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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회복수기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치료받은 환자분들의 생생한 회복 경험담입니다.
알코올 중독 치료를 통해 새 삶의 희망을 찾으신 환자분들의 진솔한 회복 수기가
알코올중독으로 고통받고 있는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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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거야?

[2019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대상]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거야?   김○○   “난 죽어야 해! 나 같은 건 죽어야 해! 지금 내가 죽기 위해서는 술이 필요해.” 한겨울 새벽 2시의 추위를 아는지 모르는지 등에는 술을 담기 위한 학생 가방을 메고 검은 빵모자를 눌러쓰고 또 술을 훔치러 갑니다. ‘지금은 그 술집은 영업이 끝나고 아무도 없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오직 소주병을 떠올리며 몸을 비틀대며 걷다보니 어제의 그 술집이 저만치 보입니다.   주변에 사람이 다니는지 살피면서 천천히 맞은 편에서 영업이 끝난 것을 확인하고는 익숙하게 한 쪽 구석에 소주 상자를 내려 정신없이 가방 안으로 소주병을 쑤셔 넣습니다. 최대한 많이 담기 위해 눕혀서 담고 가방이 차면 점퍼 주머니에 하나씩, 바지 주머니에 하나씩 담고서 한 손에 또 한 병을 든 채로 뒤도 보지 않고 허겁지겁 집으로 도망쳤습니다. 경찰차가 지나가면 옆 골목으로 숨은 뒤, 한쪽 손에 소주를 따서 병 채로 두 세 모금 간신히 넘기고 토할 것 같은 느낌을 간신히 참으며 열 다섯 병이 넘는 소주가 든 가방을 메고 삼십 분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 때문에 간신히 열쇠로 문을 딴 후 들어선 곳은 온갖 썩은 내가 진동하고 발 디딜 곳조차 없이 빈 술병들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13평짜리 집은 빈 소주병과 온갖 쓰레기들이 주인을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구석 공간에 앉아 커튼을 친 어두운 방 안에 TV를 켜놓고 바로 술병을 따서 병 채로 들이마셨습니다. 안도의 숨소리... 한 주는 버틸 수 있다는 생각으로 TV를 응시합니다.   안주라고는 오는 동안 길바닥에서 주운 한 주먹의 담배꽁초가 전부였습니다. 이미 음식이란 것을 먹어 본 지 한 달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10원 하나 없는 말 그대로 상거지가 돼있었습니다. 병 채로 두 세모금 마시다가 그대로 토해내면서 명치 밑 통증을 이겨내고 방바닥에 꽁초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다시 한 모금... 조금씩 조금씩 사라지는 가려움... 공포 대신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며 내가 죽어야만 그들의 걱정이 없어진다고 생각하고 또 마시며 ‘마시다 보면 죽겠지!’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뚜렷하진 않지만 한 달을 못 가서 다니던 직장을 뛰쳐나오고 장취에 들어간지 6개월이 지난 것 같습니다. 그 시간 동안 이 술집, 저 술집에서 훔쳐 마신 술만 해도 족히 열짝은 훨씬 넘을 겁니다. 술을 마시고 20분 정도 잠들었다가 깨서 화장실 가려고 일어서다 아무 의식 없이 뒤로 두 번이나 넘어졌지만 그때마다 어떻게 바닥의 그 많은 빈 병을 피해서 침대 쪽으로 쓰러졌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언제부터인지 소변 색깔은 피로 변해갔고, 거울에 비치는 얼굴은 점점 크게 부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몸뚱아리는 뼈만 앙상한 채 각질로 덮여있는... 정말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부어오른 잇몸은 살짝만 만져도 고름이 줄줄 흐르고 치아는 점점 주저앉고 있었습니다. 거울을 보면서도 저는 그저 피식하고 쓴웃음만 나올 뿐 나에 대한 걱정이나 감정들은 잊은 상태였습니다.   남은 술을 마시려고 다시 구석 자리로 와서 몇 달을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보니 발에서 다리까지 통나무처럼 부어 있었고, 다리에서는 고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술을 훔치려고 나가면서 점점 신발에 발이 들어가지 않았던 이유가 부종과 간 손상에 따른 합병증이 생겨서 그런지도 몰랐습니다.   내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큰 걱정이나 불안감 없이 ‘내가 이렇게 망가져서 죽어가는구나...’ 하는 생각 정도였습니다. 그때 나에게 다가오는 걱정과 두려움은 오직 남은 술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었습니다. 낮에 술이 없을 땐 극한의 떨림과 가려움, 마비 증상, 불안, 초조, 환청으로 단 30분의 잠도 잘 수 없었고 온 몸은 오한과 고열을 반복하면서 썩은 내가 나는 식은땀만 흘렀습니다.   다음날도 훔친 술을 마시는 동안 자동으로 토해내는 노란 물과 앉은 채로 나도 모르게 나오는 똥, 오줌 속에서 한 달을 더 마시다 보니 일어설 힘도, 말할 힘도, TV 리모컨 조차 누를 힘도 없는 상태에서 침대 위에 쓰러져 점점 죽고 있다는 공포가 엄습했습니다.   그 때 누군가 밖에서 벨을 누르며 “종훈아 안에 있으면 문 좀 열어라.” 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매형이 온 것을 알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잠시후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온 매형은 “아이고~ 어휴...”하고 한숨 속에 등을 돌리시더니 나갔다가 몇 분 후 다시 먹을 것을 사서 놓고 가시며 내일 다시 올 테니 이것 먹고 기운 차리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밖에서 울고 오셨는지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습니다.   그 다음날 누나가 찾아왔습니다. 더러운 수건으로 다리의 고름을 닦고 있는 제 모습을 보더니 다리가 왜 이러냐면서 저를 일으켜 세워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제 몸을 질질 끌고 누나 집에 데려가서는 8개월 동안 씻지도 않은 몸을 연신 한숨을 내쉬며 씻겨 주었습니다. 저를 다 씻기고 나서 누나는 “이제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차라리 네가 안 보이는 곳으로 이사 가서 살 생각도 했다. 네가 지금 이게 사람 꼴이냐”면서 울먹였습니다.   저를 조금 쉬게 한 뒤 오후에 동네 내과를 데려가 의사 선생님께 다리를 보여줬더니 간이나 신장에 문제가 생겼다며 빨리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급히 택시를 타고 큰 대학병원에서 2시간 정도 검사를 한 결과, 간경화가 심하다고 하였습니다. 간 수치가 무려 1,870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요도에 호스를 꽂고 침대에 누워있는데 다음날 형이 와서는 “이제 지긋지긋하다. 너란 놈은 도대체 양심이 있는 놈이냐. 이제 하다못해 가족한테 네 병수발까지 시키냐!”면서 울분을 토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미안하다는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차피 믿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죠. 저는 그 자리에서 “씨발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 건데? 나도 미칠 지경이야! 어쩌라고!”하면서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형한테 큰소리친 것이 그런 말밖에 못 했습니다. 저는 이미 희망을 잃었고 삶의 의미도, 회의감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밑바닥이었습니다. 하지만 형과 누나는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을 그래도 가족이라고, 핏줄이라고 생각했는지 저도 모르는 보험을 들어놓았었고 병원에서 수발을 들어가며 저를 다시 살려놓았습니다.   병원에 있는 동안 형이 생업을 뒤로 한 채 이곳저곳을 다니며 병원을 알아보았나 봅니다. 퇴원을 이틀 앞두고 형은 다사랑중앙병원의 팸플릿을 보여주면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여기 입원해서 치료받고 재활 훈련해서 네가 네 힘으로 다시 살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싫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형이 나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깨달았고, 바로 알겠다고 했습니다.   이틀 후 이 곳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 수속을 마치고 침대 2개가 있는 좁은 2인 병실에 들어서자 형과 누나는 치료 잘 받으라는 한 마디 후 바로 돌아갔습니다. 깊은 한숨과 함께 이곳 병동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4일 정도 안정을 취하고 나서 운동도 조금씩 하게 되고 모든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쉬는 시간에는 성경 필사를 하면서 열심히 생활했습니다.   그렇게 4주가 흘러가고 1단계 발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발표가 거의 다 끝났을 때 저는 형의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저 또한 정말 많이 울었던 것 같습니다. 개방 병동에서 4단계, 9단계 발표를 할 때도 정말 많이 울면서 잘해보겠다고 다짐하며 수료를 마치고 재활 병동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상담사님이 알려주신 A.A 모임에도 조금씩 나가며 건강을 비롯해 모든 것이 좋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만과 거짓이라는 중독적 사고에 빠지게 된 저는 조절 음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말 외박을 나가 맥주 한 병으로 시작한 제 음주는 자신을 속이고 가족과 치료진에게 거짓말을 해가며 음주량과 횟수가 점점 늘어갔습니다. 그렇게 저는 결국 다시 장취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재음주에 대한 수치심과 상황에 대한 자기연민, 부정적 생각에 사로잡혀 여관에 처박혀서 깡소주를 마시며 미친정신으로 돌아가 가족에게 온갖 욕설과 다 죽여버리겠다고 협박문자까지 보냈습니다.   그런 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또다시 인간쓰레기의 모습으로 순식간에 돌아갈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이 너무 싫고, 나의 정신은 혼돈 그 자체였으며 근본적으로 죽겠다는 생각에 식음을 뒤로하고 술에 의존한 채 자포자기하고 있었습니다. 가족에게 나는 이미 두려운 존재가 되었고, 내가 무섭다는 답장을 끝으로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비열하고, 비겁하고, 교활한 내 모습, 거짓과 탐욕의 덩어리가 된 나 자신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웠습니다.   그렇게 또 술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나... 몸은 그 전보다 급속도로 악화되어갔고 먹을 것을 사다 놓고도 먹을 수 없고, 술 마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또다시 세상 맨 끝 구석으로 처박히는 동안 가족이나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머릿속에는 20년 동안 바뀐 것이 하나도 없는 제 자신이 한심할 뿐이었습니다.   남은 돈 2만원으로 소주 3병을 사 들고 찜질방에 몰래 숨어있다가 주인에게 쫓겨났습니다. 점점 추워지는 가을 밤중에 공원에서 반팔 차림으로 마지막 소주 2병을 마시면서 길바닥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이 점점 심하게 떨려오기 시작해 누나한테 전화했지만 수신 거절이었고 저는 매형한테 제발 살려달라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한심한 놈일지라도 죽는 것은 두려웠나 봅니다.   가족들은 쓰레기 같던 저를 다시 살려주고 다시 병원에 입원시켜주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날 형도 병원에 같이 왔지만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는지 차에서 제 모습을 보고만 있다 돌아갔다는 것이었습니다. 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너무나 미안한 마음뿐이었습니다.   다시 관리병동에서 치료를 받으며 저는 죄책감에 너무도 많이 울면서 지낸 것 같습니다. 다시 시작한 프로그램과 A.A 모임을 다니면서 이기심, 거짓, 교만으로 가득 찬 나의 본 모습을 알아가고, 내가 결코 술을 조절할 수 없는 지독한 알코올중독자임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주 어릴 적, 아버지와 어머니가 술 때문에 돌아가신 후 가족들은 가난을 떠안은 채 저를 키우려고 온갖 서러움과 고생을 겪으며 저를 위해 희생했습니다. 그렇게 사는 동안 저는 어느 작은 것 하나 스스로 힘으로 하려고 한 적도 없고, 당연한 듯 가족에게 의존하기만 했습니다. 술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외로움을 핑계로 제 이기심과 세상의 탐욕만을 쫓아가며 미친정신으로 살아왔습니다. 20년 동안 제가 가족에게 준 것은 정신적 고통과 마음의 상처, 멍에뿐이었습니다.   남편이 일찍 죽고 힘들게 두 아이를 키우는 큰 누나... 그리고 동생들과 누나, 본인의 가족까지 신경쓰느라 자신의 삶은 놓고 살다가 이제는 폐암이 생겨 투병하는 형... 어릴 적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 나 때문에 가슴앓이만 하면서 살아온 작은 누나에게, 또 세상에 하나뿐인 나 자신에게, 도대체 술 하나에 미쳐 무슨 짓을 한 건지 생각해보니 너무나 힘든 시간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어느 날 잠이 오지 않아 치료진이 가르쳐준 명상 음악을 듣고 복음성가를 듣고 있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런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인 나를 주님이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저는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동안의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금 인간으로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술을 다시 마시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정말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A.A 모임에 나가 멤버들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저보다 더한 중독자들도 그들이 자신의 문제로부터 변화하기 위해 A.A를 통해 노력한다는 것을 알고 희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용기와 믿음을 갖기로 했습니다.   술을 절대로 끊을 수 없다는 두려움에 있던 저는 제 힘으로는 절대 이 병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과 모임 안에서 하루하루 살면서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저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잉여 인간과도 같던 저는 A.A와 가족의 사랑의 사랑을 통해 거짓과 교만을 버리고 온전히 그분의 뜻에 맡기며,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이렇게 하루하루를 맑은 정신으로 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느덧 제가 막잔을 놓으며 맑은 정신으로 1년을 넘겼습니다. 치료진들의 도움과 관심, 응원, 모임으로 저를 이끌어주신 한성희 상담사님 그리고 A.A 멤버들의 경험담과 저에게 많은 용기를 주신 멤버 선생님들께 너무나 많은 도움을 받은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지금은 제가 다니는 모임에서 작은 봉사까지 하게 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외롭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모임에 나갈 때마다 주님의 보살핌 안에 제가 오늘도 살아있음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고칠 것과 안되는 것이 많은 실수투성이지만 하루 첫 잔을 피하고 겸손과 정직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겸손하지 않고 다시 첫 잔을 입에 댄다면 저는 어떻게 될지... 아마도 죽을 수도 있는 건 분명하니까요!   지금도 힘들게 병마와 싸우고 있는 형과, 가족의 건강을 바라며 사랑의 하나님께 제가 향후 사람다운 모습으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도 고통받고 있는 나와 같은 중독자들을 위해 회복의 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앞으로도 A.A 모임과 함께하면서 저와 같이 힘들게 싸우고 계신 분들께 제가 작은 힘이 된다면 도움을 주며 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누가복음 21장 34절)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두 번 살게 된 나의 삶

