수록 이렇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술에 취해 있던 시절, 새벽에 잠에서 깨어 일어나면 고작 화장실에 갈 뿐인데도 아내가 벌떡 일어나 도끼눈을 한 채 “어디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내가 코를 고는 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지금은 내가 새벽에 깨도 일어나지 않는다. 코고는 소리도 들린다. 아내의 코고는 소리가 나를 미소짓게 하고 행복을 느끼게 한다. 지금도 조바심을 느낄 때가 있고 분노가 파도처럼 밀려올 때도 있다. 다만 그런 나를 인정하고 토닥토닥 해준다.    

다사랑 2021-02-09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희망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   희망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최○○ 저의 첫 음주는 20살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음주패턴은 음식물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한 번에 폭음(소주 4~5명 정도)을 하고 술을 마신 후에는 잠도 안 잤으며 다음날에는 필름이 끊겨 전화를 보기 두려웠습니다. 내 기억에는 없는데 대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화해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두려움에 금단과 싸우며 사흘을 고스란히 물만 먹고 토해도 봤지만 사흘째가 되면 더 많은 양의 술을 마시기 일쑤였습니다.   아버지는 제 나이 13살에 돌아가셨습니다. 홀로 저를 키우며 나이 든 어머니에게 잘 해드린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자의입원을 했던 것은 저의 큰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2007년 6월, 병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했을 당시 제 나이 38살이었습니다. 콜택시를 타고 평촌에서 진행되는 A.A.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서울A.A.모임을 알게 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빠지지 않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신이 저의 교만함을 간파하셨는지 모임에 나간 지 100일 만에 재음주를 하였고 이후 1년 6개월을 취해 살았습니다. 술 때문에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 된 딸의 입학식에도 가지 못하고 등하교도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2학년이 된 딸의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인 2009년 다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 후 올해로 단주 11년이 되어 병원에서 단주칩을 받았습니다.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술을 마실 땐 긴 터널 속에서 바늘 구멍만한 빛이라도 세어 나오길 기대했는데 이제는 단주를 하면서 요양보호사와 간호조무사 자격증도 따고 노인복지 학사를 받기 위해 늦깎이 대학 생활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폭력 상담 교육, 알코올과 약물 상담 교육 ,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실시하는 알코올 전문 상담사 교육 등에 참여해 다수의 자격증과 수료증을 준비하고 취득했습니다.   최근 A.A.모임에서도 단주칩을 받았습니다. 몇 년 전 모임 대표를 맡기도 했습니다. 초심자였을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모임 안에서 나의 존재가치가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과거 술을 마실 땐 상대와 나를 비교하며 ‘나는 왜 저 사람보다 덜 가졌는가?’하는 생각때문에 많이 힘들었습니다. 11년 동안 모임에 다니며 느끼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중독자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데 이로 인해 단주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불행은 내가 타인보다 못 가져서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해서 생긴다는 것을 이제 단주 10년이 지나니 알 것 같습니다.   회복하기 위해 노력 중인 모임 멤버 선생님들과 환우 여러분! 저는 일기, 명상, ‘AS BILL SEES IT’ 과 ‘깨어있는 하루’를 1시간에서 1시간 30분씩 매일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런 습관은 단주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도 계시겠지만 꼭 제가 믿는 예수님이 아니어도 각자 우리 마음속에 위대한 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혹시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걱정하며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지 않은가? 자문해 보세요.   나의 행동과 믿음은 타인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그 영향으로 누군가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을 보면 행복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단지 희망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제가 알코올 중독으로 다시 입원했을 때 9살이던 딸아이가 어느덧 20살이 되었습니다. 대학은 진학하지 않았지만 가장 아름다운 나이에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해보겠다며 열심히 학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희망을 행동으로 옮겨 실천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해 제 딸이 대견하고 기특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두서없는 글 읽어 주시느라 감사드리며, 아직 단주 11년차이지만 앞으로도 하루하루에 살자를 마음에 새겨 꾸준히 단주하겠습니다. 2020.09.29. 새벽녘 1시28분

