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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회복수기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치료받은 환자분들의 생생한 회복 경험담입니다.
알코올 중독 치료를 통해 새 삶의 희망을 찾으신 환자분들의 진솔한 회복 수기가
알코올중독으로 고통받고 있는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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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삶의 전환점, 새로 태어나다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우수상]   삶의 전환점, 새로 태어나다   황○○ 저는 2015년 8월부터 13개월간 이곳 다사랑중앙병원에서 개방, 재활 치료를 마치고 퇴원하여 이달 9월 30일이 되면 2년 차가 되는 회복자입니다. 제가 이곳 다사랑중앙병원의 치료와 A.A.모임을 통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살게됨에 감사하며 이 감사를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용기를 내어 이렇게 글을 써 봅니다.   다시 기억을 떠올려보면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해 제게 찾아온 마음과 생각의 변화는 너무 많아서 모두 기록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저 자신과 자녀, 가족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과 상황, 사건에 대해 생각하는 관점까지 많은 것들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아마 제 나이보다 훨씬 이전에 느끼고 깨달았을 것을 저는 이제야 느끼고 깨달아 행동하는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지난 3년간 다사랑중앙병원의 치료와 A.A. 모임의 치유를 통해 많은 것이 변한 삶 속에서 소중하게 여겨지는 저 혼자만 간직하기는 벅찬 경험 몇 가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가장 크고 소중히 여겨지는 것은 제 마음의 변화입니다. 저는 십여 년 전 편지 한 장 써 놓지 않고 집을 나간 남편으로 인해 원망과 분노로 매일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입원 초기만 해도 알코올 중독자가 된 것이 저 자신이 아니라 남편 때문이고, 제게는 잘못이 없는 이유가 있는 알코올 중독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 원내 재활을 하던 중 한 A.A. 그룹에서 공개 모임 때 스피커스를 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일주일 간 밤늦도록 스피커스 준비를 하던 과정에서 저는 제가 술 마시던 과거의 진실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제 과거의 모습과 마주 했을 때 스피커스 준비는 하지 못한 채 반성과 후회의 눈물로 밤을 새우고 말았습니다.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스피커스를 마친 후 저는 제가 한 이야기를 되짚어 보고 너무도 놀랐습니다. 남편에 대한 배신감, 원망, 분노로 술을 마셨다고 고백하고 다녔던 제가 눈물을 흘리며 남편을 보이지 않는 칼로 매일 찌르고 괴롭혔기 때문에 그 사람이 그렇게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알 수 없는 힘이 아니 내가 믿게 된 위대하신 힘이 저 자신의 과거를 진실로 돌아보았을 때 그동안 왜곡된 사실들을 바로 잡아 주셨음을 저는 믿습니다. 그러면서 남편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사라졌고 오히려 남편과 아이들을 생이별하게 만든 것을 용서받아야겠다는 마음마저 갖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원한이 사라지자 제 마음에 진정한 자유와 평안함이 찾아옴을 이 일을 계기로 느끼고 알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소중한 경험은 아이들이 변화한 것입니다. 술을 마실 때 저는 매우 강압적인 엄마였습니다. 혼자 키우다 보니 제가 무조건 잘해야 하고 아이들은 제 마음대로 움직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은 착하고 바르게 자라주었고 저는 제가 잘 키워 그런 것이라 알고 살았었습니다. 하지만 병원의 치료와 지속적인 모임 생활로 저는 스스로가 얼마나 나쁘고 부끄러운 엄마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퇴원 후, 두 아이에 대한 집착과 조정을 내려놓기 위해 힘들지만 노력하였습니다. 그 결과 아이들은 말이 많아지고 좋고 싫음을 저에게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딸아이도 그렇지만 아들은 더 많이 달라졌습니다. 퇴원 후 1년 정도를 준비하여 병원 입원 중 하지 못했던 9단계 보상을 하였습니다. 병원에서 9단계 발표 때 어렵게 참석한 딸아이에게는 보상 편지를 쓰고 읽어 주었는데 큰아이인 아들에게 쉽게 하지 못했던 것이 그만큼 더 큰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년 동안 큰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제가 주었던 상처들을 마주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단계를 실천했을 때의 효과를 경험했던 저는 안 할 수 없었습니다.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기억나는 대로 아이에게 주었던 상처를 고백하고 저의 성격적 결점들을 인정하며 용서를 빌자 아들은 울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 보고 처음 보는 아들의 눈물이었습니다. 한참을 울고 난 아들은 엄마를 다 이해하고 용서한다고 지금처럼만 살아달라고,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고, 엄마 걱정을 하지 않으니 자신의 미래와 꿈을 설계할 수 있다며 감사하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아이의 눈빛이 따뜻해졌고 어릴 때처럼 수다스럽고 따뜻함이 느껴지는 아들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다음으로 소중히 여겨지는 것은 지금의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에 대한 저의 마음입니다. 저는 병원에서 9단계 발표 때 쓰는 단주 서약에 저 자신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고 썼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때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그만큼 병원의 프로그램과 치료가 제 몸과 마음에 잘 적용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술을 마실 때 저는 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병원의 치료와 지속적인 모임 생활 덕분에 저 혼자서는 살 수 없고 단주도 할 수 없음을 배우고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삶도 소중함을 알게 되었기에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중독자인 저에게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조금은 덜 이기적이려고, 조금은 덜 유치하려고, 조금은 덜 예민하려고 노력하며 오늘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 외에도 크고 작게 감사할 일, 기쁜 일, 행복한 일은 수없이 많습니다. 마음이 바뀌니 예전이면 그냥 지나갈 일도 감사 또 감사하게 됩니다. 퇴원하여 지난 2년 동안 기쁘고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또 이웃 간에 새로운 상황이나 문제가 일어나면 감정의 조절이나 순간 대처하는 순발력이 없어 난감해하며 당황하기도 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그런 것들을 핑계 삼아 술을 마셨겠지만 이제는 술을 마시지 않는 알코올 중독자인 저는 모임에 나갑니다. 그곳에서 이런 순간들에 관해 이야기하면 먼저 경험하신 멤버들의 아낌없는 조언과 격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알코올 중독자인 제가 술을 마시지 않고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은 분명합니다. 어렵고 힘든 과정이겠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습니다. 이곳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치료를 통해 다져진 튼튼한 주춧돌이 제 내면에 있고 저와 함께 하는 A.A. 모임의 멤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혼자 술을 끊겠다고 오랜 시간을 고통으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술은 끊어지지 않았고 저와 아이들은 점점 병들어갔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의 치료를 통해 또 지속적인 모임 생활을 통해 저는 지금 술을 마시지 않고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술을 마실 때는 가슴에 담은 소망이 죄책감이 되고 연민이 되어 또다시 술을 마셨고 괴로워했던 것 같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고 있는 지금 제 가슴에 품은 소망은 현실이 되어 제 앞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팀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껴보셨는지요?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고 계시는지요? 이곳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은 것은 제 삶에 전환점이 되었고 저는 새로 태어났습니다. 눈물 나도록 진심으로 마음을 다하여 감사드립니다. 저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제 아이들의 삶까지도 밝고 환하게 바꾸어 주신 다사랑중앙병원의 치료진 선생님들과 A.A. 모임의 멤버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림으로만 끝나지 않도록 저는 앞으로 술 마시지 않는 알코올 중독자이면서 가정과 사회에서 제 역할을 다하는 회복자로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항상 격려와 응원으로 힘이 되어주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후원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사랑 2021-02-09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단주로 얻게 된 감사한 하루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   단주로 얻게 된 감사한 하루   조○○ 안녕하세요. 회복 중인 알코올 중독자입니다. 2014년 7월 말….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날짜는 도무지 기억에 없는…. 늘 마셔 왔지만 작정을 하고 술판이 시작되었던 그날. 매일 죽음 앞에 있었던 술만 마시던 그때에 저를 돌아봄에 있어 진실한 마음을 주시길 간곡히 청하며 이 글을 시작하려 합니다.   늦도록 술을 마실 생각으로 아이들을 그 가게 안 집으로 보내고 술을 마시러 다녔던 식당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신 다음날 아침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새벽녘 아파트로 돌아오던 그 길에서 이상했던 기분…. 그날은 아침 일찍 식당에 일하러 나가면서 유독 옷을 잘 입은 듯 날씬해진 것 같기도 하고, 집도 깨끗하다 여겼습니다. 그렇게 정신이 희미해져 가고 있음을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늘 그렇듯 식당은 아침 장사부터 정신없이 바빴고 뚝배기를 나르느라 상을 치우느라 계산을 하느라 저는 이리저리 동동거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몰래 마시는 해장술을 마시지 못한 탓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저를 눈엣가시처럼 여겼지만 잘 참고 넘겨오던 한 아줌마를 물고 늘어지며 미쳐가고 있던 저도 생각이 납니다. 지긋지긋하게 듣고 자란 욕이 싫어하지 않겠다 다짐해놓고 어디에서 그 욕이 쏟아져 나오는지 가슴은 터질 것 같고, 식당 안에 그 많은 사람이 저에게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세상 억울한 사람이다. 