[2019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최우수상]   두 번 살게 된 나의 삶   이○○   2017년 10월 10일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술에 취해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술잔을 놓은 지 2년이 되어가고 있으며 병원에서 재활을 하고 있는 제게 새로 생긴 이름은 동해 이입니다. 익명이라는 말이 처음엔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익숙하게 된 시점에 와 있습니다. 제가 이번 수기 공모전을 쓰게 된 것은 꿈도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던 사람도 지금은 술을 마시지 않고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희망을 찾았으면하는 저의 소망 때문입니다.   저는 부유하지 못한 집안에 1남 4녀를 둔 술을 좋아하는 부모님께 태어났습니다. 저희 집에는 3명의 알코올중독자가 있습니다. 심한 알코올중독자였던 큰 언니는 지금의 제 나이가 되었을 때 삶을 마감하게 되었고, 여동생은 지금도 술을 마시며 살아가고 있는 알코올중독자이며, 저는 술을 마시지 않고 살기 위해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재활과정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집은 알코올중독자의 성향을 크게 가지고 있던 듯 싶습니다. 10년 이상을 알코올중독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정신병원을 수없이 입?퇴원 했었던 저의 큰 언니를 보면서, 또 저의 여동생 역시 20살이 되었을 쯤부터 알코올중독 증세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나만은 알코올중독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15년을 매일같이 술을 마셨고 남들보다 더 잘 마시고 취하지 않는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갈 준비를 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처음 술을 마실 때에는 잘 취하지 않고 실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알코올중독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2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제대로 된 직장 한번 다녀보지 않고 결혼을 하게 되었고 시부모님과 3명에 시누이들과 함께 신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중매결혼으로 8개월만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경제적인 부분에서 편해지기 위해 선택했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처음엔 시부모님께서 잘 해주신다는 것만으로 결혼 생활을 잘 이어나갈 수 있을 꺼라 생각했지만 어른들과 시누이들과 함께 여럿이 산다는 것이 저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2살 터울에 두 아들을 낳으면서 저의 결혼생활은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했으며 경제적 안정을 찾아 애정 없이 결혼하게 되었던 전 남편과의 관계도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큰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작은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저는 짧고도 길게 느껴졌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두 아이들을 남겨둔 채 저는 홀로 전 남편의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술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처지를 갖고 있었던 친구가 있는 강원도 동해시로 가게 되었고 친구 따라 강남간다는 말이 있듯이 친구가 일하던 가게에서 술을 마시는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혼자 살아야 한다는 막막함과 두려움은 그저 돈을 벌수 있는 일이라면 하겠다는 마음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직업은 돈을 빨리 벌어 자립해야 한다는 마음이 컸던 저에게는 달콤한 유혹과도 같이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친구가 있는 강원도 동해에서 저는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시댁 어른들과 고지식한 전 남편에서 해방 되었다는 기분에 저는 제 마음대로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을 꺼란 생각과 달리 책임지지 못하는 자유는 오히려 저를 죄의식과 연민으로 빠져들게 했으며 술을 마시는 직업이라는 것이 저에게는 더 많은 술과 연민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일을 하면서 마시는 술은 술이 아니란 생각에 일이 끝난 후에도 아침해가 뜰 때까지 술을 마셨으며 남들과는 정반대의 생활을 10년 이상 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술 취한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기에 내가 맑은 정신으로는 대처 할 수 없다는 생각, 나 역시도 그 사람들과 비슷한 정도에 술을 마셔야 한다 생각을 했었습니다.   365일 아닌 366일을 술에 취해 사는 날들이 10년 정도 지나가자 몸에 이상증세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괜찮아. 아무 문제없어!’라며 술을 마시면 당연히 나타나는 증상이라 여기며 무시했고 술을 조절하지 못했던 언니와 여동생과는 다르다 느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술기운이 떨어지면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아무리 많은 양의 술을 마셔보도 잠을 잘 수가 없는 상태가 이어졌습니다.   언젠가 부터는 작은 양의 술에도 취하기 시작하며 밥을 먹지 못할 정도가 되다보니 내과 병동에 7~8차례 입원을 해야 했습니다. 그 중 3번의 중환자실 입원은 저에게 악몽 같은 시간이 되었고 그제서야 이 곳 다사랑중앙병원을 지금의 남편이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병원 두 곳을 방문해 상담을 받은 결과,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고 술을 마신 후 회복되는 시간이 길어지자 조절해서 마실 수 있기를 기대하며 최고의 알코올 전문병원이라는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기로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남편과는 사실혼 관계인지라 남편이 입원을 동의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다 2017년 추석, 소맥 한 잔만 마시고 더 이상 마시지 않겠다는 남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조절할 수 없던 저는 장취로 이어져 술을 사러 다니다 넘어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온 몸에 멍이 들고 코밑에 상처가 난 채로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 상태가 되어서야 작은 아들의 동의로 입원을 하게 됐습니다.   눈을 떠 제가 병원에 왔다는 것을 알게 되자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낯선 환경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첫째, 둘째 날은 낯설고 불안한 마음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셋째 날, 여럿이 함께 쓰는 다인실 방으로 옮기게 되면서 혼자 있을 때보단 불안감이 조금 작아지게 되었습니다. 입원치료라는 과정은 처음이었던 터라 저에게는 병원에서 매일 받아야 한다는 프로그램들이 낯설었지만 병원에서 이렇게 교육을 받으면 조절해서 마실 수 있고 또 남편을 위해 입원한 저의 마음과 맞아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덜어 내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불안했지만 하루하루 알코올에 대해 제가 가졌던 죄책감과 알 수 없었던 술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죄책감과 연민으로 과거에 일들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지만 술을 마셨던 과거의 생각과 행동들을 떠올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나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들에 대해 후회만 했던 시간은 반성의 시간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불안하고 두려워 알코올중독자라는 것을 인정하기 쉽지 않았던 저는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술에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조금씩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상담사 선생님과의 상담은 저의 왜곡된 생각들을 조금씩 바로잡아 주었습니다.   저는 어린시절 학업을 해야 할 시기에 제대로 배우지 못했단 이유로 자존감은 낮고 자존심만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동안 숨기고 알리고 싶지 않았던 저의 과거인지라 수치스럽고 말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을 써야하고 발표해야하는 1단계 준비가 힘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누구에게 말하고 싶지 않고 저만 알고 있어야하는 저의 치부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에 단주를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중학교 과정도 마치지 못했다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고 말해 본적도 없던 사실을, 남들이 알게 된다면 무시를 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상담사 선생님과의 상담에서 내가 꼭 이렇게 이런 치부까지 다 드러내야 하냐며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땐 1단계 발표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함께 3개월 정도 병원에 있었으니 퇴원해서도 술을 조절해서 마실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상담시간마다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자격지심에 단주를 포기하고 싶고 그만하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강상아 선생님께서는 “단주는 지식이 아닌 행동으로 하는 거예요.”라며 술을 마시지 않아야 제가 하고싶어 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용기와 힘을 주시며 제가 알지 못했던 저의 장점에 대해서 알려주셨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에 용기를 얻은 저는 1단계 발표 후 개방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개방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제가 얼마나 왜곡된 생각과 중독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는가를 알게 되었고 중독자에게 가장 중요한 습관, 성격 바꾸기에 더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개방에서 진행되고 있는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통해 술에 대한 강박과 집착에 대해 조금씩 해방되어 간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부정적인 말들과 감정에서도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처음 입원 할 때에는 남편을 위해서, 두 아들을 위해서 내가 입원해 주는 것이 조금이라도 내 잘못을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개방 교육을 통해 나의 성격적 결점과 내가 술을 마셨을 때나, 마시지 않았을 때에도 나의 결점으로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큰 해를 입히게 되었는가를 알아가게 되면서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해 단주와 회복을 해야겠다고 깨닫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지나친 자기연민은 나 자신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자신감 없고 무기력했던 제 생각과 삶은 이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도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개방병동에서 생활하며 주말 외출·외박을 통해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동안 가졌던 서운했던 마음이 고마움과 감사함으로 바뀌게 되었고, A.A 모임을 통해 알코올중독자라는 공통점을 가진 멤버들을 알게 돼 큰 위안과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은 퇴원 후에도 꾸준히 A.A. 모임에 나가며 회복되어가는 삶을 살 수 있도록 A.A. 모임에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었으며, 앞서 회복되어가는 분들의 경험담을 들으며 나만 이러한 과거와 결점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알코올중독이라는 병은 나 혼자서는 절대 술을 끊을 수도, 조절 할 수도 없는 병입니다. 알코올중독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제가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알코올중독자로서 보낸 2년이라는 시간은 지금껏 제가 살아온 어떤 시간보다 더 값지다는 것입니다.   저는 수치스러운 과거를 말할 수 있게 되고, 제가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서 일상에서의 보람과 행복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결점도 많고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지만 그런 저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부끄럽게 생각했던 과거와 결점을 말함으로써 자유로움을 얻었고 느끼지 못했던 감사한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재활 과정을 통해 제가 가장 부끄럽고 창피하게 생각했었던 일들을 이루며 한 번 더 주어진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다사랑중앙병원 재활 과정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합격하며 술을 마시지 않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기 위해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실습을 하고 있습니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과정들을 이루어질 수 있게 도와주시고 용기와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신 9병동 주치의 김석산 원장님, 박차실 상담부장님, 강상아 상담사님을 비롯한 모든 치료진 분들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도 저는 두 번째 사는 삶을 위해 한 발자국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간호조무사 자격증과 아직 진로를 결정 하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교도 다닐 예정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늘 후회하는 삶을 살았지만 이번 만큼은 후회없는 선택을 했습니다. 몸은 힘들고 고된 과정이지만 마음은 편하고 기쁜 하루하루를 보내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무 희망도 꿈도 없이 하루살이 같은 삶을 살던 제가 오늘 하루가 후회되지 않도록 노력하며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저에게 기적이나 다름없습니다.   매일 아침 실습을 나가기 위해 사람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나도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오늘 하루도 술을 마시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실습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기쁨과 행복함을 느끼며... 오늘 하루도 나를 도와주시는 위대한 힘과 선생님들께 그리고 함께 생활하는 다사랑중앙병원 환우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치료와 회복 그리고 생활의 변화

[2019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우수상]   치료와 회복 그리고 생활의 변화   명○○   1. 현재 현재 나이는 만 60세입니다. 다사랑중앙병원을 퇴원한지도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퇴원 후 술이라는 놈은 만만치않게 저를 괴롭혔습니다. 술을 먹고 손목과 발목의 동맥을 면도칼로 끊어 두 번의 자살시도를 하였지만 용기가 없어서 그리고 가족들이 생각나서 실패했습니다. 다시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고 손목과 발목을 치료받았습니다. 그렇게 알코올 병원으로 이송되어 6개월 동안 지냈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술은 강력한 힘을 지닌 괴물이 되어 저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내몰았습니다. 음주조절 능력을 상실해 술을 한 잔이라도 마시면 멈출 수 없었고 혼자 힘으로는 술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도 했습니다. 머리로는 술을 먹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행동으로는 술을 마시는 자신을 보면서, 술 앞에서 너무나도 나약한 제 모습을 보면서 한심했고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죽고 싶지 않았고, 이제는 술이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다시 술을 마시면 죽을 것 같았고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인 죽음의 무덤으로 갈 것 같았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저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위대하신 힘(신, AA모임, 어머니 등)께 맡기고 간절히 도움을 청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에게 신기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술 냄새가 달콤하고 향기로웠지만 이제는 역겹고 냄새도 맡기 싫었습니다. 술병 속에서 파멸과 고통, 죽음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술로 지금까지 뒹굴었던 저의 초라한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술을 이기고 감정과 스트레스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 위대하신 힘, 그 분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단주에 성공해 지금까지 생활을 잘해오고 있습니다. 딸과 아내와의 관계도 좋아져 마트도 함께 다니며 일식 뷔페집에서 맛있는 음식도 종종 먹곤합니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과자와 햄버거 등을 딸과 아내에게 사주기도 합니다. 추석이나 구정 명절에는 작은 돈이나마 맛있는 것을 사드시라고 장모님께 용돈도 드리게 되었습니다.   2. 과거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아버지가 술을 드신 날은 집에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했습니다. 소변이 마려워도 술 드신 아버지가 무서워 아버지가 주무실 때까지 참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그런 제가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 때입니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해 불평, 불만을 하며 술을 마시다보니 1학년, 2학년, 3학년, 4학년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양이 늘어갔습니다. 술을 토하고 술을 한번 입에 대면 만취가 될 때까지 마시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카투사에 지원입대해 군생활을 하며 휴가차 집에 들렀을 때 기술하사관으로 임관한 동생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휴가를 마치고 부대에 복귀하였지만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부모님과 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 마음이 혼란스럽고 괴로웠습니다. 그때 인생은 저에게 미지수였고 술로 동생을 잃은 슬픔을 위로했습니다.   군을 전역하고 직장을 구해야했습니다. 노량진에서 2년간 공부한 끝에 국가공무원 7급에 합격해 문화체육관광부에서 3년 정도 근무를 하다가 세무사 시험을 준비하기위해 퇴직했습니다. 그러나 2차례 낙방을 하자 퇴직금이 바닥났고 아버지께 도움을 받아 1년을 더 공부했지만 불합격하고 말았습니다. 나이를 먹고 보니 인생에 대한 통찰이 부족했던 저의 어리석고 아둔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인생의 시련과 고통이 저를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불합격에 대한 저의 좌절과 분노는 극에 달했고 음주습관은 더 나빠져 더 많은 술을 마셨습니다. 술을 마시면 지갑을 잃어 버려 주민등록증, 신용카드를 재발급 받는 일이 잦아졌고 술을 마신 날 저의 행동을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알코올 중독 초기 단계였습니다.   3년 동안 세무사 준비를 하며 돈이 많이 들어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습니다. 밥상은 더욱 초라해져 덩그러니 밥과 간장뿐이었습니다. 가장으로서의 초라함이 느껴졌습니다. 