다사랑 2021-02-09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나는 감사함으로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었다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   나는 감사함으로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었다   허○○   저는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1960년대 이전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아버지는 온순하셨고 가족밖에 모를 정도로 가정에 충실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투전꾼들의 꼬임으로 도박을 시작하였고 그때부터 본전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가족 모두를 잊은 채 오로지 도박에 중독되어 지내셨다고 합니다. 결국, 술과 도박으로 모든 재산을 다 날리고 오롯이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형제, 자매 3남 2녀를 남긴 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제 나이 4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대신해 그렇게 죽으라 막노동으로 가족 모두를 먹여 살리기란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그때부터 가족들은 뿔뿔이 헤어지게 되었고, 정말 지옥과도 같은 나날을 보냈다고 합니다. 급기야 아무리 노력해도 너무나 큰 고통이었고, 버티기에는 역부족으로 우리 집에는 큰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양로원으로 가셨고 큰형님은 원래 고향인 홍천으로, 누나들은 남의집살이가 시작되는 등 온 집안이 생이별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나마 공부 잘하는 작은 형과 막내인 저는 집에 남게 되었습니다. 작은 형은 줄곧 우등생이었는데, 저는 그렇게 오로지 공부만 하라는 엄한 형 밑에 남게 되었습니다.   저는 동네 친구들과 맘 놓고 놀지도 못했습니다. 작은 형은 늘 저를 책상에 앉으라 했고 만약 놀다 걸리면 형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는 상황이 거듭되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저도 줄곧 우등생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이듬해 우리 세 식구는 저의 중학교 입학을 위해 읍내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집은 단칸방 사글세 집이었습니다. 중학교는 수업료가 저렴한 고등공민학교로 입학하였습니다. 형의 계산으로는 제가 그나마 초등학교 시절 우등생이었으니까 나중에 검정고시를 보면 된다고 했습니다.   작은 형님의 스파르타식 교육을 통하여 고등공민학교 3학년 때에 치러지는 고입입학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형님은 이미 공무원이 되었고 저는 정규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형님은 입대로 집을 떠나게 되었고 어머니와 저 이렇게 단둘이 남게 됩니다.   습관처럼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는 늘 책상에 앉기는 했지만 이 습관도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그 무서웠던 형도 없으니 얼마나 해방이 되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때가 스스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친구가 찾아와 자신의 학교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자고 하여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 친구의 학교는 남녀공학이었고 도서관에는 우리 둘 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친구의 밀린 수학 과목을 가르친다며 같이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언제부터인가 학교 도서관에 학생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여학생들도 도서관에 나타나게 되었고 자연스레 제게 수학 문제를 물어보는 여학생들도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 한 여학생을 알게 되었고, 저는 얄팍한 수학 실력을 자랑하며 자만감에 취하여 공부를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여학생을 만나는 날만 기다리게 된 어느 날, 그 여학생의 남자친구라는 친구가 제게 싸움을 걸어왔고 그 계기로 저는 불량 학생의 길을 가게 됩니다. 매번 싸움 끝에 얻어맞은 상처와 아픔을 잊으려면 술을 마셔야 한다고 했고, 또 사과하면서 술을 마시게 됐고, 그렇게 제 생애 첫 잔은 싸움 끝에 남는 상처의 고통을 잊기 위해 시작된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1978년 1월 한겨울의 이야기입니다.   나의 첫 잔은 포도주입니다. 포도주는 쓰지 않고 달다는 친구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술을 접한 게 난생처음이었습니다. 포도주 몇 잔을 마시고 나니 마시는 건지 먹는 건지 모를 정도로 취해 버린 저는 그만 정신을 잃게 됩니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샴페인, 그다음은 소주를 양재기에 벌컥벌컥 마셨다고 합니다.   첫 술자리부터 정신을 잃고 그야말로 폭주 중의 폭주를 한 것입니다. 친구 집 자취방에서 시작된 술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나중에는 길거리에 쓰러져 동사 되기 직전 같이 마셨던 친구의 발견으로 구사일생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때 상황을 기억하자면 친구 어머니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뭔 놈에 술’이라며 화를 내셨고 함께 술을 마셨던 친구 두 명은 친구 어머니가 오시자 뒷문으로 피했습니다. 저는 방 한 쪽에 쓰러져 있었는데 친구 어머니께서 그런 저를 끌고 나와 길거리에 내동댕이쳤다고 합니다. 