정신 차려야 한다’며 그렇게 그날 8년을 일한 직장에서 끝내 정신줄을 놓아 버렸습니다.   “그러다 죽는다. 일 그만둬라”고 하시던 엄마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벌이라 하기엔 저는 너무도 가혹하고 비참하다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곰소에서 마트 일을 하던 작은 오빠가 엄마에게 다급한 연락을 받고 왔었습니다. 오빠는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면 몸서리를 치고 엄마는 지금도 “오빠한테 잘해라. 너 살린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식당으로 가야 한다는 저를 오빠는 가까운 종합병원에 데려갔고 저는 뛰쳐나왔다는데 토막 기억뿐입니다. J병원으로 가던 중 저는 고속도로에서 차 문을 열려고 하고 창밖으로는 선명하게 보이던 식당에 오던 낯익은 얼굴들…. 정신이 들었다 나갔다를 반복하던 제 기억 속 J병원은 참담했습니다. 죽기 직전이었고 미치기 직전이었지요.   침대 사방으로 둘린 칸막이, 보고 또 보던 벽시계, 침대 옆에서 기계를 조작하는 의사인지 간호사인지 모르겠는 누군가, 쫓기는 기분, 죽도록 기다린 남편, ‘도망쳐야 한다, 침대 어디쯤 숨어야 하나, 의자에 앉아 있는 저 사람들은 누구인가, 옷을 벗어야 할 것 같은데’하는 생각들…. 술을 목구멍까지 차고 넘치도록 마시고 마신 끝은 이러했습니다. 그렇게 미쳐버리거나 그렇게 죽거나….   큰 굿을 하면 깨끗이 낫는다는 엄마의 말을 따라 저는 퇴원 후 굿을 했습니다. 그러나 술 생각뿐인 저에겐 소용이 없었습니다. 떨리는 손을 감추지 않아도 되고, 씹지 못한 지 오래였으나 삼겹살 오돌뼈를 술 한 잔에 오물오물 삼키는 일을 안 해도 되고, 죽을 자리인지 살 자리인지도 모른 채 그 일도 못 하게 될까 봐 전전긍긍 안 해도 되고, 한 잔만 하려고 그 식당에서 버티고 버티는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젠 그 식당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이제는 눈치 보지 않고 술 마셔도 된다. 술은 취하라고 마시는 거지. 실수도 하는 거야’ 하며 부어라 마셔라 술을 마셨습니다. 열어놓고 제대로 장사 한번 못해본 가게에서까지 저의 술에 미친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밥 한 톨 목구멍으로 넘길 수 없게 되었고 물도 마시질 못했습니다. 머리 한 번 감으려면 이리저리 매번 고꾸라지는 통에 씻지 못했고,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옷에 실수한 것은 손으로 꼽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겨우 집에 올라가면 현관 문턱을 넘지 못해 넘어지고 머리를 계속 방바닥에 부딪쳐 어린아이들이 이부자리를 펴놓았습니다.   그 이불에서 썩은 땀을 흘리며 한 잔만 더 마시겠다고 손목을 긋기도 하고 이리 살아 무엇 하나 죽어야 한다며 수면제를 모아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 잔만 더, 한 잔만 더 마시고 죽자는 생각 때문에 약을 털어 넣을 정신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밥을 어찌 먹는지, 학교에 가는지 오는지도 모르고 시켜 먹는 것은 싫다고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싶다는 아이들에게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하고 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그렇게 ‘내가 미쳤구나….’ 하고 미친 나를 누가 볼까 집안으로 숨어들고 커튼을 쳤습니다. 술에 애원하고 술에 의지하고 술에 매달리는 저는 술거지였습니다.   죽을 것만 같아 마셨는데 죽지 않고, 죽지 못해 마셨는데 죽을 거 같고…. 마셔도 죽겠고 마시지 않아도 죽을 것 같았던 2015년 8월 말, 그날도 술에 절어 베란다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있다 문득 ‘죽겠구나….’라는 생각과 ‘죽어도 곱게 죽지는 못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처럼 그렇게 죽을 것을 생각하니 나는 좀 깨끗하게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어눌해진 입을 꼭꼭 닫고 살던 제가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 병원 가야 할 거 같아”하고 말입니다.   병원 가기 전날,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저는 시내로 저녁을 먹으러 갔습니다. 돌아오는 길 저는 집에 가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결국 집 근처 무인 모텔에서 마지막 잔을 들었습니다. 씻고 싶었던 제 마음과 달리 씻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닥에 넘어져 일어날 수가 없었고 바닥이 돌고 돌았습니다. 아이들이 가까이 있는데 한 번 만져 보지도 못하고 이대로 죽겠구나 싶었습니다. 세상이 돌고 저도 돌았습니다. 서 있을 수도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고 머리를 들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고 제멋대로 휘어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산송장이 된 몸뚱이로 어린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에 갔습니다.   남편은 하던 일을 정리하러 갔고 아이들만 있는 집에는 시어머니가 오셨습니다. 저는 친정엄마와 병원에 있었습니다. 엄마가 해다 주신 미역국과 생채를 먹은 기억이 있지만 그 뒤로 찾아온 금단은 참담했습니다. 죽지 않았다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모습, 신경쓰여 미칠 것만 같았던 앞 침대 옆 우산…. 그러다 정신을 놓아버리고, 옷을 입히면 계속 벗으려 하고, 병원에 불을 내려 하고, 응급차 안에서는 난동을 부리고, 살아있는지 숨은 쉬고 있는 건지 고통스러운지 아픈지…. 저는 그때 아무것도 알 수 없었고, 할 수 없었고, 기억도 없습니다.   저는 응급차를 타고 남편은 그 뒤를 따라 영광으로 갔으나 입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광에서 김제로 가는 동안은 기억에 없고 의사 선생님을 만난 짧은 기억만 있습니다. K병원에서 며칠 만에 1인실에서 나왔다는데 그 며칠에 대한 기억 또한 없습니다. 입원한 지 한 달이 되어 갈 때쯤, 명절이 되어 외출하였고 남편과 있는 차 안에서 충전기 줄을 목에 감았습니다. 이미 미친 줄 모르고 미칠 것 같아 그 병원은 가지 않겠다며 통제할 수 없던 저를 남편은 친정에 데려갔습니다. 남편은 광주에 있는 알코올 전문병원을 알아보았지만 병실이 없었고 그렇게 알아본 곳이 의왕에 있는 다사랑중앙병원이었습니다.   온 식구가 저를 입원시키려 친정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동생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날, 어렴풋이 시골에 있는 아이들이 생각났고 보고 싶었습니다. 정확히 기억하는 2015년 9월 30일, 저는 지금도 도움을 받고 있는 의왕에 있는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사랑 많으신 그분께서 보내 주신 상담사 선생님을 만나며 술 마시지 않는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정신이 병든 사람이라는 것도, 제가 술 마시는 병에 걸렸다는 것도, 제가 알코올 중독자가 된 것이 부모의 탓도 그 누구의 탓도, 제 탓도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위대하신 그분의 도움 없이는 술 없는 하루를 살 수 없다는 것까지…. 술 앞에 저는 백전백패하는 한없이 무력한 사람임을 선생님의 가르침 속에서 받아들이고 인정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에게 집중하는 소중한 병원 생활이 하루하루 흘렀습니다.   2층에서 했던 온전한 생활시간, 8층에서 했던 회복하시는 선생님의 12단계 12전통, 1층에서 했던 상담사 선생님의 에니어그램, 원장님의 재발 예방 교육과 인지행동치료, 3층에서 했던 물리치료 그리고 8층의 운동실, 아침 명상시간, 한방 선생님의 침 요법, 산책시간, “경험담부터 읽어 보세요”라는 말을 듣고 펼쳐 보았던 빅북, 시골에서 엄마, 조카 그리고 남편과 함께했던 발표 시간, 처음 참석한 원내 A.A. 모임, 토요일 자조모임, A.A.멤버 선생님들의 메시지, 태어나 처음 배운 탁구까지…. 그렇게 제 회복의 여정은 시작되었습니다.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보고 가슴이 벅차고 뭉클해져 이내 볼을 타고 내리던 눈물을 기억합니다. 감정이 살아나고 다리에 힘이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입원 9개월을 넘기며 힘들었을 남편의 마음을 깨닫고, 술 없이 버스를 타고, 음식을 먹고, 이야기하고, 더위와 추위를 느낄 때쯤이었던 2016년 7월 11일 저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경제적인 문제로 퇴원을 하게 됐습니다. 상담사 선생님과 상담을 하며 남편에게 모임에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부산에 있는 A.A.모임을 다녀오고 다음 날인 월요일에 퇴원했습니다.   퇴원 후 짐만 집에 가져다 두고 저는 중곡동 모임으로 향했습니다. 술 마시는 병에 걸린 제가 술 마시지 않고 오늘 하루를 살 수 있는 곳은 모임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지금도 모임을 나가는 것에는 어떤 타협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술 없이 사람답게 하루하루 살 수 있는 힘이 모임 안에서 사랑 많으신 그분의 사랑을 닮아 가고자 하는 노력과 끊임없는 자기 성찰에서 비롯된다고 믿으며 살고 있습니다. 술 없이 사는 일상과 사람답게 사는 삶이 제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늘 상기하며 익숙하지 않은 많은 일들을 그분의 보살피심에 맡기고 그분만을 의지하며 그분의 힘으로 살게 해 주실 것을 믿고 또 믿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술 마시지 않는 것. 그 하나를 제 모든 일의 시작에 두고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앞을 향해 갑니다. 맑은 정신으로 미용 기술에 도전하였고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2017년도를 열심히 보내고 올해 초에는 이사를 했습니다. 아이들은 훌쩍 자라 지금은 중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어 아이들도 저도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술만 마시던 바보 엄마일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맑은 정신인 지금이 저는 행복합니다. 알코올 중독자인 저는 첫잔은 죽음에 이르는 독약과도 같음을 잊지 않으려 매일 모임에 갑니다. 멈출 수 없는 그 지옥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기에 매일 모임에 참석해 도움 받으며 살아갑니다.   몸과 정신이 쇠약할 정도로 미치도록 일만 하기도 죽는다고 해도 한없이 술을 마시기도 해보았고 미쳐 죽음의 문턱에 서 보기도 했습니다. 죽도록이 아닌 적절히 천천히 여유롭게 사는 삶을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아이들과 남편과 형제들과 사람들과 관계하고 소통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 많으신 그분이 함께 하시는 모임 안에서 술을 마셨던 때 저의 묵은 감정과 마시지 않는 오늘 하루의 감사에 대해 경험을 나누고 꿈과 희망을 나누며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상담사 선생님을 통해 살고 싶은 저를 만났고 A.A. 모임을 통해 사람답게 사는 법을 배우고 그 힘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갑니다.   딱 한 잔만을 고집하고 고집하다 술만 마시는 짐승처럼 살아 보았습니다. 술 없이 딱 오늘 하루만 살게 해주시기를 기도하고 기도하며 살고 있습니다. 사랑 많으신 그분에게 저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는 삶을 살게 해주시어 감사합니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저의 병을 기억하게 해주는 모임을 만나 살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아이들이 어떤 옷차림과 표정으로 학교에 가고 오는지 볼 수 있는 오늘 하루를 살게 해주심에 깊이 감사합니다. “엄마”하고 부르는 소리에 대답하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게 해주시어 감사합니다. 