이러다간 가족들을 굶어 죽일 것 같아 건설용역회사에 나가 잡부일을 하고 일당 50,000원을 받아 쌀 1포대와 부식을 사가지고 집에 왔습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건설현장에서 산업의 역꾼임을 자부하면서 여름에 비지땀을 흘려가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건설용역회사 사장님의 전도로 인생의 돌파구를 찾고자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교회 남전도회에 소속되면서 헌금기도도 하고 성도님들을 위해 봉사하며 술도 7년 동안 끊었습니다.   그러나 직장이 없다보니 경제적인 어려움이 심해져 취직을 해야했습니다. 당면 만드는 회사, 주유원, 쇼핑센터 청원경찰, 학원강사, 재활교사 등 직장을 전전했지만 가정생활에 충분한 수입은 아니었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늘어갔고 삶이 허무해 한탄스러웠습니다.   그러던 중 교통사고로 전신마취 후 대수술을 4차례나 받았고 1년간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사고로 인해 치아가 많이 빠져 제대로 먹지 못해 퇴원할 때는 몸무게가 37kg밖에 안 나가 산송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아내와 딸, 아들이 저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 후 6개월 동안 죽을 먹으며 살자니 고통스러워 전에는 하지 않던 욕과 폭언을 가족들에게 해댔으며 성격이 점점 난폭해졌습니다.   육체의 허약함을 만회하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운동을 시작한지 3년이 지나자 몸이 많이 회복되어 중학생 영어, 수학 과외를 하게 되었습니다. 받은 과외비로 딸과 아들에게 용돈을 주었고 아들에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사주자 아들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아들은 인라인 스케이트를 열심히 배워 경기도 인라인 스케이트 대회 3위에 입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몸이 회복되면서 술을 다시 입에 댔고 저의 폭력적인 성향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냉장고를 아령으로 내려쳐 곳곳에 흠집을 내고, 거실에 있는 유리창을 박살냈으며, 술에 취해 아들의 엉덩이를 목검으로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패트병에 몰래 술을 넣어 물처럼 술을 마셨습니다. 술이 깨고 나면 ‘내가 이렇게까지 술을 먹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가 한탄스럽고 불쌍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저의 인생 최대의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2014년 12월 말, 사랑하는 아들이 하늘나라로 먼저 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동생을 잃고 아들까지 잃어버렸습니다. 병원에서 아들의 싸늘한 시신을 확인하자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마음이 공허하고 가슴이 아렸습니다. 엉엉 울었습니다. 너무 슬프다보니 눈물도 나오지 않고 그저 세상을 모두 잃은 것만 같았습니다. 내가 세상에 잘못한 것이 너무 많아 죄를 받는게 아닌가 하는 오만 잡다한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마음을 추스르고 아들을 잊어보고자 2015년 1월 중순부터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입원하기 한 달전 아들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안아보고 싶고 만져보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마음과 몸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술을 다신 입에 대지 않겠다는 결심과 의지를 잊어버리고 저도 모르게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결국 2015년 6월 27일 아내와 딸의 권유로 우리나라에서 알코올 중독에 대한 체계적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는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딸은 아빠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병원의 관리병동과 9주 개방병동에서 받은 교육과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첫 번째로 알코올 중독이 뇌 질환이라는 것을 가족병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알코올이 뇌의 손상을 가져와 기억력 감퇴, 판단능력 저하, 현실감각 저하로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개인의 삶을 파멸로 이끄는 교활하고 악랄하고 거대한 힘을 가진 물질임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한 개인을 신체적으로 허약하게 만들고 정신적으로는 부정적인 사고를 하게 하고, 도덕적으로는 자기 자신만이 옳다는 오만과 교만함을 만들고, 거짓말을 하게 하는 등 인간을 추악하게 변화시켜 인간관계를 파괴하여 가족관계가 멀어지게 하고, 친구를 잃는 등 사회와 단절된 고립된 사람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둘째로 이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알코올중독자임을 인정하고 내가 스스로 삶을 처리하지 못했음을 정직하게 시인하는 것이 알코올 중독 치료의 시작임을 깨달았습니다. 셋째로 중독적 사고인 부정(나는 알코올중독자가 아니야), 합리화(항상 그럴듯한 이유를 대면서 술을 마시는 것), 투사(남의 탓을 하면서 술을 마시는 것) 등 계속적인 음주로 발생된 문제의 본질과 그 의미를 깨닫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의 교육과 훈련 프로그램은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12단계 12전통 중 첫 단계는 알코올중독자임을 인정하고 스스로 삶을 정직하게 처리하지 못했음을 정직하게 시인하자는 대목이 있습니다. 핵심은 알코올중독자는 무엇보다 단주에 반드시 성공하여야만 본래 정신으로 돌아와 온전한 생활을 할 수 있고 그동안 술로 무너졌던 삶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12단계를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실천과 실행하는 길입니다. 행동이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위대하신 힘을 믿든 안 믿든 실행만이 살 길이고 정답입니다. 영원히 첫 잔을 입에 대지말자. 이것이 제가 깨달은 진리입니다. 술로 인한 문제점, 성격적 결함, 금전적 피해액, 술로 인해 피해를 준 사람들에 대한 보상의 필요성 그리고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의 문제, 앞으로의 삶의 원칙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삶을 살면서 깊이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사항으로 알고 있습니다.   3.미래단주를 제 인생의 최고 우선순위로 두고 살고 있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겠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줍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자연을 벗 삼아 산책과 운동도 합니다. 유튜브를 통해 방탄소년단 아이돌의 노래와 춤을 따라합니다. 젊어지고 한결 마음이 정화되며 밝아집니다. 서울여대 교수인 김창옥 교수님의 포프리쇼도 시청합니다. 웃음과 함께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동영상입니다. 역사 대하드라마를 시청하며 지나간 역사 속에서 많은 지혜를 배웁니다.   저는 지금도 약물 치료를 하고 있으며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물 복용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술이란 도적놈은 알코올중독자인 우리를 다시 쓰러트리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방심은 절대 금물입니다.   그리고 술로 피해 받은 저를 용서하며 피해를 준 가족 등 모든 사람에게 용서를 받으며 보상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이나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서로 사랑하며 서로 용서하며 교만함을 버리고 정직하게 살면서 겸손히 위대하신 힘에 저를 맡기고 그 분의 인도함에 따르고자 합니다. 자기 자신, 치료진(상담과 약물치료), 위대하신 힘(신, 가족, 알코올 중독에서 회복된 자들의 모임인 A.A. 등등) 삼자가 혼연일체가 되어 노력한다면 알코올 중독에서 반드시 벗어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깨달았습니다. 불평과 불만은 인생을 좀먹는 암적인 존재임을 말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임을 말입니다.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임을 말입니다.   인생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늘 배우려는 적극적인 자세로 인생을 살고자 합니다. 위의 모든 것이 단기간에 이뤄지지 않을지라도 한 발짝 한 발짝 최선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알고 위대하신 신 앞에서 긍휼과 은혜를 간구하며 인생을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알코올은 교활하고 당황하게 만들며 강력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2019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   알코올은 교활하고 당황하게 만들며 강력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허○○   술에 취한 나는 한 잔 술을 더 마시기 위해서 가족들에게 교활함의 극치였고 술이 강력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됩니다.   저는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1960년대 이전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아버지는 온순하셨고 가족밖에 모를 정도로 가정에 충실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투전꾼들의 꼬임으로 도박을 시작하셨고 그때부터 본전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가족 모두를 잊은 채 도박에 중독이 되어 매일을 술과 도박으로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든 재산을 다 날린 아버지는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형제·자매 3남 2녀를 남긴 채 운명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많은 식구들을 거느리기가 정말 앞이 캄캄했다고 합니다. 3남2녀 중 막내인 제 나이 4살때 일입니다. 어머니는 남의 집 김을 매는 일부터 군부대 장병들의 군복세탁까지 혼자 힘으로 가족들의 생계 유지를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죽어라 막노동으로 가족 모두를 먹여 살리기란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결국 가족들은 뿔뿔히 헤어졌고 정말 지옥과도 같은 나날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양로원으로 가셨고, 큰 형은 원래 고향인 홍천으로, 큰 누나와 작은 누나는 각각 남의집 살이로 보내지면서 온 집안이 생이별을 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나마 공부를 잘하던 작은형과 막내인 저만 집에 남게 되었습니다. 작은 형은 줄곧 우등생이었고 저는 오로지 공부만하라는 엄한 형밑에 남게 되었습니다. 동네 친구들과 맘 놓고 놀지도 못하고 늘 책상에 앉으라던 형에게 놀다 걸리면 죽도록 두들겨 맞는 상황이 거듭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저도 줄곧 우등생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을 위해서 이듬해 우리식구는 읍내로 이사를 했습니다.   집은 단칸방 사글세 집이였습니다. 중학교는 수업료가 저렴한 고등공민학교로 입학하였습니다. 형은 제가 초등학교시절 우등생이니 나중에 검정고시를 보면 된다고 했습니다. 형님의 스파르타식 교육을 통하여 고등공민학교 3학년 때에 치러지는 고입입학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형님은 공무원이 되셨고 저는 정규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형님은 군입대로 집에는 어머니와 저만 남게 되었습니다. 습관처럼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는 늘 책상에 앉게 되었지만 이습관도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무서운 형이 없다는 해방감에 저는 스스로 자유를 만끽해야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가 찾아와 자기 학교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자고 하여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 친구의 학교는 남녀공학인 학교였으며 도서관에는 우리외 아무도 없었고 그 친구의 밀린 수학 과목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그 학교 도서관에 학생들이 하나,둘 모이더니 여학생들까지 도서관에 나타나 제게 수학문제를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중 한 여학생을 알게 되었고 얄팍한 수학 실력으로 자만감에 취하여 제 공부는 멀어져 갔습니다. 그 여학생을 만나는 날만 기다려지던 어느 날, 그 여학생의 남친이 제게 싸움을 걸어왔고 그 일을 계기로 저는 불량 학생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매번 싸움 끝에 얻어맞은 상처와 그 아픔을 잊기위해 술을 마셨고 또 화해하기위해 술을 마셨습니다. 제 생에 첫 잔은 싸움 끝에 남는 상처와 고통을 잊기 위해 마시게 된 것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1979년 1월, 한겨울이었습니다. 저의 첫잔은 포도주였습니다. 포도주는 쓰지 않고 달다는 친구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때 술을 처음 접했습니다. 포도주 몇 잔을 마시고 나니 마시는 건지, 먹는 건지 모를 정도로 취해 버린 저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샴페인, 그 다음은 소주를 양재기에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고 합니다. 첫 술자리부터 정신을 잃으며 그야말로 폭주 중에 폭주를 한 것입니다. 친구 자취 방에서 시작된 술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길거리에 쓰러져 동사하기 직전, 같이 마셨던 친구가 발견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들어보니 당시 친구 어머니가 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이 뭔 놈에 술이냐며 야단을 치시자 같이 마셨던 친구 두 명이 뒷문으로 피하다 방한켠에 쓰러져 있었는 저를 발견해 끌고 나와 길거리에 버리고 갔다고 합니다. 처음인데 가혹하리 만큼 체벌을 받은 것입니다.   그 소동으로 3일 동안 깨어나지 못하다 어머니의 지극정성인 간호로 살아나게 됩니다. 지금 생각하니 어머님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늘 책상에 앉아 책만 접했던 아들이 이런 날벼락을 주었으니 말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늘 접하는 친구들이 바뀌었습니다. 불량 학생들과 어울리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들보다 더 불량스럽게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패싸움을 접하게 되면서 타락의 길은 시작된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 제일 중요한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때부터 말입니다.   세월은 흘러 형님께서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셨습니다. 제일 먼저 하신 일이 학교에 찾아가서 담임선생님을 만나 제 성적을 확인하는 일이였습니다. 성적도 성적이었지만 변해버린 동생의 행동 거지가 완전히 깡패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은 형님께 그야말로 큰 충격과 실망을 주었습니다. 결국 저의 대학입학 예비고사 성적은 형편 없었고 대학 진학도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대학 진학 하기를 바라던 형의 모든 희망을 져버리게 됩니다.   저는 계속해서 깡패같은 친구들과 어울렸고 형이 충고라도 할라치면 큰소리가 오갔습니다. 끝내 따귀라도 맞게 되면 이제 나도 컸다며 같이 주먹질을 하며 형도 몰라보는 개망나니가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매일을 술과 담배에 찌들어 다방아가씨들과 어울리며 냇가에 텐트를 치고 놀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형님께서 이곳을 떠나 제발 지금 어울리는 친구들과 관계도 끊고 새출발하라며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사실 저도 이렇게 살아서는 않되겠다는 생각이 마음 한켠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차분히 나를 찾아 다시 공부를 해보자는 생각에 서울 남양동에 있는 재수학원 종합반에 들어가 재수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울 학생들의 학구열은 대단했습니다. 제가 시골에 있었던 그런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학원문이 열리자 서로 앞자리 앉으려고 학원생들의 뛰는 모습부터가 달랐습니다. 저는 열공 하겠다는 의지 덕분에 바로 적응할 수 있었고 재수생 생활 3개월차에 형님께 공무원 시험 보면 어떻겠냐 제안을 았습니다.   그렇게 바로 공무원시험을 치르게 되었고 필기시험 합격했습니다. 아직 면접이 남았지만 면접 준비를 왜 하냐며 모든 짐을 싸서 다시 집으로 내려왔습니다. 당시에는 ‘대학은 무슨, 형님처럼 나도 공무원이나 하자.’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친구들을 만나 강변으로 가서 바로 술을 마셨고 그 동안 못 마신 술을 한꺼번에 다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 면접시험을 보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시험에 떨어졌다고 또 술을 찾았고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군대에 입대를 했습니다. 그나마 군에 있던 30개월은 저의 무질서했던 생활이 정리되었던 시기였습니다.   군복무를 마치자 직업을 가져야 했습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여러 번 실패했지만 많은 고전 끝에 29살의 나이로 합격했습니다. 공무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고 당시 아내는 이미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해 바로 결혼을 하며 저의 방황은 여기서 막을 내리나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시골에 위치한 면사무소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공무원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마을 이장님들과 술자리, 직원들과 술자리, 회식, 동창회, 체육대회 등 늘 술자리의 연속이었습니다. 술자리를 같이했던 사람들은 제가 술을 잘 마신다며 술 마실 자리면 저를 찾아주었고 저는 신바람이 났습니다.   그후에도 인사발령이 여러 번 났지만 그렇게 술을 마셨어도 출퇴근 만큼은 정확히 지키며 제 역할 확실히 수행했습니다. 그렇게 공무원 생활 12년 째가 되던 제 나이 41세 때, 결국 술문제로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안 먹고 계속 술만 마시다 술이 깰만 하면 또 마시는 일이 13일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제가 끝내 의식을 잃자 생명의 위험을 느낀 아내는 병원 앰블러스를 불러 병원에 저를 입원을 시켰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치료진들은 제가 병원에 입원한지 5일째라고 했습니다. 