처음 마신 술로 인해 가혹하리만큼 큰 체벌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 소동으로 저는 3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고, 결국 내 어머니의 지극 정성스러운 간호로 살아나게 됩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어머님이 받으셨을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늘 책상에 앉아 책만 읽었던 아들이 이런 날벼락을 가져올지 말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 함께 하던 친구들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들의 세계는 선후배들이 힘이 센 자들을 중심으로 모인 불량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저는 그들보다 더 불량스럽게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가 어쩌고 어째? 어떤 패거리들이 내 조직의 친구를 때렸다고?’ 저는 늘 패싸움을 하면서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때부터 말입니다.   세월이 흘러 형님께서 군 복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동생 학교에 찾아가 담임선생님을 만나 제 성적부터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했던 큰 충격과 실망을 준 것입니다. 성적도 성적이겠지만 변해 버린 동생의 행동거지가 완전히 깡패 새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당연히 대학 입학 예비고사 성적은 형편없었고 대학 진학도 못 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형의 모든 희망을 저버리게 됩니다. 늘 동생의 일상은 깡패 같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형이 ‘넌 뭐냐?’라고 충고라도 할라치면 결국 큰소리가 오갔고 끝내 따귀라도 치게 되면 이제는 나도 컸다고 같이 주먹질까지 하는, 형도 몰라보는 개망나니가 된 것입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날마다 술과 담배, 다방 아가씨들과 냇가에 텐트 치고 놀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형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제발 이곳을 떠나 지금 어울리는 친구들과 관계를 끊고 새로 출발하라는 권유를 받게 되고 저도 마음 한구석에 이렇게 살아서는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차분히 나를 찾아 다시 공부를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울 남양동에 있는 경일학원 종합반에 들어가 재수생이 되었습니다. 서울 학생들의 학구열은 대단했습니다. 시골에 있던 제가 지내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학원 문이 열리자 서로 앞자리에 앉으려고 뛰는 학원생들의 모습부터 학구열의 환경이 전혀 달랐습니다. 저는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의지로 바로 적응할 수 있었고 재수생 생활 3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형님의 권유로 공무원 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그런데 필기시험에 합격했을 때, 아직 면접도 남아 있는 상태에서 무슨 면접이냐며 모든 짐을 싸서 다시 집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대학은 무슨, 그저 형님처럼 나도 공무원이나 하자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친구들을 만나 강변으로 가서 바로 술을 마시며 놀았고, 그동안 못 마신 술 한꺼번에 다 마시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지내다가 결국 면접시험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공무원 시험에 떨어졌다고 또다시 술을 찾았고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입대를 앞두고 더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그렇게 술을 마시다가 군에 입대했습니다.   군대 생활 30개월은 나의 무질서했던 생활이 정리 정돈이 되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나니 직업을 가져야 했습니다. 다시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하고 이후 여러 번 실패하며 고전 끝에 29살의 늦은 나이로 최종 합격을 하게 됩니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며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고, 그때 아내는 이미 공무원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해 바로 결혼도 하였습니다.   나의 방황이 여기서 막을 내리나 싶었는데…. 처음 발령지가 시골에 있는 면사무소였습니다. 공무원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마을 이장님들과 술자리부터 직원들과 술자리, 회식, 동창회, 체육대회 술자리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같이 술을 마셨던 사람들은 제게 술을 잘 마신다며 그들이 술을 마실 때마다 저를 찾았고 저는 늘 신바람이 나며 술을 마셔댔습니다. 그러던 중 인사 발령도 여러 번 났고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술을 마셨어도 출퇴근만큼은 정확히 지키는 등 제 역할은 확실히 해냈습니다.   그렇게 공무원 생활 12년째가 되던 해, 제 나이 41세에 술 문제로 병원으로 입원하는 사태를 밟게 됩니다. 병원은 대학병원 정신과로, 외부로부터 통제된 병실이었습니다. 제가 13일 동안 아무것도 못 먹고 계속 술만 마시고 그러다가 술에 깰 때 즈음에 다시 또 마시는 생활을 하다가 끝내 의식을 잃자 아내는 제가 죽을까 봐 병원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입원시키게 됩니다.   정신을 차리고 기력을 찾았을 때 치료진들은 제가 병원을 입원한 지 5일째라고 했습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저는 왜 나를 밖에도 못 나가고 꼼짝할 수도 없는 곳에다 가둬 놓았느냐며 아내에게 전화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당장 퇴원시키라고 화를 냈습니다. 