제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알게 해준 병원을 만나 치료받을 수 있게 하심에 감사하고, 살고 싶은 저를 만나게 해주심에 감사하고, A.A.모임이라는 갈 곳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어 감사합니다.   이 순간, 깨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술 마시지 않는 알코올 중독자입니다.저의 경험을 읽어 주신 모든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다사랑 2021-02-09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감사와 희망으로 바뀐 아침 햇살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   감사와 희망으로 바뀐 아침 햇살   송○○   창문 넘어 내리쬐는 햇살에 눈이 떠졌다. 방에 비치는 이 햇살이 누군가에게는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햇살이며 생명을 움트게 해야 하는 대지에는 꼭 필요할 수밖에 없지만 그때 내게는 술로 인해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느 날의 햇살일 뿐이었다. 눈을 뜸과 동시에 또다시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설렘보다는 술을 마시지 않음으로 인한 식은땀과 불안, 두려움이 나를 채웠다. 이런 두려움과 공포가 그렇게도 싫으면서도 난 술을 멈출 수가 없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가늠할 수도 없는 지경까지 갔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생각했다.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저 햇살을 받으며 집 앞에 있는 슈퍼로 달려가 소주 한 병을 들이켜야지. 그러면 이 두려움과 공포를 없앨 수 있을 거야!’ 마음이 분주해졌다. 그런데 그때 기억 저편에서 무엇인가 떠올랐다. ‘아! 이제 그 집도 나에게는 외상을 주지 않는다고 했지…. 나쁜 자식 그 까짓것 얼마나 한다고….’ 그러나 내게는 동전 한 닢도 없었다. 팔순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노령연금 20만 원도 찾아 어제 마지막으로 산 소주를 내 목구멍에 털어 넣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는 이러한 상황이 부끄럽기보다 당장의 소주 한 잔이 간절했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내게 소주 한 병을 준다면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으며 생명을 움트게 하는 햇살이 내게는 불안과 두려움을 갖게 만드는 햇살이었다.   악연도 이런 악연이 있나 싶은 술을 처음 만난 것은 아주 어렸을 때이다. 나는 서해안 작은 어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지금이라면 뉴스거리가 될 정도로 많았던 아버지의 형제는 12명이었다. 그래서 집에는 항상 많은 사람이 북적였다. 결혼하지 않은 삼촌들의 친구들이 언제나 집을 찾아왔고 꽃게 잡는 배를 운영하신 아버지의 배 선원들도 많이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바닷가여서 그런지 험한 뱃일을 해서 그런지 주변에 많은 사람이 항상 술에 취해 있었고 늘 술을 접하고 살았던 것 같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기름보일러나 전기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아서 항상 나무를 해 불을 지펴 밥을 했다. 지금보다 열악한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술은 지금이나 그때나 쉽게 살 수 있었다. 그 어린 나에게도 어른들은 마을 초입에 있는 양조장에 막걸리 심부름을 보냈다.   하루는 산을 다녀오신 할아버지가 산더미 같은 솔가지를 지게에 지고 저 멀리서 집으로 오고 계셨다. 할머니께선 가장 큰 사발에 막걸리를 담아 신 총각김치를 옆에 두고 할아버지가 도착하시기만 바라보고 계셨다. 굵은 땀방울을 뚝뚝 흘리시던 할아버지는 작대기로 지게를 받치고는 바로 막걸리 사발을 들이키셨다. 꿀꺽꿀꺽 목젖을 상하로 움직이며 그 많은 양을 단번에 마시고는 “캬~ 아주 시원하다! 아이고 살 것 같다!” 하시면서 막걸리 사발을 내려 놓으셨다. 6살이던 나는 할아버지의 시원함을 헤아릴 수 없었다. ‘왜 술을 할아버지가 저렇게 좋아하시고, 대체 어떤 맛이기에 시원하다고 하실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느 날 할머니가 내게 막걸리 심부름을 시키셨다. 아직 어렸던 나는 크나큰 양은주전자가 부담되었지만 할아버지를 위해 막걸리를 가득 담아 논두렁을 걸어오는 중이었다. 그때 할아버지의 시원함이 궁금했다. ‘대체 얼마나 시원하기에 우리 할아버지는 그 많은 양을 단번에 마실까?’ 주변을 살펴보니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 주전자 뚜껑에 막걸리를 담아 한 모금 마셔 봤다. 이 한 모금이 훗날 두려움과 불안으로 내게 엄습해 올 햇살인지도 모르고 막걸리를 목에 넘기기 시작했다. 시큼하고 시원하지도 않고 쓴맛도 있는 이것을 어른들은 왜 그리 시원하다고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내리쬐는 햇살을 머리에 쏘이며 난생처음 마신 막걸리 한 모금은 어렸던 나에게 흔히 말하는 알딸딸함을 가져다줬다. 이것이 내가 처음 술을 만난 기억이다.   동전 한 닢도 없는 내가 술을 먹을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과 불안은 더 심해졌으며 머리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방에는 전날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도 없는 술병들이 정신없이 굴러다녔다. 이제는 말하기도 보기도 무서운 막내아들을 피해 어머니는 간절히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께 막내아들을 살려 달라 기도하시러 기도원으로 피신 아닌 피신을 하셨다. 아파트 앞 슈퍼에서는 이제 외상도 안 된다고 하였기에 더 이상 그곳에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주인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들끓기 시작했다. 꼬마 녀석들이 놀이터에서 놀다 동전을 떨어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그곳도 여러 날 뒤졌지만 매번 허탕만 치고 돌아와 더욱 감정이 격해졌었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구급차 소리를 듣고 번쩍 떠올랐다. 한 사람의 생명을 안타까워한 것이 아니라 저 구급차를 타고 죽은 사람을 처리하는 장례식장에 가면 술을 먹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이성으로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술을 마셔야 한다는 생각에 오산 장례식장으로 무작정 걸었다. 나의 이성이나 나의 몰골이나 나의 상태는 술을 마셔야 한다는 뇌의 갈망에 사로잡혀 그 무엇도 가로막을 수 없었다.   다 낡아진 슬리퍼를 신고 반바지를 입고 무작정 장례식장으로 들어가 앉았다. 서울역 노숙자같이 허름한 모습이었던 나는 아무 연고도 없는 장례식장에 턱 하니 앉아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웅성대는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술을 마셔야 한다는 간절함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 같다.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 상주가 측은한 눈빛으로 육개장과 술을 내줬다. 마시고 가라고 그리고 부족하면 이야기하라는 소리에 연거푸 고개를 숙이고 바로 앉은 자리에서 소주 3병을 마셨다.   무슨 생각을 하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술이 이미 나의 머리를 잠식해 올바른 판단이나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술이 몸속으로 들어가니 그제야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졌고 지금 내가 어디에 와있는지 알게 되었다. 부끄러움이 들면서도 지금 내 수중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얼큰하게 마신 술기운을 빌려 상주에게 술 5병만 달라고 했다. 상주는 술이 거나하게 올라온 내가 소란을 피울까 걱정해서인지 소주 5병과 육개장을 담아주었다. 나는 크나큰 보물을 얻은 것처럼 그것을 들고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어느 누군가에게는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햇살이고 대지에는 생명을 움트게 하는 따사로운 햇살이지만 나에겐 그저 술을 마시고 술을 얻었다는 기분 좋은 햇살로만 여겨졌다. 검은 봉지에 소주 5병을 담아 승리에 취한 개선장군처럼 술에 취해 슬리퍼를 질질 끌며 집으로 돌아왔다. 분명 내일 아침도 오늘과 똑같은 햇살을 받을 테지만 나의 머리는 술로 인해 그것까지 생각하진 못하고 있었다.   술은 나의 의지로만 해결할 수 없다! 지속적인 약물과 교육 또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을 바꾸지 않는다면 절대 단주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2014년, 병원 관리병동에 입원해 지금까지 술로 인한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되짚어 보며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 술은 어렸을 적 보았던 할아버지가 힘든 노동 후 마실 때 느끼시던 시원함과 기분 좋음으로 기억돼 내 안에 내재해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남용하였고 그러다 보니 의존증이 되었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술을 마시지 않고 있는 이 순간도 입에 첫 잔을 대는 순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40년 넘게 내 안에 쌓여온 습관들은 절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조급함, 이기적인 생각, 중독적 사고, 나만 피해자라는 생각까지 술로 인해 나에게 남은 것 중 그 어떤 것도 좋은 것이 없었다. 나는 습관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조급한 성격으로 인해 5분을 넘지 않았던 식사 시간에는 의식적으로 숫자를 세며 식사를 하였고, 오른손잡이인 내가 왼손으로 양치질을 하며 의식적으로 왼손잡이가 되도록 노력하였다. 신호등에서는 일부러 신호가 한 번 더 바뀔 때까지 기다렸다 건넜다. 이러한 습관들은 절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가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처절했던 장례식장의 마지막 햇살을 상기했다.   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지키려고 하고 있다. 하루 세끼를 거르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으며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도록 노력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쌓인다!”라는 주치의 원장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성경 말씀이 또 불교를 믿는 사람에게는 법전이 진리인 것처럼 알코올 의존증을 가진 나에게는 A.A.가 진리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수년간 경험을 통해 A.A.를 떠나서는 절대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지키고 또 나라는 사람이 가졌던 습관을 버리려고 노력하다 보니 지금은 다사랑중앙병원의 환자가 아닌 가족이 되었다.   가끔 한 번씩 몸이 술을 기억해 진한 몸살을 앓듯이 술이 생각나지만 오늘 내리는 햇살이 불안과 두려움이 아닌 가을 냄새 물씬 풍기는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기에 감사함을 느낀다. 아무 연고도 없는 장례식장에 술을 마시러 갔던 기억은 지금의 나에게 끝없는 동기 부여가 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가는 계절을 느낄 수 있고 희망을 채워 나갈 수 있기에 따사로운 햇살에 아직도 익숙지 않은 왼손으로 양치를 하며 나를 다잡아 본다.   오늘의 ○○아! 출근해서 식사할 때 한 숟갈 한 숟갈 너의 나이만큼 씹어보자! (하 하 하) 시간이 오래 걸리겠는데 (히히) 그래도 좋다. 오늘 하루도 온전한 정신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기에! 또 꿈을 하나씩 이루어 가기에….  