병원은 대학병원 정신과로 외부와 단절된 폐쇄 병실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기력을 찾자 아내에게 전화해 왜 나를 밖에도 못나가고 꼼짝할 수도 없는 곳에다 갔다놓았냐며 당장 퇴원시키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습니다. 아내에게 갖은 욕설 다 퍼붓고 오직 갇혀있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내가 왜 거기까지 갔는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병원 입원기간은 제게 분통만 터지는 기간이었습니다.   28일만에 퇴원하게 되었고 사무실에 복귀 하자 제가 병가 처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병가처리? 아니 아픈것도 아니고 술 마시다 쓰러져서 입원해도 질병으로 병가처리 된다고?’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리를 비우느라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야근을 일삼았습니다. 근무시간 내내 화장실을 갔다 오는 시간 빼고는 자리를 비우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태를 수습 하느라 진땀을 흘리며 근무에 임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간은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출장이라도 가게 되면 산과 들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다 ‘술이 있으면 아주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병원에서 퇴원한지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또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습니다. 출근을 하면 업무를 후다닥 처리해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했고, 바로 옆에 있는 직원에게 사업장에 나가기 위해 출장을 내야겠다고 말고선 사업장 한 바퀴를 획 돌고는 술자리에 가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3개월을 못 넘기고 술만 마시다 장취가 되어 끝내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41세가 되도록 병원이라고는 모르고 살았는데 왜 이리되나 왜 반복이 되나?’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공직에 있는 터라 병원 입원기간 늘 짧았습니다. 바로 근무에 임해야 되니까요. 그러다 1년에 병가 일수가 어떻게 되는지 상세히 알게 되었고, 이에 맞춰 아주 지능적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저의 교활함이 하늘을 찌르게 된 것이죠. 하지만 퇴원 후 다시 사무실을 출근하기란 정말 힘들었습니다. 직원들이 다 저를 멸시하는거 같았고 저만 쳐다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때마다 ‘저들이 내 월급 주는건 아니잖아?’하는 자기합리화를 했습니다. 그땐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모든 걸 다 포기할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대학병원의 정신과 입퇴원을 수없이 반복하였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이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며 술버릇의 악순환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도 금주 기간이 그나마 6개월정도 넘어가니 나름 제 자신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자각 끝에 ‘아 ~ 나는 알콜중독자였구나’를 차츰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싫다면서도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면 술자리로 이어졌습니다. 친구들이 부어라 마셔라 할때면 저는 나름 꾹 참다가도 이내 꿔다 놓은 보리자루가 된 기분과 친구들과의 관계가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술을 마시고 말았습니다. 그 한잔의 술은 얼마간의 금주기간을 수포로 만들었고 결국 말술을 마시는 악순환이 거듭 되었습니다.   아침이면 머리가 너무 아프고 속이 메스꺼워 너무 괴롭로울 땐 술이 깨기도 전에 한 잔을 마시고 또 그 한 잔의 술에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술이 깨기도 전에 한 잔을 마시는 해장술이란 것을 접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중증 알코올중독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알코올중독’의 뜻은 그나마 다사랑중앙병원에서 교육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머리로만 알게 되는 이론적 배움일 뿐이었습니다. 이론적인 깨달음은 제가 수없이 입퇴원을 반복하게 만들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진심없이 밖으로 보기에만 모범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아주 교활하고 강력하게 말입니다.   제1단계 나는알코올에 무력했으며 나의 삶을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시인했다. 한 AA멤버에게 12단계 중 1단계만이라도 붙들고 받아들인다면 단주생활 할 수 있다는 경험담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런 악순환 속에 사는 것은 더 이상은 아닌거 같다는 깨달음에 사표를 내고 명예퇴직해 공직생활 30년을 마무리했습니다. 지난날 동기들이 모두 승진할 때마다 마음은 아팠지만 그래도 현직에 있는 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 뒷바라지 속에는 늘 제 아내가 있었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다사랑중앙병원은 체계적으로 시스템이 잘 되어있는 병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관리병동, 개방병동, 재활병동 이런 체계는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알코올중독은 뇌질환이기 때문입니다. 단계별 치료는 정말 훌룡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적응, 단계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병원입원 시 제 상담을 맡으신 윤희숙 상담사님께서 제게 12단계 필사를 해보자는 말씀, 불완전한 영성, 아직도 가야할 길 도서 필독, 수요일 AA 모임이 있을 때마다 맨 앞에 앉으라는 눈초리, 병원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잔소리들이 저를 위한 것임을 왜 지금에서야 알게 됐는지... 상담사님이 진정으로 환자를 위하는 마음에 열과 성을 다했음을 말입니다. 지금도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다사랑중앙병원에서의 많은 토론과 학습은 제 단주생활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폭주로 시작되었던 제 음주가 멈춘지 2년이 넘어갔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제게는 단주생활의 양식이 된 것입니다.   2018년 뇌출혈로 의식을 잃고 2회에 걸친 수술 끝에 사경을 헤메다가 살아났습니다. 뇌출혈의 원인은 술과 담배였습니다. 너무도 끔찍한 병이란 걸 직접 경험하면서 그렇게 제 몸을 휘감았던 술과 담배로 인해 이지경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싶어 수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제가 준 상처가 컸는지 아내는 중환자실에 있는 제게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정말 억울해서 이 사람 저 세상으로 못 보내겠다고 제발 살려달라고 말입니다. 오늘도 맑은 하늘을 만끽하며 이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어느덧 술과 담배를 접하지 않은지 2년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아들에게 며느리가 될 사람을, 딸에겐 사위가 될 사람을 소개받아 인사를 했습니다. 이 모두가 너무도 감사한 일이라고 봅니다. 이제는 다사랑중앙병원의 여러 치료진, 환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지금 회복의 길을 걷고 있는 저는 모든 것에 너무도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이 모든 기초를 다지게 도움을 주신 다사랑중앙병원 치료진들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살얼음판 같던 내 인생의 버팀목

[2019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   살얼음판 같던 내 인생의 버팀목   김○○ 안녕하세요? 전 알콜중독자 김이라고 합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제가 결혼한지도 벌써 20년이라는 시간이 다가오네요. 저의 경험담을 쓰기 전에 먼저 지금까지 제 곁에서 같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저의 가족 모두에게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제게 알코올중독 증상이 나타난 것은 군대 제대 후 대학교에 복학하면서 입니다. 해장술을 마시기 시작해 학업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며, 대학교 3학년 때에는 처음으로 정신병환자들이 있는 병원에 15일간 입원을 하였습니다. 그때는 ‘내가 술을 좋아해서 마시는 건데 무슨 문제가 있을까 ?’라고 생각하며 중독이라는 말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냥 마시는 술이 좋았고, 아침에 일어나 속이 불편해서 해장술을 마시면 속이 편해져 하루종일 마시고 깨고 마시고 깨고를 반복했습니다.   2016년도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2019년도에 결혼하기까지 아내와 데이트를 할 때면 언제나 술이 옆에 있었습니다. 같이 있을 땐 적당히 조절해서 마셨지만 헤어진 후에 혼자 자취방에 들어와 만취가 될 때까지 마시며 잠드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그러던 2019년 12월 결혼식 날, 그전까지 계속된 음주로 주례선생님 앞에서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 머리가 흔들렸습니다.(지금 생각하면 술을 안먹어서 나타났던 증상인 것 같음) 어찌보면 틱 걸린 사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일생에 단 한번 뿐인 행복한 순간에 저는 긴장과 땀으로 온몸과 마음은 망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후로도 저는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계속된 음주로 직장일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술에 취해 방에 누워있던 어느 날, 아내가 알코올중독을 고치는 병원이 있는데 한 번 입원해서 고쳐보겠냐고 제안했습니다. 매일 술에서 지내는 것이 제 자신도 너무 싫었기에 그렇게 하자고 하여 저는 처음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거기서 알코올중독이라는 말을 처음 듣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내가 알코올중독자구나...’라고 느끼며 병원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단주 모임이 두 종류가 있었다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단주 동맹과 단주 연합. 이 두 종류인데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하면 단주 동맹은 강압적으로 넌 중독자니 무조건 인정하고 단주를 해야 한다는 것이고, 단주 연합은 스스로 중독자임을 깨닫고 단주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입니다.   제가 입원할 당시 남아있는 단주 동맹 병원은 2개 정도였고 나머지는 연합이라는 것을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 입원했던 병원은 단주 동맹 병원으로 입원해서 ‘여기는 병원이 아니다. 교도소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하루종일 짜여진 스케줄로 저녁마다 병원 내에서 자체 모임을 하며 12단계, AA약속, 단주방법 등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암기테스트를 했습니다. 못 외웠을 경우 신고있던 신발이 날라 왔으며 욕이란 욕을 먹어 자유시간에는 암기를 하기위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 이상이 함께 모여서 이야기할 경우 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며 금지하였습니다. 병실마다 카메라가 설치돼있어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감시받았습니다. 누가 그런 곳을 병원으로 생각하겠습니까? 처음이 어렵지 저의 가족은 제가 퇴원해서 다시 술을 마시면 여지없이 다시 저를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마시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 퇴원과 동시에 다음날 재음주를 하기도 하였으며 반복된 재음주로 계속해서 병원에 입퇴원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술을 마시면 여관이든, 현장 숙소든 찾아와 술에 취해있는 저를 업고서 차에 태워 병원으로 입원시키시는 힘겨운 나날을 보내셨습니다.   반복된 입퇴원에 어느정도 병원생할에 익숙해지니 제 자신이 누구인지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살아온 날들을 되새겨보는 시간을 갖게 되면서 눈물도 흘리고 제 자신에 대해 반성도 하며 중독자임을 스스로 인정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저의 병원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2002년도 후반에 퇴원하면서 다시는 재음주를 하기 싫어서 건설현장관리직을 그만두기로 결심했고 대리운전을 시작했습니다. 1년 정도 대리운전 생활 후, 재대로 된 직업을 찾던 중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다시 건설현장의 관리직으로 일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2004년 1월, 큰 사고를 당해 8개월 간의 병원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리운전 생활과 병원 입원 기간 동안 단주를 해서 그런지 조금씩 술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전 10년이라는 시간동안 모임은 참석하지만 참으로 힘든 생단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전 생단주를 하면서 단지 술 마시지 않는것에 집중하며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모든 짜증과 마른 주정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보냈습니다.   5년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한 선배님께 “단주하면서 가장 많이 도와주는 사람도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고 다시 재발하게 만드는 것도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듣게 됐습니다. 왜 그럴까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생단주 기간이 길어질수록 처음엔 술만 마시지 말라던 가족들의 요구가 하나 둘 늘어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스트레스 때문에 술 한 잔이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때 ‘이래서 재발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단주 10년이 좀 안된 시기에 일하는 현장 환경으로 인하여 술자리를 자주 접하게 되었고, 1차에서 시작된 술자리는 2차, 3차로 이어졌습니다. 그 속에서 전 잠시 잊었던지 조절망상에 사로잡혀 몇날며칠을 고심하다 다시 음주를 시작하게 되었고 약 6개월의 조절음주 끝에 다시 병원으로 실려 오게 되었습니다.   한 번 조절망상에 사로잡히면 반드시 먹게 된다는 단주 선배님의 말씀이 다시금 생각나는 때였습니다. 그때 다사랑중앙병원을 알게 되었으며 이 병원은 처음 입원했던 병원에 비하면 천국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재발을 시작한 저는 약 5년이라는 시간동안 1년에 한 번씩 재발해 병원을 들락날락 하게 되었습니다. 단주를 오래하다 재발이 시작되면 다시 재발되는 시점이 조금씩 앞당겨지고 술의 양도 점점 줄어든다는 선배님의 말씀을 몸소 느끼며 체험한 시간들이었습니다.   2년전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할 당시 저는 ‘모든 것을 다 잃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병원 입퇴원을 반복하던 저에게 단주하며 살아갈수 있다는 용기를 주던 가족들도 지쳐갔고 제가 병원에 있는 동안은 아버지, 엄마, 아내, 아이들이 생활을 한다고 해도 억지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끝내는 마지막 병원 퇴원하기 전에는 이혼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 후 마음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다 퇴원을 시켜달라고 미친놈처럼 무조건 조르며, 때를 썼습니다. 그렇게 퇴원 준비를 마치고 퇴원하려는 날 아침, 저는 ‘내 마음 하나도 다잡지 못하는데 나가서 아내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이고, 말을 한들 내 말을 믿어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다시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로 결심을 하고 ‘그 모든건 다 내 잘못이다.’라는 생각으로 하나둘 내려놓기 시작했습니다.   끝내 혼자가 되더라도 남은 인생을 한 번쯤은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9주간의 개방생활을 마치고 퇴원을 하였습니다. 퇴원과 동시에 전 장모님에게 찾아가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용서를 구했지만 그대로 쫒겨 났으며, 그 순간 잘못하고 죄송하다는 죄책감보다는 오히려‘그래. 내가 2년이고 3년이고 단주를 하고나서 당당할 수 있을 때 처갓집 식구들을 봐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아내나 아이들은 내 옆에 없을거야!’라는 생각과 다짐을 했습니다. 그렇게 퇴원 후 바로 다니던 직장에 복직하여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술을 멀리하며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직 스스로 만족하지는 않지만 지금은 가족들이나 처갓집 식구들과 잘 어울려 지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제가 단주 할 수 있는 힘도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에게 2년은 정말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제대로 된 단주생활이구나...’라고 느낄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힘들고 지친 시간들도 있었지만 제가 다니는 모임의 선배님들과 가족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하루하루 잘 버티며 살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맑은 정신으로 문제점에 있으면 문제를 회피하기 보다는 처리를 하고, 집안의 대소사를 장남의 입장에서 하나 둘 해결해나가며, 하루하루를 사는 것에 대한 행복과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기에 앞으로도 이런 시간들이 저에게 계속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제가 나가는 단주 모임은 비록 인원이 얼마 되지 않는 비공개 모임이지만 회원들의 단주 년수나 나이를 보면 어느 모임 못지않게 힘도 있으며, 단순히 술만 마지지 않는 모임이 아니라 나로 인해 피해를 본 가족이 함께 살아 가는, 단주 생활을 목표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임입니다.   “중독자가 아닌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하는 이유가 결혼 생활을 못해서 이혼을 한다고 하는데 중독자들은 술은 참을 수 있어도 단주 생활을 못해서 자꾸 재발을 하게 된다.”는 선배님의 말씀이 무슨 말인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 모임을 통해 아내 또한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접하게 되면서 지금은 행복한 단주 생활을 이어가는데 저의 가장 중요한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제가 하루하루 살 듯이 아내 또한 하루하루 똑같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내가 단주 생활을 이어가는데 힘들고 지치듯이 아내 또한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아내는 항상 어디서 무엇을 하든 저의 단주 생활이 지금 자기가 행복하게 살아가게 되는 밑걸음 이라는 말과 함께 나의 단주가 없었다면 지금의 이 시간은 없다며 항상 저를 응원해주고 격려해주며 걱정해줍니다. 물질적인 다른 무엇보다 저의 단주가 아내에게 힘이 되고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서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임을 알았습니다.   지금 제가 나가고 있는 단주모임 또한 저에겐 정말 힘이 되고 버팀목이 되는 아주 중요한 모임이며 장소입니다. 퇴원하기 전 병문안 와 “다시 모임에 나와라. 일어나서 손털고 함께 다시 시작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용기를 내고 모임에 나와라.”라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2년 전 퇴원 당시 저는 다시 일어설 수 없었을 것이며, 지금 어디에선가 홀로 사방을 방황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이제 저는 재발하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술은 언제든 마실 수 있지만 그 술을 마시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 할 것 같은 두려움이 더 강해 이런 마음은 제 단주 생활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행복을 위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있는 알코올중독자 김입니다. 오늘 하루도 술 마시지 않고 맑은 정신에 하루 생활을 마감할 때 행복과 만족감을 느끼며, 내 옆에 항상 나를 응원해주고 격려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에 대해 큰 행복과 큰 힘을 얻습니다.   많은 시간을 망설이다 회복수기를 작성했습니다. 더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다 적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이 글을 쓰면서 내 자신이 알코올중독자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고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며 앞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용기를 얻어 인생이 더 살아 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바쁜 직장생활 속에서 내 자신이 누구인지 한순간이라도 잊지 않기 위해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작성하며 다시 한 번 제 자신을 생각합니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평범한 삶

[2019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   평범한 삶   엄○○   “엄마, 나 정신병원에 보내줘” 응급실에서 눈을 뜨고선 엄마를 보며 제가 내뱉은 말입니다. 사실 어렴풋이 기억나 또렷하진 않습니다.   15살 때 홀로 중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제가 저희 집에서 가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물론 저희 집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도망가야만 했습니다. 부모님이 다투시는 소리, 학교선배들의 폭행, 학교생활의 따분함 등을 이유로 저는 홀로 유학을 가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첫학기 끝무렵 저는 소주를 처음 맛보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술에 무지했던 저는 무서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은 채 종이컵에 가득 따라 몇 잔을 연달아 주는 족족 마셨습니다. 맛은 없었지만 필름은 끊기지 않았습니다.   18살, 너무나도 추웠던 지방에서 유학을 하던 때였습니다. 홀로 외롭고 말도 잘 안 통하고 문화도 다른 곳에서 방황하는 여러 명이 모여 한국말로 깔깔 대던 그 순간, 그 밤만은 외롭지 않았습니다. 주말이 되면 홈스테이 사람들과 모여 술을 마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매일 그들과 깔깔대며 술을 먹고 싶었고 매일 외롭지 않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평일에도 룸메이트를 데리고 담을 넘어 저 혼자만 술을 마시고 취하고 학교에서 술이 덜 깬 채로 엎드려있는 날이 늘어갔습니다. 그때쯤 저는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이면 몸무게가 줄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거다!’ 싶어 밥을 먹지 않고 술을 마시는 날이 점점 늘어갔습니다. 술이 취하면 나간 정신으로 음식을 마구잡이로 먹고선 토를 하기를 반복했습니다. 토를 하고 자는 날이면 그 다음날 살이 찌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죄책감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있었지만 토를 하지 못하고 술에 취해 잠이 드는 날이면 죄책감에 더 많은 양의 술을 먹으려 했습니다. 그렇게 39kg가 되었음에도 더 마른 몸을 원했고 더더욱 살이 안 쪄야만 했습니다.   19살, 매일 술을 마시고 싶었습니다. 6시가 되면, ‘오늘은 또 어떤 친구를 만나야하며, 무슨 이유로, 어디 술집에서?’를 고민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술 마신 다음날이면 눈 떨림이 심해지고 입술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마비가 되어도 저는 그저 어제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늦게 자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술을 한 잔 마시면 이 떨림과 마비가 풀린다는 것도, 그것이 금단이라는 사실 조차도 모르는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습니다.   어제 어떤 행동을 한지도 모르는 채로 오늘을 지낸다는 것, 어제 같이 술 마신 친구가 나에게 기억나느냐고 물어오는 것을 맨 정신으로 견딘다는 것, 또다시 6시가 되면 오늘은 술을 어떻게 마시냐를 고민해야하는 것, 오늘은 술 약속 없이 홀로 집에 들어가 맨 정신으로 잠에 드는 걸 걱정해야 하는 것, 부모님의 대한 죄책감을 매일 같이 안고 지내야 하는 것, 대학을 합격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 등등 이 모든 생각들이 저를 더 이상 살고 싶지 않게끔 만들었습니다.   술은 그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생각으로만 갖고 있지 않게끔 만들어 주었습니다. 술에 취해 들어와 갖고 있던 우울증 약을 다 뜯어서 먹었습니다. 다음날 눈을 뜨고 말았습니다. 몽롱한 상태로 속에 있는 것들을 모두 게워내고 누웠습니다. 방 밖에 나와 같이 술 마시고 깔깔대며 웃던 홈스테이 사람들은 아침부터 분주했고 맨 정신에 들려오는 깔깔대며 웃는 소리가, 커튼을 쳐서 아침부터 깜깜한 방안에서 원하지 않던 모습으로 누워있는 제 자신이 슬펐고 그들이 미웠습니다. 기도했습니다. 그냥 저 좀 죽여달라고.   20살, 운이 좋게도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기뻤습니다. 매일 같이 술 먹고 넘어지고 엎어지고 깨지고 이런 저의 모습이 부모님에게 늘 죄책감으로 남아 있었는데 좋은 대학을 합격함으로써 죄책감을 덜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술은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덜 취한 상태로 들어와 술을 더 마시고 싶어 대학 안에 있는 온갖 슈퍼를 돌아다니고, 취한 채로 오토바이를 끌고 술을 사서 들어오다 넘어지고, 눈뜨면 멀쩡한 기숙사 침대를 두고 옆에 술병이 굴러다니는 끈적한 바닥 위에 누워있고, 친구에게 내가 술을 살테니 제발 나와 달라고 부탁하고, 스케줄이 빡빡하면 술을 안마시겠지...하며 여러 동아리를 가입하고, 동아리 회식 때 술에 취해 아무 말이나 내뱉고 창피해 동아리 참석을 하지 못하고... 그럼에도 저녁이 되면 술을 마시러 나갔습니다.   22살, 겨울방학이 되어 한국을 나왔고 어김없이 술을 마시러 나갔습니다. 새벽 3시가 되어서야 알딸딸한 상태로 집에 들어갔고 저를 기다리신 아빠가 화가 나셔서 하신 말에 꽂혀 다시 한 번 가지고 있던 우울증 약을 모두 털어 넣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응급실이었고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나 정신병원에 보내줘” 그렇게 처음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에만 세 번을 입·퇴원을 했습니다. 세 번 다 술을 마신 다음날 입원했습니다.   25살 6월, 술을 마시고 전화를 꺼버리고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또 다시 병원에 입원하자고 하셨습니다. 엄마와 택시를 타고 가며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도 병원 안에서 환자들이랑 친해져서 나와서 술 먹겠지...’ 온통 술 생각, 더 뻔뻔해지는 저 자신, 조금의 창피함, 수치심, 죄책감이 모두 사라진 저를 태운 택시는 다사랑중앙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알코올 전문병원’이라는 글씨를 보고 올 것이 왔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입원하고 한 달을 힘들어 했습니다. 창밖을 보며 매일 울었습니다. 환의복, 식판, 수저, 젓가락, 보호사 선생님 하나하나 다 싫었습니다. 어쩌다 내가 여기 까지 왔을까. 다른 병원에서는 하는 일 없이 흰 벽을 보며 시계만 쳐다봤을 때와는 달리 그래도 수업시간이 있어 수업에 참석했고 열심히 수업을 들었습니다. 상담사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를 하며 저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나빠서, 이상한 애여서, 유별나서가 아닌 그냥 알코올중독이라는 병에 걸린 환자라는 것을 말입니다.   병원 생활이 더 이상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지긋지긋해 하던 술, 조절해보려 온갖 수를 다 써본 술, 다른 20대처럼 평범하게 지내고 싶어 하던 나 자신, 제발 좀 죽여 달라고 차라리 죽을병에라도 걸려 어떤 고통이라도 괜찮으니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그때의 제 자신이 오히려 회복하겠다며 달려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병원 생활을 마치고 AA모임에 매일 참석하면서 9개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감사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도 다사랑 AA모임에 참석 할 때면 사복입고 있는 제가 낯설기도 합니다. 많은 치료진분들이 저를 알아봐 주십니다. 든든한 저의 상담사 선생님도 늘 그 자리에서 저를 맞이해 주십니다.   다사랑중앙병원에서의 입원이 너무나도 감사하고 제 인생에 있어 큰 변화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저희 가족이 저로 인해 힘들어하는 모습 또한 이곳에서 보고 이곳을 통해 웃는 모습도 보게 되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감사하게 찾아 왔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치료진 분들이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것은 분명합니다.   다른 평범한 이들처럼, 평범한 20대처럼, 그냥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술 마시지 않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바라던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늘 감사한 마음으로 술로부터 받은 고통을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제발 타이슨하고 권투해서 이길 생각 하지 마세요!

[2019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   제발 타이슨하고 권투해서 이길 생각 하지 마세요!   최○○   벌써 단주한지 10년차가 되었네요. 처음 단주 모임을 나갔을때 어느 회원님께서 단주 10년이 되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때 그분이 신처럼 느껴졌습니다. 10년은 고사하고 10일도 못넘기던 제가 그때 그분처럼 단주의 신이 되어 가네요.   알코올의 시작은 작은 것으로 부터 시작하더군요. 처음에는 소주 2~3잔이면 떡이 되던게 여러 고민을 핑계로 점점 주량이 늘어 어느새 소주 3병까지는 먹어야 떡이 되더군요. 술을 잘 먹는게 자랑인줄 알았고, 남자는 이 정도는 먹을 줄 알아야지 생각했고, 술이 있어야 대인관계가 좋은 줄 았았고, 삼겹살이나 회는 소주가 없으면 못 먹는 음식인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좋아 술을 마시다가, 이후에는 술이 좋아 사람을 찾아 다니고, 나중에는 술 마시는데 사람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혼자 마시면서 점점 알코올중독이 되어갔습니다. 중독이란 놈은 하루 아침에 찾아오지 않습니다. 아주 조금씩 나의 뇌를 노예로 만들지요.   술을 끊기 위해 별 짓을 다 해봤습니다. 아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각서도 10번은 쓴 것 같네요. 인터넷을 뒤져 수녀원에 혼자 찾아 가기도 했습니다. A.A.모임에 100일 정도 다녀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중독이 되면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알코올이 무섭게 진행되더군요...   아이가 있으신가요? 저는 초등학교 다니는 딸아이와 5월 5일 어린이 날에 예쁜 자전거를 사주기로 약속을 했는데 5월 4일부터 장취에 들어갔습니다. 어버이 날도 제끼고... 며칠있다가 집에 들어와보니 저 대신 제 아버지께서 손녀딸에게 분홍색 자전거를 사주고 가셨더라고요. 저는 그 분홍색 자전거를 보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저는 어느새 사랑하는 딸아이에게 자전거 하나도 사줄 수 없는 무능한 아빠가 돼있었습니다. 술을 계속 마시면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처음에는 지갑, 안경, 카드 등을 잃게 되고, 주머니에는 기억도 나지 않은 카드 영수증만 남게 되지요. 그러다 직장에서는 신뢰를 잃게 되고, 친구들은 저와의 술자리를 멀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가족은 처음에는 어떻게든 저를 붙들려 노력하지만 나중에는 모두 체념하게 됩니다. 술은 그렇게 당신으로 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립니다.   아직 직장이 있고 가족이 곁에 계신가요? 그럼 병원에 입원하세요! 가족들에게 살려달라고 부탁하세요! 저는 병원에 입원해 12단계를 착실히 배우고 느끼면서 술이 어떻게 나를 파괴했는지 그리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술과의 싸움에서 이겨나가야 하는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얘기하면 술과 싸우는 것은 미련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술을 끊은지 100일이 되면 회사 사람들은 내가 중독이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생활합니다. 단주 2년이 지나면 부모님은 제사 후에 음복을 하라고 하지요. 3년이 지나니 아내는 저에게 전화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집에 오는 길에 캔맥주 하나 부탁해요!" 알콜중독자인 저에게요... 저희 집 냉장고에는 아내가 마시는 캔맥주와 장인어른이 드시다 남은 소주도 한 병 있습니다. 그저 평범한 가정과 똑같은 모습이지요. 제가 알코올중독이라고 가족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술을 멀리하도록 강요하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만날 때는 항상 친구들은 즐겁게 소주를 마시고 저는 맛있게 족발과 회를 먹습니다. 소주 없는 삼겹살을 생각해 보지도 못했고, 맥주없는 치킨은 상상도 못했던 저였지만 지금은 아이들과 삼겹살을 후라이판에 굽고, 야식으로 가족과 함께 치킨을 먹습니다.   단주 후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아니 바뀐게 아니라 제가 알코올중독이 되기 전 저의 생각과 행동으로 되돌아 왔다고 생각합니다. 단주를 한다는 것은 그냥 술을 안먹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알코올중독 이전의 생활로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알콜중독이 진행된 사람은 술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가끔은 통제가 되는것 같지요. 집에서 1병만 마셔야지... 오 되네? 그러다 점점 간이 배 바깥으로 나와 친구랑도 1병만 마셔야지... 오 되네? 그렇게 자만에 빠지고 큰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저도 10년간 그런 생활이 반복된 것 같네요.   알콜중독자가 술하고 싸우는 것은 마치 내가 권투로 타이슨하고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하면 타이슨한테 이기지 않을까? 저렇게 하면 내가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타이슨은 내가 권투로 싸워서 평생 이길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타이슨이 나이 칠순이 된다 하더라도...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 타이슨하고 권투를 하지 않으면 지지 않습니다. 술을 한 잔도 안 마시면 술에게 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 한 잔을 안 마시고, 내일 하루 한 잔을 안 마시면 그게 1년이 되고, 5년이 되고, 10년이 됩니다. 그렇게 10년이 되었고 이제는 술한테 그리고 타이슨한테 이기고 싶은 생각 자체가 없습니다. 다만 내가 술을 안마시고 온전한 정신으로 하루 하루 가족과 함께 웃으면서 살아가는데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직 술 마실 기운이 남아 있나요? 지금 가족이 당신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네요! 직장은 아직 짤리지 않았지요? 그럼 하루빨리 병원에 입원하시기 바랍니다.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면 당신은 아직은 부자입니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새 삶을 찾았다