저는 그때 아내한테 갖은 욕설을 다 퍼붓고 오직 내가 갇혔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아내가 왜 거기까지 나를 데려갔는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병원 입원 기간 분통만 터지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28일 만에 퇴원하게 되었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어쩌다 출장이라도 가게 되면 산과 들, 자연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한 잔 술을 마시고 싶다고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병원에서 퇴원한 지 3개월을 채 넘기지 못하고 또 술 한 잔을 입에 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또다시 술자리를 찾게 되고 이런 생활을 반복하다 결국은 3개월을 채 못 넘기고 술 한 잔이 장취로 이어지고 끝내 병원에 실려 가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41세가 되도록 병원이라고는 모르고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이 반복되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퇴원 후 다시 사무실 출근하는 일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직원들이 다 저를 멸시하는 거 같고 저만 쳐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대학병원 정신과를 수없이 입·퇴원 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아 도대체 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이런 생각조차도 못하며 술버릇의 악순환은 계속되었습니다.   아침이면 머리가 너무 아프고 속이 메스껍고 너무 괴롭다 싶으면 술이 깨기도 전에 한 잔을 마시고 또 그 한 잔의 술로 결국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술이 깨기도 전에 한 잔, 그렇게 해장술이란 것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아내는 저를 어떻게든 치료해보겠다고 여러 정보를 찾아 결국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시키게 됩니다.   다사랑중앙병원의 관리병동, 개방병동, 재활병동 이런 체제는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관리병동에서의 12단계 중 1단계 발표를 통해 지난날 나의 술 문제를 뒤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단주를 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보호자 참석 하에 진행된 1단계 발표를 저는 가슴으로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머리로 발표했었습니다. 원장님께서 회진 시에 늘 하시던 ‘정직이란 그 말씀을…. ‘왜? 내게만 주문을 하시나?’ 하는 제 속의 양심을 들킨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역시나 머리만으로 진행된 저의 1단계 발표와 4단계, 9단계 발표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퇴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재발하고 재입원하는 나날이 반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관리병동보다 개방병동의 생활을 통해 얻는 자유로움이 좋았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의 단계별 치료 시스템은 정말 훌륭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환자들이 알코올 중독 문제에 적응하고 해결하는 단계별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제 상담을 맡으신 윤희숙 상담사님이 제게 하셨던 말들…. 12단계 필사를 해보자, 불완전한 영성, 아직도 가야 할 길 등 필독 도서, 수요일 A.A.모임이 있을 때마다 맨 앞에 앉으라는 감독의 눈초리, 병원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그 말들이 결국 나를 위한다는 것임을 왜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는지…. 상담사님이 진정으로 환자를 위하는 마음으로, 제게 그렇게 열과 성을 다했음을 말입니다. 지금도 되돌아보면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수없이 진행되는 토론과 학습은 제 단주 생활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폭주로 시작되었던 제 음주 습관이 멈춘 지 이제 3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제게는 단주 생활 밑거름의 양식이 된 것입니다. 내가 가장 즐겼던 술과 담배는 끝내 나를 죽음의 문턱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2018년 지주막하출혈로 의식을 잃고 2회에 걸친 수술 끝에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 뇌출혈의 원인은 바로 술과 담배였습니다. 너무도 끔찍한 병을 직접 체험한 저로서는 그렇게 내 몸에 휘감았던 술과 담배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원인이라는 걸 고백하고 싶어서 이렇게 수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글을 잘 쓰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저처럼 누군가가 술로 인해 이 지경까지 가지는 말게 해야겠다는 신념이 생겼고 그래서 경험담을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지금도 저는 뇌출혈 후유증으로 그렇게나 좋아했던 축구도, 족구도, 잘하지 못합니다. 뇌 신경과 의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지금까지 사용했던 운동 신경이 다 죽었다고, 그래서 옆에 있던 뇌 운동 신경을 다시 살리는 재활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합니다.   변화된 삶을 살아야 했기에, 늘 일상에서 대하는 모두에게 긍정적인 마음으로 감사함을 표현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저의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매사에 갖는 감사함은 늘 마음에서 소용돌이치는 갈망감과 내적 갈등을 사라지게 하고 늘 평온함이 유지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아!