다사랑 2021-02-09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이제야 당신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   이제야 당신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이○○저는 1959년 8월 아들 귀한 집안 4남매 중 장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위로 누님이 여섯 분 아래로 여동생이 한 분인지라 저에겐 고모님이 일곱 분이나 계셨습니다. 어림짐작해 봐도 제가 유년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상상하실 수 있을 겁니다. 모든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해가며 의존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고 그런 모든 의존적 사랑이 제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회복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대기업을 다니면서도 단돈 10만 원을 들고 결혼을 한답시고 서울로 향했습니다. 성인이 되었어도 결혼 문제를 포함한 모든 것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부모님께 의존했습니다. 1983년 추석, 어머니 지인의 소개로 아내를 만나게 되었으며 각자 울산과 서울에 거주했었기에 만남보다는 편지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편지를 받은 날 서로가 답장하게 되면 일주일에 두 번을 받고 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시간이 1년 반쯤 지날 무렵 아내가 임신하게 되어 양가 부모님들이 서둘러 1985년 5월 결혼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부모님이 울산에 신혼집을 얻어 주셨고 그해 10월 딸아이도 건강하게 출산했습니다. 저는 "단지 술을 좋아할 뿐이다"라는 말을 앞세워 더우면 덥다고 추우면 춥다고 기분이 좋으나 나쁘나 항상 술을 마시기 위한 핑계거리를 만들었습니다. 친구들을 너무나 좋아해서 그들 문제가 내 것인 것처럼 여겨 항상 가정보다 그들이 우선 순위였습니다.   술 문제가 심각하게 진행되던 40대가 넘어가면서 회사에 무단결근 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로 인해 닥쳐올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을 외면하며 “장남이니 부모님을 모시려면 어차피 서울로 올라갈 것”이라는 핑계를 대고 마치 당연한 것처럼 자신 있게 사표를 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서울에 올라와 일하면서도 가정을 돌보기보다는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셨습니다. 군대생활과 지방 직장생활로 인해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던 친구들을 만나니 너무나 반가워 한 잔 해야 한다는 무책임한 핑계를 대면서 말입니다. 무능력한 경제력까지 더해지자 아내와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술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고 쓸데없는 자존심에 언어폭력과 폭행을 서슴없이 행하면서 모든 것에 무기력해져만 갔습니다.경제적 불안감과 잠을 안 자며 술주정하는 저를 견디다 못한 아내는 이혼을 결심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아내가 절대로 제 곁을 떠날 수 없을 거라 굳게 믿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과 중학교 1학년인 딸이 있었기에 더욱 확신했습니다. 법원에서 소송에 관한 편지가 오고 나서야 저는 두려움에 떨어가며 이에 대한 답변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1년 반이란 시간을 보냈습니다.   결국 제 어머니의 강력한 제안에 아내가 아이들의 양육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어떻게 어린 아이들을 내팽개치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을 가느냐!’ 원망하며 때로는 자책도 해가면서 술에 더욱 의존해가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제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늘 아내를 원망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어머니는 ‘외로워서 그러는가 보다’ 하며 저를 안타깝게 지켜보셨던 것 같습니다.그 무렵 술에 더욱 지쳐가던 중 2번째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내 합의를 했지만 인사 사고에 뺑소니 혐의로 집행유예를 받았습니다. 이에 분노해 술의 양은 더욱 늘어만 갔고 보다 못한 가족들에 의해 2006년 처음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8년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이때는 아이들에 대한 걱정과 한숨으로 나날을 지내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뼈저린 고통만을 안겨준 술에서 해방되고 싶었습니다. 지긋지긋한 세상이지만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 없겠다는 생각에 누구보다도 단주의 열망을 갖고 병원의 모든 프로그램에 집중했습니다. 개방 9주 수료 후, 퇴원해 A.A.모임을 받아들이고 사랑과 관용의 원칙을 통해 회복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단주가 1년 반쯤 되었을 때 후원자 선생님의 제안으로 아이들 엄마에 대한 보상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어느 남자의 아내가 되어있는 여자에게 보상한다는 것이 또 다른 상처를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망설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기적 결점으로부터 자유로운 삶과 회복을 위해 보상을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편지로나마 과거의 잘못된 행동들을 반성하는 글을 썼습니다. 아이들 엄마에게 술을 마시며 고통을 주었던 내용을 하나하나 나열하면서 진심 어린 마음으로 용서를 청하는 장문의 편지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내가 아들과 연락을 하고 있었기에 아들 편으로 편지를 보내며 아이들 엄마의 행복을 기원했습니다.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메일을 열어 그 편지를 읽었는데 순간 저도 모르게 "미친놈. 이게 보상한답시고 쓴 편지냐"하며 자책했습니다. 단주 1년이 조금 넘었을 때, 그때는 아마 용서를 청하는 최고로 멋진 글이었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보니 겉으로 보이는 상처만 생각했지 마음속 깊은 곳의 상처까지 헤아릴 힘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 뱃속으로 낳은 어린 아이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피눈물 나는 고통과 들어주면 안 되는데 더 큰소리로 화를 낼까 두려움에 떨며 들어줘야만 했던 가슴 속 고통을 그때는 생각조차 못 했었나 봅니다.   딸의 결혼식 청첩장에 엄마의 이름이 없는 것을 보고 여동생을 통해 알아보니 중학생이었던 딸은 아빠의 술 문제가 너무나 심각하고 두려워 이혼을 찬성했지만 아빠가 회복하게 되면 네 식구가 다시 모여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었답니다. 그 때문에 엄마가 다른 남자에게 가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받은 적이 없었고 시간이 지난 지금 딸의 마음 속에는 엄마라는 존재가 남아있지 않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저는 술 때문에 천륜으로 이어진 모녀지간마저도 의절하게 만든 용서받지 못할 인간이었다는 생각에 딸에게 위로 한 마디 못하고 그저 흐르는 눈물만 닦으며 용서를 청했습니다.    10월이면 손주를 보게 되고 단주 10여 년이 되자 용기가 나 이렇게 다시 편지를 써봅니다.?당신께서 이 글을 읽어볼 수는 없겠지만 가슴으로 용서를 청해봅니다. 당신의 기도에 은총을 입어 중학교 다니던 딸아이는 결혼해 10월이면 손주를 보게 되었고, ?초등학생이었던 아들은 군대를 제대해 열심히 맡은 일을 충실히 하는 사회인이 되어있습니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는 지금 하루하루 행복합니다.   저는 3년여 전 모임 안에서 만난 회복 중인 선생님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같은 고통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도록 위대한 힘께서 주신 축복에 항상 감사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녀는 모임에 있는 여자 멤버 선생님들을 하나하나 경계하기 시작했고 이에 고통스러워하며 힘들어했습니다. 저는 “당신은 분명 성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나는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또한 회복해 나가야 하기에 그녀들을 여자가 아닌 함께하는 회복 멤버로만 볼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그녀에게 변화를 요구하며 때로는 큰소리까지 쳤습니다. 하지만 그런 제 뜻과 달리 상황은 더욱 심각해져만 갔고 결국 맥이 빠지고 실망이 커져 제 가슴속에는 불신만이 가득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모임의 협심자와 후원자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사랑하는 사람이 싫어하면 안 하면 되잖아?" 라는 단순한 말 한마디가 저에게 와 닿았습니다. ?내가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면 간단한 것을…. 그녀처럼 단주 3년쯤 일때의 저는 어떤 모습이었나 생각해보니 누군가의 경험담을 판단하면서 저런 것을 경험담이라고 하느냐 떠들며 큰소리쳤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제 말이 맞다며 아직 받아드릴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준비가 안 된 그녀에게 큰소리쳤던 제 모습은 술만 없었을 뿐이었지 과거 이기적 행동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녀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아직 없었던 저 자신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나의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과거 당신에게 했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행동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그런 행동에 합리화하고 정당성을 주장했겠지만 다행인 것은 협심자와 나누고 후원자와 나누면서 저의 결점을 보게 되었습니다. 결점 제거에 용의를 가지면서 한 걸음 성장할 기회를 주신 위대한 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하나하나 저의 결점들을 나누면서 위대한 힘께서도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면서 저는 단주 10년, 그녀는 단주 4년을 바라보며 모임과 프로그램 안에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기도할 것을 약속하며 조금이나마 진심 어린 마음으로? 용서를 청해봅니다. 감사합니다.고맙습니다.사랑합니다.  