[2019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새 삶을 찾았다   박○○   안녕하세요. 저는 알코올중독에서 회복 중인 화성 박입니다. 결혼은 했지만 1남 2녀를 두고 이혼해 지금은 아이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저는 술, 담배를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에게 배웠습니다. 저는 학창 시절에 공부를 못했습니다. 최종학교는 종합고등학교 상업계를 졸업하였는데 과목별 자격증을 따지 못하여 취직하지 못해 부모님을 도우며 농사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농사일이 체력적으로 매우 힘들어 고통을 잊기 위해 소주, 맥주, 막걸리 등 술이란 것이 보이는 대로 온종일 대중없이 마셨습니다. 술병만 보이면 모조리 마셔대며 농사일을 하던 저를 작은아버지께서 일 좀 배우라며 자동차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저는 일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잔심부름만 하는 식으로 일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작은아버지 집으로 출퇴근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을 마시고 직원들과 말다툼을 했습니다. 한 대를 맞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데 또 시비를 걸어와 싸움이 커졌습니다. 퇴근 후 술을 마시고 작은아버지 댁으로 가서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작은아버지께서는 저를 다시 집으로 데려다 주셨습니다. 제가 정리정돈을 잘 못하니 그냥 집에서 농사일이나 가르치라며 공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전부 이야기하시곤 차를 몰고 공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화가 나서 술을 마셨고 잠을 자고 조금 있다가 나가서 농사일을 거들었습니다. 얼마 후 동네 지인들이 여러 건설현장에 함께 일을 하러가자고 제안해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이 힘들고 잔심부름도 많았으며 술도 많이 마셨습니다.   한 자동차 기술연구소에서 2년간 일을 하다 오토바이 사고로 오른쪽 어깨, 쇄골뼈가 부러져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입원 중 반장님이 사직서를 가지고 병문안을 오셔서 사직을 당하였습니다. 퇴원 후에는 조경이나 건설현장, 김치공장 등에 출퇴근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습니다. 일이 힘들땐 회사를 조퇴해 슈퍼에서 술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계속해서 술 생각을 하게 되었고 휴일엔 집에서 있기 심심해 술을 마셨습니다. 부모님이 사다놓으신 박스에서 술을 꺼내 숨겨 놓고 마시다가 들키면 야단을 맞아 월급날 갚기로하고 외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것마저 힘들 땐 부모님의 돈을 훔쳐 술을 마시고 담배를 샀으며 종종 이웃집 에 놀러가 술을 마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운기를 몰고 바위를 지나다 소나무 밭에서 사고를 내 경운기의 이음쇠가 부러졌습니다. 저는 정말로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술을 마시고 경운기를 몰고가다 사고를 냈으니 결국 집에서 부모님께 야단을 맞았습니다.   식품조합을 다녔을 때의 일입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다 슈퍼에 들러서 술을 사서 마시곤 했는데 다음날 일을 하다 갑자기 손에 쥐가 났습니다. 파스를 바르고 한참을 있다가 다시 작업을 하였고 집에 오는 길에 또 술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계속 아파 조퇴를 하고 병원에서 주사를 맞았지만 다다음날이 되어서야 출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을 하다 다시 손가락에 마비가 왔습니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와 팀장에게 이야기하니 한 달간 쉬었다가 오라고 했습니다. 쉬는 동안 병원에 다니며 의사 선생님 말대로 실천하며 생활했습니다.   그러던 중 누나와 부모님, 매부가 와서 차를 타고 병원에 가자고 했습니다. 제가 안간다고 하니 가야 한다면서 상담만 받고 오자했지만 저는 차 안에서 뛰쳐 나오려고 했습니다. 결국 입원을 하게 되었고 6층 관리병동에서 당시 주치의셨던 우원장님과 상담사 윤선생님이 저를 관리해주시고 상담해주셨습니다.   하루는 아버지, 어머니, 누나, 작은아버지, 막내이모, 이모부가 병문안을 오셨습니다. 저는 울면서 집에 보내 달라고 같이 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모께서 여기서 쉬고 치료 잘하고 몸이 좋아지면 돌아오라고 했고 저는 “알았습니다.”라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입원한지 5일이 지나고 전화 사용이 가능해지자 저는 매일 3회씩 전화를 했습니다.   12단계 머리말을 쓰는 것을 시작하고 며칠 후, 누나와 어머니, 딸이 면회를 왔습니다. 집에 같이 가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딸이 아빠가 집에 가면 또 술마실거 같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안마시겠다고 했지만 딸이 거짓말 하지 말라며 여기서 쉬라고 말했습니다.   윤상담사님께서 개방병동으로 가자고 제안하셨지만 저는 안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 병원 생활 중 누군가 1단계 발표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나는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한번 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어 이 병실, 저 병실 다니며 이것저것을 물어보러 다녔습니다. 개방, 관리와의 만남에서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저는 개방전동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임선생님, 방선생님, 이선생님, 권선생님, 김선생님 등 여러 환우들과 회복자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새로운 마음으로 상담사님의 과제도 열심히 하였고 교육 프로그램도 열심히 참석했습니다. 그러던 중 누나가 면회를 와 누나에게 집에 가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누나는 발표를 하고 개방병동에 내려가 치료를 받고 퇴원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였지만 저는 싫다고 하였습니다. 남들은 다 하는데 너는 왜 못하느냐고 누나가 말했습니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모든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운동도 시작하였으며 노트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제 자신이 술 때문인 것을 깨닫고 퇴원하면 술을 절대 마시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저의 낙서를 우원장님께서 보시고 좋아했던거 같습니다. 그렇게 저는 힘을 얻었습니다.   다시 누나가 병문안을 와 상담사님, 원장님께 어머님 생신에 근처에서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외출이 불가하다고 하셔서 병원내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동생, 아들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면회를 와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저는 또 퇴원을 시켜달라고 하였으나 가족들은 군대에 있다 제대한다 생각하고 잘 있으라 하였습니다. 정 퇴원이 하고 싶으면 1단계 발표 후에 퇴원하자고 하여 1단계 발표지를 받고 준비하였습니다.   ‘잘해야 할텐데...’하는 걱정을 하며 작성하였습니다. 몇 번에 걸쳐 수정을 하고 4번 이상 옮겨 적은 뒤에야 발표를 할 수 있었습니다. 발표 날 누님, 아버지, 어머니, 매부, 딸 모두 와주었고 제가 떨고 있으니 용기내서 하라고 격려도 해주었습니다. 환우들, 상담사님, 원장님께서도 저에게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고 그렇게 저는 일주일 후 개방병동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이후 12단계 필사를 하였고 4단계, 9단계 발표를 끝으로 퇴원을 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제가 할 일입니다. 무엇이든 해야겠기에 열심히 글을 쓰고, 체력을 단련하고, 집안일도 하고, 책도 보면서 마음의 평온함을 추구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단주를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그냥 술을 마셔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인내심, 끈기를 가지고 남들이 한 잔하자고 해도 큰일 난다며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젠 술 안 마시는 사람에게는 절대 술을 안 따라준다며 저에게 음료수, 커피, 안주나 먹으라하고 자기들끼리만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좋을 때도 있었고 술을 마시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저는 참고 견디며 병원에서 배운 ‘배·화·외·피’를 실천하며 단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새 삶을 찾았습니다. 여러분도 술 마시지 않고 병원에서 배운 대로 실천해 부디 꼭 행복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술을 마시지 아니하면서 건강도 되찾고 단주도 하고 일석이조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저는 더 이상 예전의 제가 아닙니다. 저는 2016년 9월 23일 입원하였고 2017년 1월 14일 퇴원해 지금까지 단주를 생활화하면서 회복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저의 신조대로 참고, 이기고, 견디면서 한 발씩 내걷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힘내시어 함께 이기며 온전한 삶으로 갑시다. 감사합니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신이 내게 주신 두 번째 기회

[2019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   신이 내게 주신 두 번째 기회   이○○   오늘 하루도 회복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이 어쩌면 신이 내게 주신 두 번째 삶의 기회인지도 모른다. 나는 알코올을 여자보다도 더 사랑했었고 가족보다도 더 아꼈다. 오죽했으면 이성을 만날 때에도 첫 마디가 술을 좋아하냐는 말이었을까... 과거의 나는 술에 살고 술에 죽는 술꾼이었다.   1980년대 1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당시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서는 논일을 하시다 춤을 추며 좋아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들이란 이유로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지만 시련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젊으셨을 때부터 알코올중독자였고 폭력적인 삶을 사셨다. 어머니를 선으로 만나셨을 때는 잠시 그런 행동들을 멈추어 결혼하기 위해 노력하셨지만 결혼 후엔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셨다. 나의 아버지에 대한 첫 기억은 술에 만취되어 집안을 부수고 가족들을 폭행하는 장면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거의 매일 같은 상황들의 연속되었다.   아버지의 폭력과 음주, 집안 물건을 부수는 일은 거의 삼위일체였다. 술을 드시면 화를 내셨고 화가 나시면 나랑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도 남자라는 이유로 나는 했고 이유 없이 잘못을 빌어야 했다. 그러고도 성에 안 차시면 반찬이 이게 뭐냐느니, 이건 왜 더럽냐며, 이게 왜 여기에 있느냐며, 이런 걸 왜 사냐며, 방이 지저분하다는 등의 이유로 깨끗한 집안을 도리어 엉망으로 만들곤 하셨다.   더 큰 문제는 아버지가 매일 술을 드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에 가는 게, 집에 있는 게 항상 싫었다. 저녁이 되고 일이 끝나 돌아오신 아버지의 초인종이 눌리면 화목했던 집안 분위기가 금세 싸늘해졌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방에 들어가 쥐죽은 듯 조용히 해야했다. 아버지의 심기를 건들지 않기 위해... 이러한 아버지의 음주습관은 내가 술을 빨리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첫 잔을 든 건 초등학교 4,5학년 때로 기억된다. 어느 날 아버지가 혼자 집에서 술을 드시던 중 적적 했었는지 아들이란 이유로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 한다 합리화를 시키며 어린 나에게 술을 가르쳤다. 사실 가르쳤다기 보단 나를 본인의 술 상무로 만들었다. 그렇게 처음 먹은 술의 느낌은 쓴 화학약품의 냄새...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빨리 잠들 수 있었다는 것... 그렇게 20여년이상 계속 된 나의 알코올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아마도 유전적인 요인... 그리고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보고 배운 아버지란 인물로 인해 성인아이가 되버린 나는 어렸을 때부터 화나거나 우울할 땐 몰래 집에서 술을 마셨고 점점 커가면서는 이것이 자랑인양 우쭐대며 마셔댔다. 조기교육의 힘이었는지 나는 남들보다 술을 잘 마시고 많이 마셨고, 항상 술자리 끝까지 마시고도 헤어지면 다시 혼자 술을 마시러 다녔다. 성인이 되고 어디든 갈수 있게 되자 Bar, 나이트, 단란주점 등 술이 파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다니곤 했다. 오로지 술이었다. 그렇게 일찍 술을 마신 덕에 20대 초반에 처음으로 블랙아웃을 경험했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신기해하기만 했다. 그냥 친구끼리 하는 웃긴 이야깃꺼리 정도로 여기며 당연히 많이 마시니 그런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길에서 쓰러지거나 하는 이상한 행동은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면서 블랙아웃이 길어졌다. 처음에는 10~20분 정도였던 것이 1시간, 2시간이 되었고 최근까지 술 마실 때에는 1, 2시간 마시면 3, 4시간 블랙아웃 상태로 술을 마셨다. 그러면서 점점 아버지화되었다. 언어도 난폭해지고 직설적인 말도 서슴지 않았다. 다행히 폭력적인건 거의 없었지만 1녀에 한 번 정도는 폭발하여 집안의 물건들을 던졌던 것 같다.   항상 술에 취해 있었고 술과 돈에 목이 말랐다. 고등학교 때부터 일을 해왔지만 거의 모든 돈이 술값이었다. 유흥비 탕진은 순식간이었다. 한 달 일해 하루 즐기는데 다 쓰고, 남은 20여일은 여러가지 핑계로 돈을 타서 집에서 술을 사먹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나중에는 더 먹고, 더 놀고 싶은 마음에 대출에까지 손을 대었다. 갚을 생각은 뒷전이었고 한 곳에서 받으면 그날 즐기고 다 쓰면 다음날 다른 곳에서 또 대출 받고... 그렇게 안 될 때까지 여러 곳에서 대출을 받다가 감당이 안 되면 나 몰라라 했다. 돈을 받으러 집에 찾아오면 그 시간 동안은 밖에 나가 술을 마시거나 집에 아무도 없는 척 잠수를 탔다. 결국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통장거래도 중지되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술만 마실 수 있다면...   그렇게 술을 마시며 무엇 하나 이룬 것도, 모은 것도 없이 20대를 보내고 30대가 되자 불안과 불만이 점점 쌓여갔다. 투사가 심해져 날 이렇게 만든 건 아버지 때문이라고 가족들이 날 케어 못해서 이렇게 큰 거라고 합리화했다. 자기연민이 심해져 점점 술이 취하면 언성이 커지고 집에서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받아주던 가족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지쳐갔고 이내 갈등이 심해졌다. 도무지 풀리지 않는 뫼비우스 띠처럼 악몽같은 생활을 반복했다.   술에 취해 집에 들어가 행패를 부리고 언어폭력까지 심해지자 2019년 1월 초, 가족들은 나를 정신병원에 강제입원 시켰다. 3개월 동안, 퇴원하는 전날까지 가족들과 싸웠다. 내보내 달라고... 입원해 있는 동안 오로지 나가면 술을 마실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퇴원한 당일 저녁부터 3개월 동안 못 먹었으니 이제는 마실 거라며 선포를 한 후 이틀 동안 잠이 들 때 빼고는 계속 술을 마셨다.   그러다 3일째 되던 날 갑자기 알코올 금단 섬망이 왔다. 살인충동과 자해충동이 심하게 왔다. 거의 실 한 가닥으로 나의 상태를 견디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이 끊어지면 나는 이제 내가 아니게 될 것 같은 섬뜩한 공포가 머릿속에서 요동을 쳤다. 급하게 약을 찾아 먹고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에서 안정을 취했다. 그 일로 난 큰 충격을 받았고 집에 혼자 있는 게 불안했다. 그런 일이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일이 나의 단주생활을 시작하게 만든 터닝 포인트가 된 것이다.   다음날 스스로 알코올전문병원에 가고 싶다고 했고 입원을 했다. 처음엔 섬망의 공포가 사그라들 때까지 한 달 정도만 입원할 생각이었다. 스스로 단주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하나 배울수록, 알아갈수록 내 생각은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더욱이 아무런 정보도 없어 그냥 ‘술만 안 마시면 되지...’ 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나였지만 교육과 받아들임을 통해 단주해야만 하는 원동력이 생겼다.   분명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다. 단주와 회복에 대해 알면 알수록 쉽지 않은 길인 것 같다. 때때로 내가 왜 이래야 되지 하는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의 과거를 돌아보고 가족들에게 했던 행동과 말을 떠올린다. 그리고 나한테 이야기한다. 다시 예전처럼 그렇게 살고 싶냐고... 이제는 알 것 같다. 나에게 술은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단주의 절실함이라는 것을... 하루하루 매시간 생각해본다. 그리고 병원을 통해 알게 된 A.A.모임에도 꾸준히 참석하는 습관을 기르고 있다. 같은 뇌의 병을 앓고 있는 동지로써 같은 고통을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니, 온전한 생활을 위한 변화와 단주를 실천하면서 살아갈 결심을 다시금 하게 된다. 위대한 것으로 향하기 위해 좋은 것을 포기하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내 자신을 살아가며,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회복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것이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하루하루 회복중인 나야...고마워