~ 감사함이야말로 나의 유일한 백신이구나’를 매일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저의 모습부터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맑은 하늘을 만끽하며 이 모든 것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중입니다. 술과 담배를 접하지 않은 지 이제 3년이 넘었습니다. 얼마 전, 제 아들의 결혼식이 있었고 그때 주변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축복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술을 끊고 온전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얻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다사랑중앙병원의 여러 치료진과 또 환우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회복의 길을 걷고 있는 저는 너무도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이 모든 기초를 다지게 해 준 다사랑중앙병원 치료진들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다사랑 2021-02-09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단주 후 인생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   단주 후 인생   이○○   인생은 이정표 없는 나그넷길이던가? 드높고 맑은 10월 창공에 덧없이 흐르는 구름 한 조각처럼 지난날들이 마음 한구석 아픈 기억으로 되살아난다. 2012년 10월 26일 처음으로 알코올 병원에 입원한 날이다. 꽃잎에 이슬처럼 바라보며 함께할 때는 영롱하고 아름답던 신비함도 자연의 섭리에 따라 찬란한 태양 빛으로 사라지더니, 일생을 함께 해야 할 사랑하는 이들이 하늘나라 먼 곳으로 내 곁을 떠나고 나니 허전함과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들고 의지할 것이 술밖에 없었다. 그렇게 목적도 없이 마시다 보니 육신이 너덜거리고 삶은 포기되어 나락으로 떨어져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이들이 얼마나 애간장을 졸였으면 아비를 알코올 병원에 입원시켰을까?   이제는 돌아오지 못할 먼 곳에서 나를 지켜보고 계실 그리운 어머님! 예쁘고 고왔던 당신, 고향을 지키며 형제들의 울타리가 되었던 형님!이 소중한 분들이 술타령으로 멍하니 인생 가는 줄 모르고 보낸 공허한 시간 속에 모두가 내 곁을 떠나셨으니 더욱이나 가슴이 저리고 후회도 많다. 알코올중독으로 사랑하는 가족들이나 이웃들 모두에게 황당한 피해를 주고 바른 인생을 살지 못해 고통을 준 일들은 세월이 가도 그저 송구스럽고 죄송한 마음뿐이다.   사랑하는 소중한 아들, 딸 그리고 형제들이여! 통곡하는 마음으로 회고한다. 술에 취한 날이면 정신은 혼미하고 행동도 변화무쌍하니 가족들이 겪었을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참담한 심정은 하루하루 그날이 오죽이나 괴로웠을까? 비틀거리는 걸음, 거친 행동이나 말투로 주위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주정뱅이가 아버지라는 현실로 나타나면 얼마나 창피하고 곤욕스러웠을까? 술에 취해 길에 쓰러진 아버지를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의 심정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장취와 숙취로 10여 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꼼짝 않고 누워 있으면 자식들은 얼마나 정신적으로 힘들고 아버지에게 느끼는 실망은 어땠을까? 하나밖에 없는 오빠라고 각자의 가정에 식구들보다 오빠를 챙기느라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우리의 가치관은 공기처럼 떠다니다 바람에 쓸려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힘들었던 지난날들에 물심양면으로 치료와 단계적 교육을 통해 단주에 큰 도움을 주신 다사랑중앙병원 의료진들과 상담사분들께 정말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당시에는 아이들이나 주위 모든 분이 한없이 원망스럽고 밉기만 했는데, 이제는 소중한 기억으로 아름다운 인생의 한 자락이 되어 환한 미소를 짓게 한다.   다사랑중앙병원 연중행사 중 병동 간 탁구대회에서 2병동(우보라 원장님)을 대표해 개원 이래 노년층 우승을 만들어낸 감회는 지금도 생각하면 대견스럽고 뿌듯함에 가슴이 설렌다. 개방병동에서 치료할 때는 여가를 이용해 삼삼오오 모여서 모락산을 오를 때면 봄 기운이 완연한 4월 햇살에 길옆 산수유 꽃봉오리에 새 희망이 용트림하고 가지마다 움트는 연초록 잎사귀마다 모락산 전투에서 조국을 위해 장렬히 전사한 6월 무명용사들의 넋이 우리의 육신을 다독일 때면 맑은 정신, 건강한 몸으로 내 아들과 딸, 형제들 그리고 몇 달간 희로애락을 함께 한 환우분들과 온 누리 민족들 모두와 행복한 여생을 살아가리라 굳게 다짐을 하며 고즈넉한 청계사 풍경 소리에 세종임금님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한양궁궐 그리고 유배의 한이 오랜 세월 여명으로 나를 바르게 일으켜 세운다.   다사랑중앙병원의 단주치료 후 덧없이 흐른 세월 덕에 각고에 새겨진 주름은 늘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모습일지라도 마음은 세인들에 존경받는 어르신이 되자고 노력한다. 여가를 활용해 내면적인 수양과 작은 봉사활동에 최우선적인 시간을 갖고 동아리 회원들과 색소폰 연주로 어려운 여건에서 자괴감에 빠진 분들을 찾아 음악적 재능 기부로 활력과 희망을 전하고 있다. 가족의 죽음 앞에 슬픔과 공허함을 위로하고 시·공간을 함께 하는 연령회 봉사로 지난날에 자신을 돌이켜 보고 작은 일이나 내가 하는 일들로 함께하는 이들의 마음에 여유와 내일을 설계하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남아있는 우리들의 인생도 늘 맑은 미소와 행복으로 후회 없는 삶이 되기를 기원하며 모두 모두 건강하시고 즐거운 여생이길 바라마지 않는다.   *** 後悔(후회) & 希望(희망) ***   창밖에 햇살을 따사로운데마음은 공허하고 시리기만 하다.   하늘나라 계신 어머님이 보고 싶고어머님 곁에 있을 내 님의 사랑이 그리워서인가?   어머님이 보고 싶고 그 사람 사랑이 그리웁다고비워진 술잔을 옆에 놓고초점 없는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면걱정 어린 차가운 시선들을 피하듯 외면하고   이제는 오늘만, 또 오늘만 하면서쓰러진 술병들 속에내 삶에 희망도 아스라이 멀어질 때   은총의 손길들이 구원의 길 인도하사얼룩지고 해묵은 옛 상처 치유되고애틋한 酒(주)님의 사랑도 정리해보니멀리 있던 희망과 행복이우리 곁으로 살며시 내리시어따스한 손 맞잡고 건강한 인생큰 사랑이 함께하는 행복한 낙원으로같이 가자고 고운 미소로 우리를 부르네.2020년 10월 18일