다사랑 2021-02-09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술 없는 평온함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다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   술 없는 평온함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다   박○○   안녕하세요. 알코올 중독자 안양 박입니다. 저는 8남매 중 늦둥이 막내딸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19살이 되던 해,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그다음 해에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습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사랑도 사라졌습니다.   외로움에 살던 21살, 남편을 만났습니다. 사랑받기를 원했기에 쉽게 결혼 결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5남매 중 큰아들이자 장손이었기에 받는 사랑에 익숙했던 저는 결혼 후 사랑을 받기보단 큰며느리로서 베푸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사랑받길 원했던 저는 시댁으로 인한 모든 불만과 화, 분노를 안고 살아야 했고 결국 남편에 대한 분노가 점점 커져 남편이 하는 모든 일이 마음에 들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업을 시작했던 남편은 접대하거나 의논 없이 혼자서 결정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들어오는 남편이 미웠습니다. 그러다 둘째를 임신하면서부터 첫 술잔을 잡게 되었습니다. 술을 잘 못했기 때문에 첫 잔은 약한 칵테일로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밤마다 남편을 기다리며 한 잔이 두 잔으로 두 잔이 한 병으로 늘어났습니다. 결국 술을 가리지 않고 마시며 매일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저의 원한과 분노는 식을 줄 몰랐습니다.   이혼을 결정한 37살, 저의 술 문제는 심각했습니다. 매일 한 병씩 마셨던 술은 어느새 2박 3일로 먹어야 했습니다. 그로 인해 손 떨림이 오고 갈망감이 심해진 것은 물론 환청과 환시까지 발생해 이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려 더 술을 찾게 되었습니다.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라 장취가 되어야만 잠깐씩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몸에 나타나는 이런 증상들을 소주 한 병으로 진정시킬 수 있었기에 날마다 술로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일도 안 하고 수중에 있는 돈으로 술을 마시며 하루하루를 살아갔습니다.   매일 술을 마시다 보니 통장 잔고가 0원이 되었습니다. 술을 마실 수 없다는 생각에 친정 언니에게 당뇨라며 아프다고 거짓말해 돈을 빌리려 했습니다. 언니는 택시를 타고 안양으로 오라며 함께 병원에 가자고 말했습니다. 저는 돈만 빌리면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에 차비도 없이 택시를 타고 언니를 만나기 위해 안양으로 갔습니다. 언니는 저를 내과로 데리고 갔습니다. 당뇨가 거짓말이라는 것이 탄로 났고 알코올 중독이라는 진단이 내려져 의사 선생님께서 알코올 전문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언니는 다음날 저를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첫 입원을 했던 2006년 7월, 저는 너무 화가 났습니다. 9주 동안 프로그램과 치료를 받아야 퇴원할 수 있다는 말에 더욱 화가 나 프로그램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오히려 빨리 나가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아 저는 병원 생활을 잘하는 척하며 1단계 발표 후 가족에게 퇴원을 요구했습니다.   퇴원 후, 큰언니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지만 저는 단주 모임을 무시하며 한 달도 안 되어서 다시 술병을 잡았습니다. 큰언니는 “미쳤구나!”라며 저를 때리셨습니다. 때리는 것에 참지 못한 저는 엄마 같은 큰언니에게 “네가 뭔데!”라며 화를 내곤 큰언니 집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렇게 술친구들이 있는 부천으로 갔고 큰언니에게 맞은 것과 A.A.단주 모임에서 회복하라던 말들이 떠올라 분노에 술을 마시고 또 마셨습니다. 그렇게 마시다 보니 얼마 후 환청과 환시가 다시 나타났고 이를 잊으려 술에 의지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더욱 미친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술에 취해 들리는 환청에 알코올 중독으로 사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자는 생각이 들어 친구 집에 있던 회칼로 제 배를 찌르고 쓰러졌습니다. 눈을 떠보니 몸이 묶인 채로 가슴부터 배꼽까지 붕대로 감겨 있었고 몸부림을 쳐도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모든 내장 부위가 망가져 쓸개마저 떼어내는 대수술을 받았고 일주일 만에 깨어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제가 눈을 뜬 것도 대수술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가슴 가운데부터 배꼽을 지나서까지 33바늘이 꿰매져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지만 저는 더 화를 내며 “죽게 놔두지!”라고 소릴 지르고 거세게 몸부림쳤습니다. 그럴수록 술에 미쳤던 저는 술이 마시고 싶었습니다.   정말 그런 순간에도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에 교활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병원 측에 나라는 사람은 돈도 아무것도 없어서 입원을 못 한다고 설득하며 저렴한 병원으로 이동하겠다고 부탁했습니다. 교통사고 환자들이 많은 병원에 입원해 링거와 피고름 주머니를 차고도 몰래 나가 소주를 사서 마셨습니다. 한 달을 미친 정신으로 병원 생활을 했고 퇴원을 하는 순간에는 더 자유롭게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기쁨에 아픈 줄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또다시 술의 늪에 빠졌습니다.   2009년 8월, 환청과 환시는 더 심해졌고 두고만 볼 수 없던 친정 언니는 저를 다사랑중앙병원에 재입원시키기로 했습니다. 만취 상태로 병원에 입원했던 저는 술이 깼지만 3주 후부터 전화 통화가 가능하단 말에 절망했습니다. 그렇게 3주 후, 술에 대한 갈망감 때문에 언니와 딸에게 퇴원을 요구했고 면회를 와달라고 했습니다. 면회를 온 딸은 “엄마, 여기서 술을 끊고 나오든지 아니면 그냥 여기서 죽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놀랐습니다.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고 화가 났고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이었습니다.   다음 날, 제 바로 위인 언니가 면회를 왔습니다. 언니는 8층 로비에서 통곡하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입원했을 때 9주 과정을 제대로 마치고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했으면 하나뿐인 내 동생이 또 이 병원에 안 왔을 텐데···. 언니가 미안해···. 이번에는 돈이 얼마가 들던지 9주 과정 끝까지 마치고 상담사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할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언니의 말에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내가 언니에게 사랑받는 동생이었구나···. 그동안 형제들에게 사랑받는 동생이 아닌 줄 착각하고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딸의 한 마디와 언니의 한 마디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 몇 날 며칠을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흡연실에서 애꿎은 담배만 피우다 문득 ‘한번 끊어볼까? A.A.후원자와 상담사 선생님과 함께 해 볼까? 100일 작전해보고 안되면 그때 다시 마시면 되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이후 병원 프로그램에 집중하며 상담사 선생님과 많은 상담을 통해 4개월간 병원 생활을 하며 9주 프로그램을 모두 마쳤습니다.   그리고 퇴원 무렵, 다짐했습니다. ‘1단계에서 배운 듯 알코올에 무력했다는 것을 시인하고 간절한 기도로 회개하면서 첫 잔을 피하고 A.A.모임 안에서 미친 정신이 아닌 본정신으로 살아 보리라’ 이렇게 다짐 또 다짐하며 100일이라는 시간을 보냈고 그동안 제가 개차반처럼 살며 가정을 풍비박산 내 아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던 것에 대해 반성했습니다. A.A.모임에 나가 습관과 행동, 생각을 바꾸고 저의 결점을 찾아 이를 인정하며 한 단계씩 실행하다 보니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화나 분노가 조금씩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변해가는 제 모습에 언니와 아이들이 저를 바라보는 눈빛과 행동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제야 ‘아! 내가 변해야 하는구나! 무슨 일이든 술로 도망가지 말고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병원 프로그램과 A.A.모임의 단계들을 적용하며 모임 안에서 기적 같은 회복을 경험하게 되면서 술 없이 첫 잔을 하는 나, 해결책을 찾는 나, 직장을 가질 수 있는 나로 변화했습니다. 더 이상 화내지 않고 분노하지 않는 하루하루가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2년 단주 기념일, 저는 딸에게 분노를 토해내며 딸의 잘못했다는 말이 듣고 싶어 교활하게 술을 이용해 겁을 주려다 한 잔을 마시게 됐고 그렇게 단주가 무너졌습니다. 하루 마신 술 때문에 2년 동안 힘겹게 살았던 시간이 무의미해졌고 저는 A.A.모임 멤버 선생님들의 메시지를 위로 삼아 12단계 프로그램을 다시 되새겼습니다. 정말 절실히 엎드려 1단계인 알코올 앞에 무력함을 인정했습니다.   술 없는 평온함을 경험한 저는 자신을 점검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평온함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고 아이들의 변화되는 모습을 보며 서로 사랑할 줄 아는 가정으로 변화된 삶에도 감사합니다. 알코올 치료와 12단계가 단주의 길이라 생각하며 다사랑중앙병원의 치료진 선생님들과 A.A.모임 멤버들께 감사합니다. 알코올 중독 안양 박은 단주뿐 아니라 온전한 삶을 위해 기도하는 자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사랑 2021-02-09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깨달음 뒤 찾아온 행운 가득한 인생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   깨달음 뒤 찾아온 행운 가득한 인생   홍○○   안녕하세요? 때는 2014년 11월 24일 일요일 점심쯤, 딸 둘이 찾아와 밥을 사준다며 차에 태워 데려간 곳이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다사랑중앙병원이었습니다. 애들이 날 입원시킨다더니 그날이 오늘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이른 새벽부터 해장술로 소주 2병을 먹었습니다. 그게 나의 마지막 술이었습니다. 나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보호사 두 명과 함께 병실로 올라갔습니다.   가슴 속에는 무슨 놈의 분노와 설움이 가득 차 있던지 자식들도 미웠습니다. 그렇게 눈물로 병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뇌는 이미 다 망가져 글씨는 지렁이 기어가는 것처럼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쓰고, 교육을 들어도 다음날이면 다 잊어버리고···. 참 한심한 병원 생활이었습니다.   검사 후 병원에서 내린 병명은 간경화와 알코올성 간질이었습니다. 어느 날 점심 배식을 받으려고 병동에 줄을 서 있다 저도 모르게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병원은 난리가 났었습니다. 