[2019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   하루하루 회복중인 나야...고마워   최○○   곧 죽어도 자존심 하나는 굽히지 않고 항상 자기 잘난 맛에 살던 지난 20대의 삶... 잘생기진 않았지만 나름 이성에게 인기있는 외모와 유머러스한 입담으로 분위기 메이커를 담당했고, 젊다는 이유만으로 술을 내리 마시던 삶이지만 아무 문제 없이 잘 흘러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첫 직장에서 하지 말았어야 될 큰 실수를 저질러 권고사직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한 충격과 스트레스에 저는 본격적인 음주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 길이 중독자로 가는 길인 것도 모른 체...   권고사직 받았다는 사실을 가족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거짓말로 출근한다 해놓곤 모텔에 들어가 혼자 소주병 나발을 불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술에 취해 더 마시고 싶을 땐, 야근이나 당직을 해야된다는 거짓말로 가족을 안심시키며 술을 마셨습니다.   처음에는 한두 병으로 시작해 거의 사람이 죽을 정도로 마시고, 토할 때까지 마시고, 토하고 나서도 마시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루에 10병은 기본이었으며 모아둔 적금마저 몰래 깨고,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은 다 팔아 술을 사는데 쓰는 비참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가족들이 권고사직을 알게 되었지만 구직하고 있다며 거짓말을 하고 나가서 또 술을 마셨습니다. 뭘 하면서 보낸지도 모른 체 술 마시는 것 외에는 아무런 계획도 생각도 없이 살았습니다.   돈 나올 구석이 없자 돈을 벌어 술을 마시려고 다시 취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만 끝나면 바로 아무도 안 보이는 곳이나 아파트상가 공중화장실 혹은 공원에서 몰래 술을 마셨습니다. 가족들에게는 회식이라고 거짓말하며 매일같이 술을 마셨습니다. 분명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데도 더 마실 궁리를 하며 몰래 술을 사들고 집에 가 가족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숨긴 뒤 방문을 잠구고 술을 마시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잦은 기침이 나오고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아침밥을 먹기 힘들 정도로 수전증이 심했습니다. 숟가락을 제대로 들고 식사할 수 없자 가족들은 저를 걱정했습니다. 매일같이 소주 4~5병 이상을 마셔서 그런 것인데도 저는 내 몸 상태가 어떻게 변해가는지도 모른 체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들과 함께 옷을 사러 나갔습니다. 옷을 고르는데도 손이 덜덜덜 떨리자 그 모습을 보신 어머니가 기겁을 하셨습니다.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이니 병원에 가봐야 되는것 아니냐고 하셨지만 저는 아니라고 괜찮다고 일이 바빠 그런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변명으로 둘러대기 급급했습니다.    2017년 추석날, 제삿상을 준비하던 중 막걸리 한 잔을 마시자마자 눈에서 황달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께선 빨리 병원에 가봐야 되는 것 아니냐며 병원을 알아보셨지만 추석 연휴다 보니 큰 병원들도 진료를 하지 않아 결국 추석이 끝나고 진료를 받으러 갔습니다. 간이 너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해야된다는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가족들이 잠시 식사 및 휴식을 취하러 간 사이, 저는 그새를 못 참고 밖으로 나와 환자복을 입은 상태에서 소주를 사들고 병원으로 돌아와 아무런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마셨습니다. 절대로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지만 의사의 말을 무시한 채 술을 마셨습니다. 마시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환청과 환각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결국 거의 반쯤 기절한 상태가 되어 큰 대학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큰 병원에 이송되고 난 뒤, 비로소 가족들은 제가 알코올 중독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 자신은 절대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사실 중독돼 있었습니다. 그렇게 대학병원에 입원해 만 29살의 나이로 간경화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담당 원장님은 물론 가족들까지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결과였기에 제 자신도 믿기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1달 반 정도 병원에서 치료 후,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해야되는데도 불구하고 술 생각을 버리질 못하여 또 술을 마셨습니다. 정신을 못 차리는 제 모습에 스스로 도저히 안 되겠다 판단하여 처음으로 부천에 있는 알코올 전문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정말로 지옥같은 폐쇄병동에 약 3 개월 동안 갇혀있으면서 나가면 술을 안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아무것도 배운 것 없이 그저 술만 강제로 못 마신 것이었기 때문에 저는 퇴원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음주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오히려 더 심해져 마시는 횟수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셨으며 심지어 길을 가다가 목이 마르면 대놓고 소주병을 보이기 싫어 페트병 사이다를 사서 사이다를 버리고 안에 소주를 넣어 걸어가는 길에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진짜 전형적인 알코올 중독자들이 하는 행동을 제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제가 하는 행동이 그저 옳다 생각했고 전혀 문제가 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술을 마시고 싶어서 마셨지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마신게 아니니 난 잘못이 없다고...   방에서 몰래 마시던 소주병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하루가 멀다하고 가족들에게 들켰습니다. 가족들은 제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며 부천에 있는 다른 알코올 병원으로 저를 입원시켰습니다. 이미 한 번 경험한 전적이 있던 저는 빨리 나가고 싶다는 마음에 거짓으로 이젠 정말 안마시겠다는 선언을 하며 한 달만에 빠르게 퇴원을 했습니다. 그래도 ‘진짜 안 마시기로 말을 했으니 당분간은 마시지 말자...’면서 꾸욱 참으면서 지냈지만 2018년 6월 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술을 마셔버렸습니다. 정신이 나갈때까지 술을 마시다 정신을 잃어 결국 가족이 운영하는 독서실 건물 1층 화장실에서 쓰러졌고 결국 응급차에 실려 병원에 이송됐습니다.   저는 스스로 도저히 답이 없다고 판단하였고 가족들도 마지막 희망이자 기회를 저에게 제공해 2018년 7월 2일, 이곳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어차피 여기서 3개월 이상 저를 잡아 둘 수 없다는 규정을 알고 있었기에 ‘3개월만 참고 퇴원해서 또 마시면 되지.’하는 계획으로 병원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단계 발표라는 관문이 다가왔고 ‘그냥 말로 쇼 하는거네~’라는 생각에 곧 죽어도 안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관리병동에선 주말에 할 것이 너무 없기에 심심할 때 한 번 써보라는 상담사님의 말에 한 번 져주는 식으로 알겠다고 하며 문항을 받아 써 내려갔습니다.   한 문항 한 문항 넘길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막 올라오면서 알 수 없는 눈물들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그러 제 모습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어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그렇게 ‘그래, 나도 한 번 마음을 잡아보자! 다시 예전에 나로 되돌아가보자!’ 라고 다짐하며 1단계 발표를 어머니 앞에서 당당하게 외치며 개방병동으로 내려왔습니다.   개방병동에서 A.A.모임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회복을 도와주는 프로그램이라 배웠는데 다들 자기가 중독자인데 예전엔 어떠했는지 지금은 어떻게 생활하는지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그게 뭐가 나한테 도움이 되는 거지?’라는 의문에 오히려 회복을 해볼까 마음 먹었던 저에게는 다시 알코올 중독자로 돌아가게끔 만드는 계기가 될 것 같았습니다.   불만이 너무 크고 화가 난 나머지 지금의 재활상담사가 아닌 예전 재활상담사님께 “A.A.모임이 너무 싫습니다. 저는 이거 못 하겠습니다. 안 듣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상담사님이 해주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속는 셈 치고 딱 2주만, 2번만 병원모임에 참석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경험담을 눈감고 들으며 내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 들어보세요. 만약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면 다시는 A.A.모임에 안가도 되고 병원모임도 안 들어가셔도 됩니다. 한 번만 그렇게 해보세요.” 그 말에 속는 셈 치고 해보았는데 정말 내 이야기라 생각하고 들으니 왜 제가 그렇게 싫어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계속 회복의 길을 이어나가기 위해 집 근처 A.A.모임을 다니고 있습니다. 지금은 몸도 많이 건강해지고 정신 건강도 많이 회복되어 너무나 기분이 좋습니다. 이 기세를 몰아 현재도 재활병동에서 꾸준히 치료중에 있습니다.   하루하루 점점 더 나아지고 있는 나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다사랑 2021-02-09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2018년 환갑 생일이 다시 태어난 단주 생일입니다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대상]   2018년 환갑 생일이 다시 태어난 단주 생일입니다   김○○ 술은 마약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의 시작이 눈덩이 굴러가듯 커져 버리는 건 순식간이죠. 그런 의미에서 이번 수기공모전을 통해 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하나의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과거에 대한 저의 고통이 연민으로 다가와 남의 고통보다 커 보이며 심지어는 내가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같은 인간의 생을 살며 그 긴 여정 동안 중독에 관한 번뇌를 벗어 버리는 것은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지병이 있음에도 어리석게 술을 마시며 그 고통을 키워온 것은 저의 큰 실수였습니다. 먼저 저의 고통스러운 지병에 관해 설명하자면 눈이 햇빛에 매우 민감해 따갑고 시리며 쉽게 건조해지는 증상으로 20여 년 가까이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면 자리에 앉아 도착할 때까지 눈을 꼭 감고 가야 할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대학병원 안과를 꾸준히 다니며 치료해 보았지만, 원인과 병명은 알 수 없었습니다. 저의 혈액으로 혈청 안약을 만들어 넣는 것이 최선의 치료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니던 안과의 전문의께서 학회를 가셔서 임시로 뵙게 된 한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자가 면역 질환인 ‘쇼그렌 증후군’일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검사를 받으니 그 병이 맞다는 확진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질환을 안고 있는지라 평소에 많이 민감하고 스트레스에 취약한 편입니다. 특히 이 병은 산정 특례에 해당되는 희귀한 질환으로 심각한 경우 자살시도까지 하게 될 정도로 고통이 큰 질병입니다. 개인적으로 타인에게 이러한 질병을 견뎌내고 산 제 인생에 대해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강합니다.   몸 관리를 소홀히 하면 안 되는데도 어리석게 건강관리를 하지 않고 극한의 알코올 중독 상황까지 저를 몰아갔던 저 자신을 반성해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병이 있음에도 마시게 되는 술의 중독성이 그만큼 강하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술을 마시게 되면 몸이 더 건조해져 힘들기도 했지만 술을 멈추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제 과거의 이야기를 한 번 되짚어 보려고 합니다. 어떻게 술을 마시게 되었는지, 그리고 입원하기까지 어떠한 과정이 있었는지 한 번 살펴보며 다른 힘든 분들도 공감하시고 위로가 됐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1997년 무렵, IMF로 사업이 많이 어려워지자 남편의 지병이던 바이러스 간염이 간경화로 급속히 진행되었습니다. 수년 동안의 정성스러운 치료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1999년 2월 6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니던 중소기업의 전무라는 직책을 내려놓고 세상을 떠나기 1년 반 전 시작했던 사업은 이미 많이 기울어져 있던 상태였고, 남편이 남기고 간 책임은 저에게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신도시에 살고 있던 집을 급매로 팔고 저는 2명의 자식과 함께 주변 먹자골목 14평대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빚은 청산할 수 있었지만 가진 돈이 별로 없어 살길이 막막했던 그 시절, 1995년도부터 고부갈등의 괴로움을 떨치고자 마셨던 술은 조금씩 늘어 어느덧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더불어 남편과의 사별 이후 핏줄이 얼어버린 것 같은 지친 마음과 아이들 낳고 살림 위주로 살았던 인생이 갑자기 생업 전선에 놓이게 되면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으로 마음을 다잡으며, 주변 교회 사람들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작은 좌판에 탁자 몇 개 놓고 떡볶이 장사를 하며 생활기반을 다졌습니다. 그러나 불법 영업이었던 탓에 고소를 당하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좌판을 접게 되면서 생계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23살 터울의 큰언니께서 내가 찾아가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이 찾아주는 일을 하라는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술을 파는 곳보다는 아이들에게 떳떳할 수 있는 엄마가 되기 위해 김밥집에서 하루 12시간씩 일을 했습니다. 일에 익숙하지 않았던 저는 하루 만에 잘리기도 하고, 겨우 한 달을 버티다가 극심한 몸살로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집에서 2km 정도 떨어진 김밥집에 취직되어 새벽 시간에 설거지하는 일부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일에 서툰 저를 친절하게 도와주던 한 친구와 가까워지면서 일이 없는 날에는 둘이 술친구가 되어 지냈습니다. 술을 과하게 마실 때는 몸이 많이 안 좋았지만, 극한의 우울함 때문에 음주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 건 아니었습니다. 시어머님이 같이 살게 되면서 베란다에 매실주를 만들어 두셨고, 호기심에 술을 마시게 됐습니다. 그러나 늦은 나이에 처음 접한 술이 더 무섭다고 저는 고부갈등으로 인한 삶의 고통을 풀기 위한 수단으로 술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의 배려하심보다 술의 이끌림에 저 자신을 맡겨놓는 날이 많아지는 것을 자책했지만 생활이 힘들어질수록 술의 욕망에 승복하는 날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힘든 날들이 계속될수록 술에 나를 바치고 아픔 속에서도 해탈을 얻듯 자기연민 속에 나를 맡기는 날들이 많아졌으며 주변을 보살피지 못하고 내 고통을 달래주는 삶 위주로 지내는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내 인생에서 제일 가난했을 때 남편을 잃은 아픔 속에 자식 둘과 2400만 원 전셋집이 전부였던 그 시기는 마치 태양마저 얼어가듯 차갑고 힘든 시기였으며 그땐 술이 참 그립고 달았습니다. 소주를 마시고 취하게 되면 자기연민을 주체할 수 없어 아이들에게 한풀이를 했습니다. 일하느라 아이들을 돌볼 순 없었지만 적어도 재정적으로 필요한 건 다 해주고 싶어 최선을 다해 노력했습니다. 그런 자신이 참으로 대견스러운 한편 하루하루가 힘든 노동의 연속인지라 버거웠습니다. 그래서 술에 더 의존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병으로 몸이 아픈 남편을 위해 다양한 약용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만들었던 경험과 초등학교 급식 조리사 아르바이트, 다수의 대기업 미각심사 참여 경험 그리고 친구와 함께 취득해 놓았던 조리사 자격증 덕분에 요리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김밥집 새벽 근무로 오래 일하면서 가게 주인으로부터 호감을 얻게 되었고 김밥집을 동업하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2003년 동업을 시작했고, 친구에게 돈을 빌려 동업자에게 거금의 돈을 지급한 후 혼자 자영업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주인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며 적게는 12시간 많게는 17시간까지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설날, 추석 외에 별다른 휴일 없이 근무하는 것은 꽤 고통스러웠습니다. 최선을 다해 일했기에 장사는 잘되었지만 고된 일을 마치고 나면 술 없이 잠들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알코올 클리닉에 다니며 약을 먹으면서 2년간의 단주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힘들게 보냈던 아들의 외국 유학이 2번의 자살시도로 중단되었습니다. 때마침 다니던 알코올 클리닉의 폐업으로 병원에 다니기 곤란한 상황이 되었고 다른 병원을 찾지 않고 이제까지 꾸준히 약을 잘 먹어온 대로 스스로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기대가 컸던 아들이 조현정동장애로 장기 입원을 하게 된 상황에 무력함을 느끼고 매우 속상했지만 술을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단지 어느 날 문득 ‘오늘만 먹고 내일은 먹지 말자’라는 갑작스러운 생각이 저를 다시 술로 이끌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아마 이것이 하루하루 단주 생활을 열심히 해나가다 술에 다시 빠지게 된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게 일이 익숙해지면서 문화프로그램에도 많이 참여하였으며 성경 한 권을 컴퓨터로 사경 하여 상도 받았고, 손글씨나 컴퓨터 교육도 받으며 시장 상인회에서 우수 상인으로 시상 받기도 하는 등 열정적으로 살아왔습니다. 지병인 쇼그렌 증후군 증세도 많이 나아져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노동을 감내하며 자식들이 어떻게 살아나가는지 일일이 도울 수 없었고 딸은 한 번의 대학 중퇴와 재입학 그리고 아들은 정신장애 3급을 받으며 힘들어하는 모습에 번뇌가 찾아왔습니다.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한 시점부터 빠른 속도로 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기억력 저하와 몸에 이상이 있다는 징후들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 술에 일상을 맡기고 말았습니다. 결국 단기적 기억상실이 일어나는 날들이 많아졌고 음식도 멀리하게 되어 158cm의 키에 42kg까지 몸무게가 떨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각한 우울 증상과 집안에서 걸어가며 소변을 보는 요실금까지 겪게 됐습니다. 그렇게 자식들에게 인생의 괴로움을 울며 하소연하는 날들이 많아졌고 2003년부터는 13년간 운영해 오던 가게를 접으면서 남는 시간 동안 술에 더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몰래 감추어 두고 먹는 소주병의 개수는 늘어만 갔습니다.   