다사랑 2021-02-09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노력은 결실을 맺는다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   노력은 결실을 맺는다   김○○   안녕하십니까. 저는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은 알코올중독자 김**입니다. 저는 시골 자연부락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아버지의 술 심부름을 잘하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잔등 너머에 있는 주막에서 양은 주전자에 술을 사 오면서 꼴짝 꼴짝 술을 마셨습니다. (나중에는 집안 공동 우물에서 물로 희석해 채웠습니다) 형제 중 유난히 몸이 허약하고 소심하고 내성적이라 항상 의기소침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후 광주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후 자취 생활을 하면서 술을 마시며 친구를 사귀고 주량이 남들보다 세다며 호기를 부리며 생활했습니다.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 후 한때 술을 끊고 밤낮으로 공부에 매진해서 원하는 자격증(수질환경기사 1·2급)을 취득한 뒤 혈혈단신 상경하여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남들이 싫어하는 궂은일을 마다치 않고 솔선수범하여 밤을 낮 삼아 회사 생활을 하며 저의 근면 성실함과 실력을 CEO로부터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IMF 시절 많은 직장인과 자영업자가 길거리로 내몰릴 때도 저는 ‘위기가 곧 기회’라는 생각으로 회사에 막대한 이익을 창출해냈습니다. 에너지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기계를 1일 가동 후 2일 정지하곤 했는데 당시 환경부·원동부 팀장이었던 저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날밤을 세며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발상의 전환(콜럼버스의 달걀)을 통해 소각시설에서 나오는 폐열을 대체 에너지로 사용 가능한지 환경부에 질의하고 긍정적인 회신을 받아냈습니다. (에너지 이용 합리화법, 폐기물 관계법규, 대기환경 보전법 등을 탐독한 결과였고, 이러한 대체 에너지 사용은 국내 최초였습니다) 결국 기존의 에너지 비용을 10% 이하로 줄이는 데 성공하게 되었고 생산 시설을 IMF 이전처럼 100% 가동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를 인정받아 성과급 등으로 억대 연봉을 받게 되었습니다.   호사다마라고 해야 하나요? 어느 순간, 많은 이들로부터 모함과 투서가 난무하게 되었고 더는 회사에 다닐 수 없는 상태가 되면서 어쩔 수 없이 회사를 퇴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술에 의지하면서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무위도식. 아침에 눈 뜨기가 겁이 나 늦은 밤 어슴푸레하면 구멍가게에서 술을 잔뜩 사 와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구석을 찾거나 옥상에 올라가서 쭈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술을 마셨습니다. 술이 깰 만하면 또다시 술을 찾아 마시고…. 맨정신으로 깨어 있으면 그동안 열심히 잘 살아왔던 90%의 노력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리고 못했던 1~9%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사람을 미쳐 버리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점점 술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는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하는가요? 막걸리를 옆에 차고 꿀꺽꿀꺽 마시며 걷고 있는데 어느 순간 사물이 두 개로 보이고 집에 누워 TV를 보는데 겹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시점부터 블랙아웃 현상이 나타났고 술병(알코올중독)으로 인해 죽음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아들의 손에 끌려 산본에 있는 원광대학교병원 정신과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고 금주를 약속하고 퇴원을 종용했습니다. 퇴원 후 작심삼일이라고 며칠을 가지 못하고 다시 음주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다시 인터넷을 수소문해 의왕시 소재 알코올중독 전문병원인 다사랑중앙병원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입원 치료를 권하면서 아들이 말했습니다. “주정뱅이 알코올중독 아버지를 둔 아들에게 어느 부모가 딸을 주겠는가?” 다 큰 하나뿐인 아들의 울먹이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쇠망치에 한 방 꽝!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저의 선입견은 알코올중독자가 입원하는 병원은 감금당하고 폭행당하는 정신병원이며 소, 돼지처럼 인격이고 나발이고 개 취급을 받는 곳이라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시설이 잘되어 있다면서 다사랑중앙병원 입원 치료를 권유하였고 결국 치료받아 보겠다고 결심한 뒤 내원하여 김태영 원장님과 상담 후 7병동에 입원 관리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원장님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애정과 박민호 상담사님의 따뜻한 관심, 간호사님들의 헌신, 잘 짜인 교육 프로그램에서 조금씩 마음을 열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술로부터 해방될 수 있고 퇴원 후 단주를 실천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교육 프로그램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성실히 임했습니다. 부부 솔루션에도 참여했고 가끔 상담사님 교육 후 함께 농담도 하는 마음의 여유까지 생겼습니다. 특히 수간호사님의 특이한 억양 덕분에 웃음 참느라 힘들었던 기억도 납니다. 하지만 교육 도중 듣게 된, 병원을 거쳐 간 수많은 알코올 중독자 중 5년이나 10년을 꾸준히 단주에 성공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충격적인 말에 분노한 적도 있었고, 모멸감으로 말문이 막힌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오기가 발동하여 ‘그래, 해보자’ ‘I CAN DO IT!'