환우들은 그런 저의 발과 다리를 주물러줬고 보호사 선생님은 제가 발작을 하니 응급처치를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깨어났습니다. 저는 다사랑중앙병원에 오기 전인 2013년, 뇌졸중으로 큰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약 두 달 정도 재활치료를 받고 나서야 간신히 지팡이에 의존해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남편은 위암 말기라 암 센터에서 항암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퇴원 후 저는 4~5개월 동안 열심히 운동했고 덕분에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몸이 조금씩 돌아오니 뇌에서 또다시 술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캔 맥주 하나 정도야!’ 우습게 생각하고 마시기 시작한 술이 점점 무한정 들어가더니 결국엔 멈출 수 없는 중독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2014년 7월, 남편은 암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몇 개월 동안 술만 마시며 살던 저를 걱정한 딸들은 여기저기 병원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곤 그해 11월, 다사랑중앙병원에 저를 입원시켰습니다. 저는 딸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았지만 그때는 너무 서운한 마음이 커 가슴 한구석에 딸들에 대한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갔습니다. 그러다 교육을 받으며 정신이 조금씩 안정되자 제가 많이 병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일 먼저 가슴에 와 닿은 것은 알코올이 대물림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9살 때 저는 아버지가 피를 토하시며 돌아가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래. 맞아! 알코올 중독은 무서운 병이야. 나는 우리 딸들한테 이런 병은 대물림하지 말아야지’ 하며 제 자신과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교육도 듣고 A.A.단주모임도 다리품을 팔아가며 열정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때로는 힘도 많이 들었습니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왼쪽 몸에 자주 마비가 오는 등 많이 안 좋았기 때문에 저녁이면 진통제를 맞곤 했습니다. 그래서 많이 아플 때는 일요일엔 좀 쉬어야지하고 생각했지만 선생님께 게으름 피운다고 참으로 많이 혼났습니다. 병원 생활이 어느덧 2년이 지나고 퇴원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퇴원을 하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저녁 모임이 끝나고 병실로 들어왔더니 원무과 직원이 저를 불러 병원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충격을 받았으며 같이 있는 동료들에게도 창피했습니다. 저는 딸이 넷이나 있는 데다 딸들이 입원시켰으니 당연히 병원비는 냈으리라 생각했고 그렇게 저는 병원비는 신경도 안 쓰고 모임에만 열심히 다녔던 것이었습니다.   원무과에서 병원비에 대해 전해 들은 후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더불어 퇴원을 해도 제가 머무를 곳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퇴원하기가 두려웠습니다. 저 자신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대로 퇴원해서 딸들과 살게 된다면 갈등이 많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상담사 선생님과 상담을 하게 되었고 선생님은 제게 한 가지 해결책을 제안하셨습니다. 그 제안은 아직 단주의 힘이 없으니 여성 공동체 생활을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단주의 고비는 3년이니 그곳에서 힘을 더 보강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단주하려면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이기적인 사람이 돼야 한다. 나만 생각하자’ 그렇게 친정에 찾아갔습니다. 교육과 훈련을 통해 얻게 된 2년간의 소중한 단주 시간을 헛되게 만들기 아까워 무조건 매달렸습니다. 도와달라고, 살고 싶다고, 열심히 하겠다고···. 친정 오빠는 저의 진심을 알았는지 병원비를 해결해주었습니다.   퇴원과 동시에 H여성공동체로 입소했습니다. 환우 여섯 명과 스텝들···. 저에게는 그냥 가정집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왠지 낯설고 어색했습니다. 병원과 달리 밥도 해 먹어야 하고, 마음대로 눕거나 쉬지 못하고, 자유도 없고, A.A.도 못 가고···. 뿐만 아니라 ‘그래도 나는 나라에서 손꼽는 다사랑중앙병원에서 교육받았기 때문에 더 아는 게 많아. 그리고 2년 동안 단주도 했는데···. 이 사람들은 나의 상대가 안 돼!’라는 교만한 생각에 빠져 그곳 동료들과 친해지기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3개월 동안은 많은 것이 혼란스러웠고 ‘정말 이 방법밖에 없는 걸까···.’하는 고민도 했습니다.   그러다 몹시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상담사 선생님께서 저를 보러 시설에 오셨습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저는 선생님을 보자마자 껴안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곤 선생님 원망 많이 했다고 왜 나를 이런 곳에 보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발을 묶어놨냐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선생님은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둘러주시면서 제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홍쌤은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위로해주셨습니다. 선생님이 다녀가신 뒤 저는 다 내려놓고 자신을 하나씩 깨달아가며 교만함도 버렸습니다. 그렇게 동료들과 원만하게 잘 지내며 그곳 생활과 프로그램에도 열심히 임했더니 하루하루 변화되는 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날 선생님께선 저에게 큰 힘과 사랑을 주고 가셨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공동체 식구들에게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공동체 식구들을 무시하고 그들에게 이해받으려만 했지 그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배려심도 없었습니다. 저 혼자서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권위적으로 대하고, 자존심 상할까 우겨대고, 상대방을 내 잣대에 맞춰 바꾸려 했습니다. 그 사람들도 저처럼 병든 사람들인데···. 시간이 흐른 지금에야 깨달았습니다. 제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또 더불어 살아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공동체 생활도 1년이 되었습니다. 원장님께서는 많이 변화된 제 모습을 인정해주셨습니다. 원래 계약 기간은 2년인데 원장님께서는 이제부터 홀로서기를 시작해서 잘 살라며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임대주택을 힘들게 알아봐 저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셨습니다.   저에게는 늘 행운이 따르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자유의 몸으로 혼자 살면서 일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A.A.단주모임의 끈을 놓지 않고 후원자 선생님과 병원 메시지도 다니며 사회에 복귀한 지 1년이 다 되어갑니다.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된 것은 제 주위에는 감사한 분들도 많고 감사해야 할 일도 많다는 것입니다.   제일 감사한 것은 저를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시켜 변화된 사람을 만들어준 가족과 상담사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상담사 선생님은 사랑으로 저를 아껴주시고 제 삶을 다시 살아가게끔 큰 용기를 주셨습니다. 상담사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저는 몇 번이고 재발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평생 제 은인이시며 위대한 신이십니다.   이제는 새롭게 얻은 제 인생을 술과 바꾸지 않겠습니다. 끝으로 저 자신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다사랑 2021-02-09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다사랑에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다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   다사랑에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다   김○○   안녕하십니까? 저는 개인택시 기사인 13년 7개월 차 알코올 회복자입니다. 저에게는 사랑하는 아내, 독일에 취업해 출가한 아들 내외와 손녀가 있습니다. IMF 당시 사업 실패로 모든 것을 잃고 술로 세월을 보내다 알코올 의존증 환자가 되었습니다. 가정과 건강을 모두 잃은 절망의 시기에 우연한 기회로 다사랑중앙병원을 알게 되었고 아내와 아들의 도움을 받아 강제입원 후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입원 당시 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병원의 치료와 교육을 성실하게 받았습니다. 병원에서 하는 모든 과정에 열심히 임하며 내 인생의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게 되었고 도와주신 치료진에게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개방병동 생활을 하고 퇴원 후,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때 아내가 택시 운전을 권유했고 이후 택시기사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퇴원과 동시에 집 근처 택시회사에 취업해 3년 동안 많은 사람과 좋은 만남을 이어가며 무사고 3년을 유지했습니다. 그 후 개인택시를 취득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 아내의 도움으로 개인택시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택시 영업 도중에도 항상 알코올 의존증 환자에게 어떠한 도움이라도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KBS 아침마당에 출연할 기회가 생겨 방송에 나가 알코올의 심각성과 치료에 임하면 반드시 회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아들의 권유로 D교회에서 운영하는 아버지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덕분에 생전 처음 제가 살아온 삶을 반성했으며 앞으로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많이 배우며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특히 아버지 학교 형제님들의 따뜻한 정과 격려 속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친구들과 만남에 있어서도 술 대신 물을 마시며 대화를 하곤 합니다. 다사랑중앙병원에서 배운 대로 실천하면서 취미 생활로 텃밭을 가꾸며 자연과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지역 주민 센터에서 운영하는 댄스 동아리와 탁구 모임에도 가입해 건강을 관리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에서 다시 태어난 저이기에 병원의 끈을 절대 놓지 않고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의 무궁한 발전과 환우 여러분의 건강한 회복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회복 중인 지금 어느덧 환갑을 맞이해 아내와 함께 일본 여행을 떠나는 현해탄 해상에서 적어봅니다.    