그러던 중 조현정동장애로 재활 치료를 받는 아들과 함께 요양보호사 교육을 받다 우연히 살림 도우미 교육을 알게 됐습니다. 이를 통해 재취업에 성공해 공백 기간 없이 다시 일로 복귀할 수 있었지만 술을 멀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노동에 대한 스트레스를 만취한 상태로 분가한 딸에게 전화해 하소연하는 것으로 해소했습니다. 저의 심해지는 우울증과 만취 시 기이한 행동으로 인해 아들은 알코올성 치매를 의심하였고 결국 저는 신경과 치매 정밀검사를 받아 경도인지장애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몰래몰래 방문을 닫고 술을 마셨던 터라 이러한 음주 생활에 방해 요소는 많지 않았습니다. 몇 년을 이렇게 지내다 보니 술이 깨면 다시 술을 먹는 장취에 빠지게 되었고 술기운 없이는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의식이 점점 무뎌져 온종일 수면에 취해 안 깨어났으면 하는 생각과 함께 삶에 대한 의욕도 상실하게 되어 기본적인 위생관리조차 잘하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저 매일 4~6시간 동안 하는 살림 도우미 일에 대한 의무감과 TV 그리고 술, 아들 부양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겨우 살아가는 하루살이가 되어갔습니다.   정신병원 입원을 3번 정도 반복하다 집에서 생활하던 아들은 자기가 다니던 정신과의 알코올 클리닉에 저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아들이 담배를 끊겠다며 5일간 금연 클리닉 합숙에 들어갔고 저는 일도 미루어 가며 술을 마셨습니다. 아들이 돌아오기로 한 날, 늦게 올 거라고 예상했던 아들이 예상치 못하게 오전 중에 돌아오게 되었고 그 동안 숨겨왔던 제 모습을 들키게 되었습니다. 심하게 어질러진 제 방안을 보게 된 아들은 저를 집 근처 다사랑중앙병원까지 끌고 가 김석산 원장님께 진료받게 하였고, 만취 상태였던 저는 그렇게 보호 입원이 되었습니다.   갑작스런 첫 입원에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고 제가 아들에게 보호 입원을 강요했듯 저 또한 보호 입원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지만 정신병원 생활의 괴로움을 호소하던 아들에게 항상 말했던 것처럼 나도 병원에 입원해서 쉬고 싶다는 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고통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입원 생활에 대한 거부감이 없을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의 사별 이후 18년 동안 지속된 고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감이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병원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단주에 대한 각오가 없다면 병원 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은 반복되는 휴식뿐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마음을 다잡으며 차차 단주에 대한 열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경험이 있던 아들은 자주 방문해 안부를 물었고, 저도 마음을 온전히 다듬고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하면서 단주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다른 병실 환우들이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공부방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구나’ 하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입원은 처음이라 병원 생활은 강압적인 분위기에 약과 밥만 주고 교육은 가끔 받을 것이라 생각했던 저의 착각은 금방 바뀌었습니다.   알코올 병동은 나 자신을 진단하며 중독에 대한 이해를 돕고 지속적 상담을 통해 나의 잘못된 습관과 가족에게 준 상처를 같이 치유하는 하나의 치유 공동체였습니다. 병동 생활은 알코올 중독 회복에 관련된 서적들을 접하면서 내가 했던 행동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방향 그리고 맑은 정신을 갖기 위해 필요한 마음가짐을 서서히 확립해가는 기회였습니다. 가장 행복했던 건 노동으로부터 해방이었으며 상담사 선생님과의 학습을 통해 술에서부터 해방하려는 숨겨진 의지가 껍질을 벗기 시작하였습니다. 나 자신의 온전함을 회복하려는 노력과 생활습관에 변화가 생기면서 술 없이 잠들 수 없던 날들에 대한 힘든 기억이 없어지고 있었습니다.   병원 교육의 단계별 학습 중 제1단계의 내용이었던 ‘나는 술 앞에서 무력했으며 내 삶을 수습할 수 없었다’를 통해 나 자신을 인정하면서부터 마치 영화관에서 주인공이 된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보듯 객관적인 시각에서 나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좀 더 나아가 4단계 교육을 통해 내 인생의 자서전을 써보고 나의 성격적 결함에 대해 이해하고 행동의 오류를 검토하며 나를 변화시켰습니다. 9단계 교육에서는 내가 술을 마시게 된 이유와 과정을 돌이켜보고 나의 잘못을 시인하며 그에 대한 피해를 보상하는 마음가짐을 가짐으로써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평온한 감정 속에 몰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원망과 강한 자기연민, 모자란 자신감, 지나친 자기 합리화라는 나의 결점들은 서서히 그 고리를 끊고 있었습니다. 또한 술을 처음 마시게 된 이유였던 시어머니와의 갈등에 대한 묵은 원망과 자기 분노의 과정을 돌이켜보며 글을 쓰고 반성하는 시간을 통해 나의 악업을 용서하고 이해하며 해방의 감정을 느꼈습니다. 이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받아주며 타인에 대한 분노와 악한 마음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익히고 감정을 치유하며 아픈 마음에서 평온한 마음으로 변화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성격적 결함에 대해 검토하게 된 것도 학습과 상담을 통한 배움 덕분입니다. 이전에는 항상 나는 잘못이 없다고 주장했고 내게 주어진 상황에 억울하고 분하게 느껴지는 감정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격리된 병원 생활을 통해 안정을 취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과거를 되짚어 보니 이기적으로 나만 위했었다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너무 좋은 기회 아닐까요?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 평온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중독에서 벗어나면서 느꼈던 병원 생활은 그만큼 뜻깊은 일이었습니다.   평온함을 청하는 기도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시고, 어쩔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주시고, 그리고 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소서’를 암송하며 자신을 다스렸습니다.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참여하며 때로는 분별없이 고집만 내세우던 나의 모습을 되짚어 보았고 그렇게 게으름 없이 꾸준히 정진한 저에게 회복은 평온한 마음의 유지라는 선물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마지막 9단계 발표날이자 환갑이 되는 생일날, 두 자녀와 동료들 앞에서 나 자신을 반성하고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고 퇴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날이 제가 다시 태어난 날이라고 축하하고 싶습니다. 저의 또 다른 생일로서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무술년 개띠 해, 저의 만 60세 생일은 세상에서 가장 보람찼던 하루가 아닐까 싶습니다.   발표 마지막 즈음에 9단계 과정을 지도해 주시던 상담사 선생님께서 권해주신 자식들에게 사과 편지쓰기의 결과물을 자식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휴식을 취하며 더는 술과 함께 하는 인생을 걷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루하루 피곤한 날들과 장애가 있는 아들을 돌보아야 하는 일에 지치는 날도 있었고, 쇼그렌 증후군에 의한 극한 피로에 많은 고통이 수반된 날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일상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는 나를 꾸준함으로 이끌었고 그렇게 퇴원 후 알코올 중독자 모임(A.A.: Alcoholic Anonymous) 100일 연속 참여에 성공하였습니다. 또한 알코올 중독 치유 후원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분의 도움 속에 많은 배움을 얻고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로 산 인생보다 그렇지 않은 인생이 더 길지만 술을 중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알코올 중독은 나의 의지 부족으로 인해 술을 계속 찾게 되는 것이 아니라 뇌의 기능 이상으로 생기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저처럼 스트레스 요인을 얻게 되었을 때 자기 의지로만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다시 술의 길로 빠지는 선택입니다.   알코올 중독이 병이라는 인식을 갖고 병원치료와 알코올 중독자 모임 등에 지속해서 참여하는 것은 앞으로 제 평생의 과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도 수기를 쓰고 후원자와의 교육 그리고 A.A. 모임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저를 도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맺음말로서 A.A. 100일 작전을 성공한 저를 격려하고자 꽃다발을 들고 와 축하해 주신 후원자님을 비롯해 2주에 한 번씩 약을 처방해 주시는 선생님 그리고 병원 생활에 도움을 주신 상담사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들, 보호사 선생님들께도 큰 감사를 보냅니다.   아직 금주를 시행한 지는 11개월 남짓이지만 첫 1년이 가장 힘들다고 합니다. 이제 저는 그 큰 산을 넘어가려 합니다. 마지막으로 A.A.를 통해 만난 많은 식구 그리고 경제적으로 많이 도와준 딸에게 감사하며 수기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다사랑 2021-02-09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생의 한 가운데에서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최우수상]   생의 한 가운데에서   나○○   “인생은 한 점 뜬구름이 아니다. 한 조각 빵이 될 수도 없다. 그러나 왜 우리는 부는 바람 속에서 상처를 키우며 흐르는 물속에서조차 목마름을 느끼는가! 저 어둠 때문인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의 한 가운데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갈래머리 여고 시절 어느 책에서 읽었던 글귀입니다. 지금은 무슨 내용인지, 어떤 뜻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제 삶의 여정이 이와 같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저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제 기억의 첫 페이지는 아주 어린 시절 그때가 대여섯 살쯤 되었나 봅니다. 집이 아닌 낯선 곳에서 마루 기둥에 끈으로 묶여 있던 저는 엄마를 찾으며 눈물과 콧물, 땀에 범벅으로 된 채 울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자전거에 실려 탱자나무 울타리 쳐진 담장을 따라 엄마가 계신 집으로 오는 데서 기억은 끝이 납니다.   얼핏 얼핏 지나가는 흑백 필름 같은 기억과 엄마의 보충 설명에 따르면 제가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입에 풀질하기조차 힘든 가정형편 때문에 1남 5녀의 우리 집은 이산가족이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고 합니다. 막내인 저는 아이가 없는 이웃집에 주었는데 제가 낮이고 밤이고 울기만 해 도저히 키울 수가 없어 도로 집으로 데리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 떠돌이 인생 서막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첫 번째 새아버지와 두 번째 새아버지 집을 거쳐 외갓집과 작은아버지집, 언니집, 오빠집을 두루 거치며 성장하게 됩니다.   어머니와 함께 있었던 것은 불과 몇 년뿐이었고 기억에도 없는 언니와 오빠 집에서의 생활은 어린 제게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술 문제가 있었고 결국은 술이 원인이 되어 병으로 돌아가셨으며, 첫 번째 새아버지 역시 괴팍스러운 알코올 중독자셨습니다. 작은아버지와 오빠 또한 술병을 끼고 사는 중독자였기에 어린 저는 술만 보면 무서워 도망을 치곤 했습니다.   그러다 방학 동안 칼국수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를 예뻐해 주던 언니가 낮에는 멀쩡하게 일을 잘하다가도 밤만 되면 술을 마시고 온갖 주사를 부리며 울면서 뛰쳐나가 자주 그 언니를 찾아다니느라 곤욕을 치르곤 했습니다. 언니는 제가 일했던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을 마시고 똑같은 행동을 했고 당시에는 그 모든 것이 저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저는 취업을 하였고 직장에서 남편을 만나 어린 나이에 결혼하였습니다. 제 술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은 둘째 아이를 낳고 나서입니다. 저는 술을 처음 마실 때부터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유난히 빨리 취했고 취하면 난폭해지고 온갖 주사를 부리다가 엉엉 울며 뛰쳐나갔으며 집에 가서도 혼자 술을 마시곤 했습니다. 제가 그토록 싫어했던 첫번째 새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아르바이트할 때 만난 언니의 진상 모습들이 고스란히 저에게서 나타났습니다. 해장술을 마시는데 걸린 시간도 불과 한 달도 채 안 걸렸습니다. 아이 젖을 물릴 때도 술이 필요했고 환청, 환각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술이 있어야 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큰아이의 손에는 책가방 대신 술병이 들려 있었고 그것을 제게 주어야만 학교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저는 이성 문제까지 남편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저의 술 문제가 드러나면서 남편의 폭력도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느끼기도 전에 저는 남편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졌고 아주 작은 녹음기에서 저와 이성의 통화 내용이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날로 저는 제 삶을 모두 다 포기했습니다. 아니 사람이기를 인간이기를 저 스스로가 모두 다 놓아 버리고 오직 술로 도피하며 중독의 늪에 빠졌습니다.   그러다 쓰러지면 남편은 시댁인 전주에 저를 실어다 놓곤 했습니다. 4대가 함께 사는 시댁이었기에 모든 가족의 눈이 저를 지켜보며 감시했고 어찌어찌 술 없이 몇 달을 버티다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서야 겨우 수원 집으로 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각서의 글씨가 채 마르기도 전에 저는 또다시 술을 마셨고 그럴수록 남편의 폭력 또한 심해졌습니다. 입술은 살점이 갈라져 열다섯 바늘을 꿰매야 했고 팔은 골절됐으며 툭하면 머리를 맞아 의식을 잃었지만 구걸해 술을 마시면 또 살아났습니다.   이를 악물고 젖 먹던 힘까지 다 동원해 한동안 술을 마시지 않고 직장도 다녔습니다. 모진 목숨 살고 싶어 안산에 있는 정신과도 다녔습니다. 그렇게 1년을 넘기고 또 6개월을 넘기자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그만 오라며 저를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기쁜 소식에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술을 마셨고 다시 예전의 저로 돌아갔습니다. 아니 상황은 훨씬 더 나빠져 죽음에 이를 정도의 블랙아웃 상황을 거쳐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후 저는 처음으로 저의 민낯을 보았고 알코올 중독의 병식을 알았습니다. 20년이 넘는 세월을 저는 술 앞에서 무너졌고 철저히 고립되어 온갖 멸시와 천대를 술병에 담으며 살아있는 제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술의 어두움이 저의 눈과 귀를 막았기 때문에 살려 달라는 구조 신호 역시 어느 곳에 해야될지 몰랐습니다. 저주 받은 운명이라 생각하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게 도움의 손길을 주신 선생님이 계십니다. 오랜 기간 술에 중독된 저는 4단계 발표를 하고 교만함이 생겼습니다. 저는 정직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이 저를 맡아주신 상담사 선생님과 함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술만 먹고 얌전히 잠만 잔 것이 아닙니다. 술과 짝꿍인 이성 문제가 있었고 일상생활의 기본인 손 씻기, 발 씻기, 세수와 샤워조차 하지 않는 지독한 게으름이 있었습니다. 대인관계는 말 그대로 4차원적인 수준이어서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몰랐습니다.   이 모든 것이 ‘술의 갈망’ 때문이란 것을 선생님의 가르침을 통해 알았게 됐습니다. 저는 눈물을 쏟으면서 하루에 한 가지씩 연습과 훈련을 하고 이를 점검 받으며 제 결점들을 제거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개방, 재활, A.A.모임을 다니며 10개월의 입원 생활을 마쳤습니다. 퇴원 후에는 1년 계획표를 작성하고 그대로 유지해 지난 5월에 단주 3년칩도 받았습니다. 저에게 있어 다사랑중앙병원은 친정집이고 제2의 인생이 시작된 곳입니다. 죽어야만 끝나는 병에서 이렇게 기적처럼 살았습니다.   교육시간에 배운 에니어그램과 동기강화 훈련, 12단계, 인지행동치료, 매일의 명상 등은 1단계를 인정하게 했으며 상담사 선생님의 지극한 사랑과 가르침은 두려움 없이 4단계를 다시 쓰게 했습니다. 제 나이 쉰 하고도 다섯입니다. 백세시대 인생의 절반을 살았습니다. 글 서두에 쓴 ‘생의 한 가운데에’ 서 있지만 요즘 저는 너무도 행복합니다. 술 없이 맑은 정신으로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매 순간 느끼며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남편은 저를 포기하고 싶었지만 죽어서 후회가 없도록 가장 좋은 알코올 전문병원에 입원이나 시켜보자 했다고 합니다. 그런 남편의 선택이 저를 살렸고 지금은 저보다 남편이 더 병원을 신뢰하며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저는 안타까운 죽음도 많이 봤습니다. 저와 친했던 병원의 언니, 동생, A.A.모임의 선생님들이 본인만의 방법으로 회복하려다가 잘못된 경우였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납니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어둠 속에서 알코올 중독이란 병으로 홀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 메시지가 조금이나마 힘과 희망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항상 저를 후원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는 원장님과 상담사 선생님, 단영초 선생님들의 사랑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

다사랑 2021-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