의 자세를 유지했습니다.   ‘어떻게 꾸준히 단주를 이어가면서 회복의 길을 갈 수 있을까? 술 한 잔 들어가는 순간 모든 게 끝인데…. 하늘의 별 따기인데…. 하면서 매일 잠이 들었고, 소등이 꺼지면 702호에서 숨을 죽이며 되새겼습니다. 첫째, ‘오늘까지만 원 없이 마시고 내일부터’에서 ‘오늘 하루만 참자’로 하면 내일이면 다시 오늘이 되는 것이고. 둘, 나의 전두엽 뇌(교육받은 내용)를 세뇌하며 버리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예: 이슬이(소주)가 생각나면 사이다, 막걸리가 생각나면 밀키스, 맥주가 생각나면 맥콜) 한국인의 애주가 대표 브랜드 치맥이 생각나 매일 밤 수천 번, 수만 번 되뇌며 잠을 이루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꾸게 된 꿈들은 술을 찾아 곳곳을 헤매는데 못 찾고, 친구를 만나 술상 앞에 앉았는데 나에게는 사이다가 놓여 있는 꿈이었습니다.   이제 됐다 하여 1단계 발표 단주 서약 후 퇴원하고 집에 오는 도중 아들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의지만으로는 힘드실 텐데 가능하시겠습니까?” 아들의 질문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뭐.”라고 대답했지만 내심 걱정이 물밀 듯이 밀려 왔습니다. “아버지, 하실 줄 아는 운동 있어요?” 라고 묻길래 소싯적 동네 탁구 조금 한다고 했더니 부곡동 주민자치센터에 바로 3개월 이용권을 끊어주었습니다. 매일 축 늘어진 몸을 이끌고 탁구장에 갔으나 아는 이 하나 없고 랠리 해주는 이는 더더욱 없어 남들 하는 거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귀가하곤 했습니다. 퇴원 후 10개월 만에 체중이 약 7kg 빠져버리며 멘붕 상태가 되는 등 수많은 좌절이 있었으나 다사랑중앙병원에서의 치료, 관리, 교육을 되새기며 이를 극복하고 있습니다.   김태영 원장님을 비롯하여 임직원 여러분의 무한 사랑과 애정 어린 관심으로 술(알코올)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삶에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해주심에 감사드리며 CRM 박미희 상담사님의 ‘초심을 잃지 말자’에 동의하며 초심을 잃지 않고 앞으로도 알코올중독으로부터 회복의 길로 쭈욱 걸어갈 것이고, 가야만 한 길인 것 같습니다. 끝으로 저는 퇴원 후 재취업에 성공하여 직장생활에 충실히 하고 있으며 생활체육인 탁구동호회에 가입해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제2의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努力은 결실을 본다.-  

다사랑 2021-02-09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감사한 나날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   감사한 나날   이○○   안녕하세요. 다사랑중앙병원에 2020년 2월 13일에 입원해 6월 13일에 퇴원한 이OO입니다. 이번에 회복 수기 공모전을 한다는 문자를 받고 나도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을 해서 이렇게 한번 써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입원 생활하며 느낀 점과 퇴원 후 생활 경험하며 느낀 점 순으로 써보겠습니다. 저는 솔직히 음주 후 필름이 끊기고 폭력적으로 변하고 길거리에서 토를 하거나 길 또는 화장실에서 잠드는 것을 술을 마시면 누구나 하는 행동으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런 행동들은 누구나 다 하는 게 아니고 알코올 중독자들이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하기 4일 전에 마지막 잔을 놓았는데, 마지막 잔을 놓은 날도 제가 많이 취해서 사람들이랑 싸우고, 친구들에게 욕도 하고, 집에서 토하고, 부모님께 전화해서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때 이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부모님은 예전부터 ‘너는 알코올중독자 같다. 알코올 문제를 치료하는 병원이 있으면 입원해서 알코올 문제를 고치자’고 말씀하셨고 저는 마지막 잔 놓은 날을 생각하며 입원을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입원 전에 고기를 실컷 먹고 입원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코올병원이 처음인지라, 6병동에 올라와 주변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여기는 분위기가 참 이상한 곳이다. 진짜 나한테 시비 거는 환자들 있으면 계속해서 싸울 것이다.’ 라는 생각으로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아침밥을 먹으려고 반찬을 보자마자 ‘아! 육류는 없고 다 풀만 있네? 진짜 짜증이 나 죽겠다.’ 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처음 입원해서 5일 동안은 2인실에 혼자 있는 거라 수업도 못 듣고 하니 담배만 주야장천 피우고 누웠다가 일어나서 담배 피우고 이런 생활만 계속 반복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주변 젊은 환자들이랑 친해지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나보다 1살 많은 형이랑 친해져 같이 담배도 피우러 가고 대화도 많이 나누면서 다사랑중앙병원 시스템에 대해서 대충은 들어 금방 파악하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한 2주 뒤에 그 형이 개방병동으로 간다고 해서 ‘아! 이제 혼자 남으면 어떡하나?’ 이런 걱정을 조금 하게 되었고 그 형의 ‘나 먼저 내려가 있을 테니까 빨리 내려오면 나 볼 수 있어.’ 라는 말을 듣고 일단 ‘나도 최대한 빨리 내려가겠다.’ 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형이 내려가는 날에 세면 바구니를 저한테 주고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대략 2일 정도 혼자 지내다가 제가 지내고 있는 2인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나가서 보니 젊은 사람들 2명이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친해지려고 먼저 가서 말도 걸고 그냥 이것저것 대화를 하다가 친해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저 포함 3명이 함께 생활하며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3명에서 같이 다니니까 운동할 때에도 기분이 좋았고 일찍 일어나는 것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새로운 환우들이 오면 일단 나이를 먼저 보고 젊은 연령대면 제가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고 친해지고 같이 다니고 해서 저 포함 총 5명이 되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저희 친형이랑 동갑이라 더 편하게 느껴져서 그 형한테는 제가 담배가 있어도 없는 척하고 담배를 많이 받아서 피웠고, 같이 수업 듣고 탁구 하고 6병동 수간호사님이랑 대화도 많이 하면서 관리병동 생활을 한 달 반 정도 했습니다. 