다사랑 2021-02-09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나도 할 수 있다!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   나도 할 수 있다!   박○○   안녕하세요. 저는 알코올중독에서 회복하고 있는 화성 박입니다. 결혼은 했지만 1남 2녀를 두고 이혼하였고 지금은 아이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 술로 인해 물거품이 되어버린 나의 노력 -   저는 술 담배를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에게 배웠습니다. 종합고등학교 실업계를 졸업했는데 과목별 자격증을 따지 못해 회사에 취업하지 못하고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술을 마신 것 같습니다. 농사일이 체력적으로 매우 힘들어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소주, 맥주, 막걸리 등 여러 가지 술을 온종일 대중없이 마셨습니다.   농사일하던 저에게 작은아버지가 기술을 알려주겠다고 하며 자신이 경영하는 공장에 취업을 시켜주었습니다. 작은아버지는 저에게 기술을 전해주고자 열심히 가르쳐주셨고, 저 또한 감사한 마음에 열심히 일을 배우고 적응하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술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공장 직원들과 함께 회식하게 되었는데 술에 취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을 욕하고 나무라는 실수를 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싸움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다음 날 작은아버지께 매를 맞고 공장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날 이후 농사일을 하면서 주변 지인들의 도움으로 몇 차례 일을 시작하였지만 술로 인해 오래 유지하지 못 했습니다. 당시 이러한 이유가 술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을 원망만 하며 지냈습니다.   - 경운기 사고와 건강이상 -   계속 저를 만류하거나 꾸짖는 가족들에게 당시에만 잘못했다고 말하며 상황을 모면해왔으며, 몸과 마음은 피폐해져만 갔습니다. 술 때문에 아들과 딸의 졸업식에 가지 못한 것이 가장 미안하고 한스럽습니다. 정신을 못 차리고 술에 취해 경운기를 타고 오다 소나무밭에 경운기를 들이박는 사고도 냈었고, 술 취한 채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나 쇄골뼈가 부러져 전치 4주의 입원 치료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김치공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손가락에 마비가 오고, 손이 부들부들 떨려 일을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팀장님에게 증상에 대해 얘기했더니 한 달 정도 쉬는 것이 어떻겠냐 하여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전 쉬지 않고 밤낮으로 술만 마셨고, 입맛이 없어 술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아니 먹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워낙 마른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20kg의 살이 더 빠진 상황이었고 부모님은 살아있는 해골을 보는 것 같다며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 회복의 계기, 입원생활 -   2016년 9월, 누님이 오랜만에 집에 왔습니다. 어머니와 조용히 이야기하더니 저에게 병원에 가보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싫다고 화를 냈고 가족은 상담만 받자며 저를 설득하였습니다. 상담만 받고 오기로 하고 차를 탔습니다. 도착한 곳은 의왕시에 있는 다사랑중앙병원이었습니다. 상담하니 원장님께서 입원이 불가피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울먹이며 입원하기 싫다고 애원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입원 후에도 저는 계속해서 집에 보내 달라며 졸랐습니다. 스스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다. 몸이 아파서 온 거다”라며 지금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말도 안 되는 핑계들로 한 달 정도를 계속 울며 퇴원만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단호히 열심히 병동생활을 하고 관리병동에서 개방병동까지의 절차를 수료해야 퇴원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너무나 외롭고 창피하고 죽고 싶었습니다. ‘내가 왜 이런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는가….’하며 처음 병원 입원을 권했던 누님이 원망스러웠고 가족들이 미웠습니다. 그렇게 외로운 병원 생활을 하는 와중에 한 환우를 만났습니다. “서로 외로운데 같이 지내요. 나도 이제 열심히 치료받고 회복의 길을 갈 건데 같이 해 봅시다”라며 저에게 먼저 다가와 주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나는 알코올 중독자가 아닌데 이 사람이 나한테 왜 이러나…. 너나 하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라는 생각을 했고 열심히 피해 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는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복도를 지나갈 때, 마주칠 때마다 저를 설득했습니다. “같이 개방병동도 가고 재활병동도 가고 퇴원해서 가족들이랑 살아봅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같이 퇴원을 해보자는 말에 마음이 조금씩 움직였습니다. 이것이 회복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가족들에게 교육에 열심히 참석하겠다고 하였더니 기뻐하며 면회를 와서 저를 응원해주었습니다. 가족들이 응원해주는 모습에 많은 죄책감과 미안함,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저는 ‘가만히 있기보다 무엇인가 해야겠다!’라는 결심을 하였고, 담당 상담사 선생님과 주치의 선생님의 교육에 참석했습니다. 교육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고, 단계 발표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저는 인정했습니다. 나는 알코올 중독자이다. 이것을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얼마나 가족들을 괴롭게 하고 아프게 했는지 생각하면 정말 미안하고 속상합니다. 1단계 발표가 있던 날 어머니, 아버지, 누나, 매형, 딸 등 온 가족이 참석했습니다. 가장 많은 가족들이 참석한 발표 자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가족들은 저의 발표를 들으며 감탄사를 내뱉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가족들의 눈물을 보며, 저도 마음속으로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후 저는 모든 수업에 열중하였고 12단계를 필사하면서 다음 단계 발표를 준비해 개방교육을 수료하였습니다.   - 퇴원 그리고 단주 -   2017년 1월 퇴원 이후 저는 지금까지 계속 단주를 하고 있습니다. 버스도 갈아타야 하고 배차 시간도 길고 두 시간씩 걸리는 먼 거리지만 일주일에 두 번 병원 외래치료와 자조모임인 PSD(Post Stop Drinking. 단주 후에) 모임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또한 퇴원 이후 화성시 중독관리통합지원센터에 연계된 회원으로 등록해 일주일에 한 번씩 담당 선생님들을 만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함께 단주에 대해 이야기하고 공부하고 격려 받는 것이 단주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마른주정을 겪고 있지만 단주를 유지하며 잘 견디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신념과 자신감을 가지고 잘못했던 것을 내려놓으며 모든 것을 바꾸어 생활하신다면 술에 무너지지 않고 회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다사랑 2021-02-09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어둠과 빛 그 경계에서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   어둠과 빛 그 경계에서   강○○   모든 것이 생기를 잃어 회색빛으로 변한 삶, 나의 날카로운 가시로 작은 희망마저도 찢겨버린 가족, 너덜너덜해진 몸과 갈 길을 잃어버린 공허한 마음까지…. 술은 나의 그림자를 움켜쥐고 곁에 있는 모든 이들의 영혼을 검게 물들였고, 내가 진정 바라던 모든 것을 짓밟아 뭉개어 그 이상을 앗아갔다.   나는 원하지 않았다. 이런 삶을 원한 적 없었다. 그럼에도 그 마음이 거짓인 것처럼 나는 술에 취해 아버지와 어머니께 폭언했고, 인사불성이 되어 어머니의 배를 발로 찼으며, 수차례 자살 시도를 했다. 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말을 하기엔 너무나 비참하고 큰 상처들을 주위 사람들과 나 자신에게 주었다.   술을 접한 지 1여 년만인 18살부터 시작된 중독과 26살부터 시작된 입원 치료 그리고 지난 9년간 10여 차례의 재발과 회복을 거치는 입·퇴원의 반복까지…. 이것이 술이 나에게 안겨준 시간이자 삶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누군가 내게 ‘스스로 술잔을 들고 마셨기에 스스로 중독을 선택한 것’이라 할 땐 의식적인 선택만은 아니라는 마음은 억울함으로 울렁거림과 함께 비참함에 눈물이 흘렀다. 누군가 ‘너의 잘못만은 아니야’라며 위로할 때엔 흐르는 눈물 뒤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준 상처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다. 숙명과도 같이 삶에 다가온 중독은 내겐 모순과도 같았다.   이런 나도 사랑받는 맏아들이자 장손으로 태어나 많은 기대 속에 자랐다. 성실함으로 묵묵히 나아가던 아버지 그리고 집안일과 육아를 완벽히 해내시는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왔다. 그럼에도 나의 어릴 적 기억은 너무나도 아팠던 교육적 체벌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학대와도 같았던 순간들로 채워져 행복한 순간들은 다 지워져 버린 듯 잘 기억나지 않았다.   우리 집 벨을 누르는 것이 두려웠던 초등학교 시절, 그 어린아이가 무엇을 그리도 잘못했던지 머리채가 잡혀 안방까지 끌려가 내팽개쳐진 채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무 빗자루로 맞기 시작했고 나의 기억은 그것을 구타라 기억하고 있었다. 맞으면서 자연스레 방 한구석까지 몰리면 벽을 보고서서 엉덩이부터 종아리까지 피가 배어날 때까지 맞아야 했고,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들고 시계를 바라보며 30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렇게 나의 벌이 끝나던 시절이었다. 아이가 잘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부모의 양육방식이라기엔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고 나는 어머니의 인정을 받고자 했다. 뭐든지 잘하고 싶었다.   하지만 중학교 과학경시 전국대회 진출이 좌절된 뒤 나는 완전히 180도 달라진 삶을 살기 시작했다. 비교적 얌전하고 내향적이던 나는 대담하고 외향적인 성향으로 변했고 당시 일진 친구들에게 담배와 술을 배웠다. 그렇게 1년이 지나 한 생명이 나로 인해 세상의 빛을 마주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게 됐다고 여기던 사건 뒤, 그에 대한 깊은 죄책감과 고통과 함께 알코올 중독이라는 지독한 삶이 시작되었다. 수차례의 자살 시도와 가출, 폭행 그리고 그 뒤에 감추어진 깊은 죄책감….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라 부정하며 술만 마시는 그림자의 시간으로 채워졌고 그것이 내 고등학교 시절이 되었다. 나는 집에 없었어야 했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가 되었다.   “대체 날 왜 알코올 중독자로 낳은 거야! 왜 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거야!” “네가 날 버린다고? 네가 날 버리기 전에 내가 널 먼저 버릴 거야!”   술에 취해 나도 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 눌러두었던 날카로운 말들을 부모님께 내뱉던 날, 나는 죽어야 했다. 하지만 신은 내게 죽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26살 2월에 있었던 그 일 뒤로 신은 내가 넘어질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웠다. 한 달 반 가량을 밤낮으로 마신 술로 인해 방 안에서 죽어가던 내게 비추어진 십자가로부터의 환한 그 빛은 온몸이 굳어져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던 그때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 바들바들 떨며 식은땀에 축축한 이불 위에 썩어가던 내 몸을 비추었다. 눈물이 흘렀다.   ‘드디어…. 드디어 제가 죽을 수 있는 건가요?’   나의 삶을 모두 내려놓던 그 순간 어둠 속에 갑자기 빛이 비치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조그마한 십자가상으로부터 내게 환한 빛이 비치었고, 심장이 조여 왔고 눈물이 흘렀다.   ‘이런 쓰레기 같은 제게….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도 살 수 있다고….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시는 겁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존재라 여기던 내게, 중독은 빛과 함께 다시 돌아와 살아가라 했다. 술을 마시고픈 충동적 욕구에 다시 무릎 꿇어 어둠으로 걸어 들어가 엎어져도 신은 다시 빛과 함께 다가와 손을 잡았다. 신은 내게 어둠과 빛의 경계에서 끊임없는 선택을 요구했다.   ‘고통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축복이다’고 했던 칼 융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중독은 내가 소중하다 여기던 모든 관계에 죽음과도 같은 해를 끼치고 고통을 안겨주며 나를 철저한 고독 속으로 몰아넣어 혼자가 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랬기에 중독은 다시금 지금부터 내딛는 걸음을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어떤 것이 진정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그 소중한 것을 어떻게 소중히 해나가야 하는지 알려주기도 했다. 매 순간 욕구와 욕구 사이에 서서 선택하게 했고 그렇기에 삶 전체를 드러내게 했다.   해결책은 있다고 했다. 자신을 진실로 돌아보는 일, 자존심을 누르는 일, 자신의 결점을 고백하는 일. 지난 시간 동안 이곳 다사랑중앙병원에서의 1, 4, 9단계 발표 그리고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회복하고자 만들어진 자조모임인 A.A.에서의 모든 과정은 끊임없이 이 세 가지를 하게 했다. 오늘 하루만을 소중히 살아가라 했고, 내가 누구인지 잊지 말라 했다. 이렇게 단순한 해결책이 있음에도 자꾸 잊어버리고 뒤로한 채 내 욕구대로만 살아가려 했던 나는 그랬기에 10여 차례를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이제는 잊지 않고자 한다.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빛을 선택하려 한다. 오늘 하루만을 소중히 살아가고자 한다. 그럼에도 부족한 나이기에 기도에 매달려야 할 듯하다.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시고 어쩔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주시고 그리고 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무엇보다 제발 오늘 하루만큼은 술이 아닌 회복의 길을 선택하게 하소서.