저랑 친한 형들이 천천히 개방병동에 내려갈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빨리 준비해야겠다.’ 는 생각을 더더욱 확고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박민호 상담사님이 내주신 숙제도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해서 내고 발표지도 쓰면서 이렇게 2주 정도 고생한 끝에 발표했습니다. 발표하는 중간중간마다 부모님께 죄송하고 지인이나 친구들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이 급격하게 치밀어 올라서 발표 후반부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도 발표를 끝내니 후련한 마음이 더 커져서 금방 진정되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개방병동에 내려갔는데 관리병동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일단 가장 좋은 것은 라이터를 가지고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사실이고 2층이 오픈되어 있다는 사실과 일주일에 한 번씩 간식비를 현금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참 신기했고 새로운 세상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개방병동에 내려갔을 때는 아는 형들이 2명 있어서 다행히 개방병동 생활에도 크게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4월 중에 퇴원한다는 이야기를 해서 ‘형 왜 벌써 퇴원해?’ 라고 물어봤고 그 형은 ‘나 밖에서 할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퇴원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솔직히 ‘내가 형이랑 가장 친한데 형 나가면 쓸쓸해서 어떡하느냐.’ 라고 말을 했고 그 형은 ‘너도 빨리 퇴원해서 밖에서 볼 수 있으면 보자.’ 라고 말을 했고 저는 알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쓸쓸한 1~2주를 보냈고 그래도 남은 형들이랑 잘 지내면서 개방병동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개방병동에서도 두어 달간 있으면서 4단계 발표도 하고 9단계 발표도 했습니다. 주변 환우 형님들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병원 입원이 처음인 사람이 9단계 발표하는 게 쉬운 게 아닌데 고생 많았다.’ 고 말씀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발표를 준비할 때 솔직히 고비가 많았지만, 보호사님 환우 형님들의 조언들을 생각하며 버텼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6월 13일 퇴원하는 날이 되었고, 이제 진짜 밖에 나가서 생활한다는 생각을 했을 때 정말 기대가 컸습니다. 그래서 아침부터 부모님께 전화를 계속했고 한 10시 30분쯤에 병원 근처에 다 왔다고 했을 때 저는 미리 짐을 다 정리해 놓은 상태라 바로 내려가서 짐을 차에 실었습니다. 그리고 환우 형님들을 한번 보는데 아주 별의별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데 웃겨 죽는 줄 알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먼저 퇴원한 7병동 형님이 저 퇴원하는 날에 외래를 왔는데, 그 형도 웃으면서 집에 가라는 뜻으로 이상한 소리를 막 하는데 아주 웃겨 죽는 줄 알았습니다. 차에 타면서 일단 할머니 댁으로 먼저 갔고 할머니한테 오랜만에 인사를 드리고 집에 왔는데 별로 변한 게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적응하는 속도가 기가 막히기 때문에 금방 병원 밖의 생활에 다시 적응하게 되었고 외부 A.A.모임에 나가기 위해 현재 A.A.모임 하는 곳이 어디인지 찾아보았습니다. 서울까지는 예전부터 생활해 왔던 곳이기 때문에 서울 쪽으로 알아보게 되었고 처음 A.A.모임에 나간 곳은 명동 모임이었습니다. 처음 갔는데 솔직히 병원에서 A.A.모임 할 때랑 다르다는 것을 느꼈고 여러 사람이 경험담을 경청하며 들으면서 ‘내 경험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나는 회복자의 길을 걸어야 해서 A.A.모임도 자주 나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조금씩 고비가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솔직히 고집이 조금 센 편인데 저와 계속 의견 차이가 생겨서 결국 말다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바로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부모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데는 다 이유가 있겠다.’ 라고 바로 생각해서 아버지 말씀이 맞고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랬더니 말다툼이 길게 가지 않고 바로 끝이 났고 그렇게 평범하게 일상생활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7월 즈음에는 서울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제가 좋아하는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고 50km~60km 정도 타고나면 몸이 조금 힘들지만 개운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이런 생활이 한 달, 두 달, 석 달, 현재 넉 달이 지나고 다섯달째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정말 다사랑중앙병원에 매일 매일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감사한 나날을 지내고 있는 회복자 이OO이었습니다.  

다사랑 2021-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