다사랑 2021-02-09

[2016 다사랑 재활수기 공모전] 꿈을 향해 가는 오늘 저는 행복합니다

[2016 다사랑 재활수기공모전 1등 다사랑상]   꿈을 향해 가는 오늘 저는 행복합니다황OO   “살려 주세요 아빠! 잘못했어요.”“아-악”여자아이가 아빠에게 살려달라고 소리칩니다. 무엇인가로 두들겨 맞는 소리가 납니다. “죽어라. 죽어! 내가 그렇게 하지 말랬지!”정말로 아이를 죽일 작정인가 봅니다. 벌써 몇 시간째 남자는 아이를 때리고 있습니다.   옆에서 아이엄마와 할머니가 말리는 소리도 납니다. 아이 잡겠다고.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아이엄마가 울며불며 소리를 지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아-악!” 소리와 함께 할머니와 아이엄마가 소리소리 지르며 통곡합니다. “아이고, 불쌍한 것! 우리 불쌍한 아가, 어쩔꼬. 아이고 아이고”하며 울며불며 소리칩니다.   그때 저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귀를 벽에 딱 붙이고 쭈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결국 죽었구나! 어떡하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리고는 전화기를 들어 112에 전화를 했습니다. 아이가 죽었다는 얘기는 못하고 옆집에서 큰일이 난 것 같다고, 아빠가 애를 계속 때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얼마 뒤에 사이렌 소리가 나고 옆집의 곡소리는 조용해졌습니다. 전화벨이 울립니다. 저는 전화를 받습니다. 저와 통화를 했던 경찰이었습니다. 제가 신고한 그 집에는 아무 일도 없다고 했습니다. 정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맥없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한참을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게 있었습니다. 제가 겪은 금단현상 중 가장 생생하고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20살 때부터 직장생활을 하며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함께 일하는 선배 언니에게 처음 술을 배웠습니다. 처음 마신 술은 다른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크윽”, “캭” 소리를 낼 만큼 쓰지 않았고 취하지도 않았습니다. 달콤하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좋다고 해야 하나, 나른하고도 편한 기분이었습니다.   초창기에 술을 마실 때에는 그런 느낌으로 마셨습니다. 오랜만에 학창시절 친구를 만나거나 회사에서 회식을 하면서 삼삼오오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맛있는 것도 먹고 한바탕 수다도 떠는 즐거운 자리에 즐거움을 더하기 위해 술이란 도구를 사용하였습니다. 결혼을 하여 두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였을 때, 이때가 제가 유일하게 술을 마시지 않았던 때입니다.   결혼 후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아이들 아빠가 운영하던 사업체가 IMF 여파로 첫 번째 부도가 났습니다. 그 뒤로 계속하여 재기하려고 하였으나 하고 있던 사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어 결국에는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털어놓는 빚잔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빚잔치로 끝나지 않은 빚쟁이들 때문에 애들 아빠는 1년간 숨어 지냈고 나는 아이들과 셋이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1년 뒤 집으로 돌아온 애들 아빠는 온통 머릿속에 사업을 다시 시작할 생각뿐이었습니다. 어렵게 들어간 회사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몇 달을 못가 그만두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렇게 회사를 몇 군데 옮겨 다니며 애들 아빠는 사업을 해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돈이 어디 있어서 하느냐’며 ‘둘이 열심히 일하면 애들하고 먹고 살 수 있다’고 어르기도 하고 달래기보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년 정도를 애들 아빠와 씨름을 한 것 같습니다. 맨 정신보다는 술을 마시며 했던 적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싸우면서도 열심히 일하면 아이들하고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을 놓아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날도 밤새 싸웠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와 보니 이미 술을 마시고 있던 애들 아빠와 서로 말로 줄 수 있는 상처는 다 주며 싸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음날 아침, 자고 있는 애들 아빠를 두고 두 아이 손을 잡고 학교에 데려다준 뒤 저는 직장으로 출근하였습니다.그날 저녁 퇴근해 집에 오니 애들 아빠는 가방에 옷가지를 넣고 쪽지 한 장 남겨두지 않은 채 사라졌습니다. 정말 바람처럼 사라졌습니다. 큰 아이가 12살, 작은 아이가 8살 때입니다. 어느덧 11년의 세월이 흘러 큰 아이는 올해 23살이 되었고 작은 아이는 19살이 되었습니다. 그 11년 동안 살았는지 죽었는지, 애들 아빠의 소식을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매일 소주가 없으면 살 수가 없게 된 때는 2005년, 애들 아빠가 집을 나간 후부터였습니다. 처음에는 ‘며칠이 지나면 들어오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화도 나고 분하고…. 내 감정을 어떻게 정리할 수도, 처리할 수도 없었습니다. 가슴은 몽둥이로 치듯 두근거리기가 일쑤였습니다. 불안하고 초조하여 전화기만 바라보고 어찌할 줄 모를 때, 소주를 한두 잔 마시면 일단 두근거리는 가슴이 편해졌습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웠었는데 잠을 잘 수도 있었습니다.   애들 아빠의 가출이 길어지면서 저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했습니다. 밤이면 잠든 두 아이를 보며 내가 이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한숨지으며 술로 밤을 새웠습니다. 무엇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나? 어떤 일을 해야 하나? 몇 달간 고민 끝에 제가 선택한 것은 다른 직업보다 돈을 많이 번다는 골프장 캐디였습니다. 이력서를 내고 처음 일하기 시작한 때가 지금처럼 겨울이었습니다. 힘든 교육을 받으며 정식 캐디가 되는 데까지 3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처음 1년은 하루에 20km씩 걷고 뛰는 일이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그만큼의 대가가 주어졌기에 힘든 줄 모르고 7년이란 시간을 한 골프장에서 일했습니다. 이때에도 저의 음주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면 아이들 반찬거리와 함께 소주 2병은 항상 장바구니에 담겨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집안일을 하고 다음날 먹일 아이들 반찬을 만들며 소주를 마셨고, 술이 모자라다 싶으면 집 앞 구멍가게로 달려가 더 사다 먹기도 했습니다. 골프장에서 일을 하는 낮에는 고객이 사주는 음료수를 맥주로 바꾸어 먹기도 하고, 동료들과 코스 보수 후 피곤함을 핑계로 막걸리를 한두 잔씩 먹기도 하였습니다.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그렇게 술을 마셨습니다.   그렇게 7년간 일하며 무리가 되었는지 복숭아뼈 부분에 물이 계속 차올라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골프장을 그만두고 일반 사무실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아이들도 어느 정도 커서 더 이상 제 손이 가지 않아도 되었고 저는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는 동료들과의 저녁 술자리가 잦아졌고 명절이나 휴가 때에는 혼자 낮이나 밤이나 술을 마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항상 내 손이 필요했던 아이들이 크면서 자신들만의 세계가 생기고 혼자만의 시간이 많아지면서 외로움을 탄 것 같습니다. 결국 자기연민에 빠지게 되고 저의 그릇된 망상으로 자신을 혼자만의 세상에 가둬놓고, 모든 것을 술에 의지하고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감사하고도 다행인 것은 두 아이가 저의 부족한 보살핌에도 엄마의 수고를 알고 감사하게 생각할 줄 아는 착하고 건강한 아이들로 커 주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랑해주며 정말 밥만 해줬는데도 아이들은 누가 보아도 혼자 키운 아이들답지 않게 밝게 커 주었습니다. 저는 제가 아닌 아이들이 믿는 하나님께서 아이들을 키워 주셨다고 생각하며 이때부터 아이들을 따라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에 나가고 3년쯤 되었을 때 술을 줄이든지 끊던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때쯤 처음으로 블랙아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술은 나의 생각과 의지대로 줄여지지도 끊어지지도 않았습니다. 며칠은 꾹 참기도 하였지만 얼마 못가 또 술잔을 잡고 있었고, 오늘까지만 마셔야지 하면서도 그것은 마음 뿐 도저히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 되어버리곤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4년 정도를 마셨다 끊는 조절음주를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알지 못하였지만 ‘그만 마셔야지’라고 마음먹고 술 마시기를 멈추었을 때나 더 이상 몸에서 받아주지 않아 술 마시기를 멈추었을 때, 저는 끔찍한 금단현상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던 큰 아이는 치료를 받아보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2014년 7월에 아는 지인이 알려 준 인천의 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입원하고 보니 그 병원은 알코올병원이 아닌 정신병원이었습니다.   창문 하나 열 수 없게 모두 막아놓았고 정신분열증 환자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폐쇄된 공간에서 그들과 매일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함께 하는 것은 제게는 지옥에서 지내는 것처럼 괴로웠습니다.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간단한 책 읽기, 종이접기, 몸이 불편한 사람을 도와주는 일 뿐이었습니다. 그나마 그곳에서 2개월 동안 있으면서 제가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나보다 불쌍한 사람도 많다는 것과 이런 곳에 다시 오지 않으려면 술을 마시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해 겨울, 아들이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군대에 들어간 아들이 보고 싶은 마음에 술의 유혹도 있었지만, 병원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6개월 동안 술을 끊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병식이 전혀 없었던 저는 너무 피곤한 몸으로 잠을 잘 수 없어서 맥주 한 캔 정도는 괜찮겠다는 생각에 술을 다시 마시게 되었습니다. 첫 날은 맥주 한 캔으로 끝났지만 그 다음 날에는 더 많은 양의 맥주가 필요했고, 그 다음날은 맥주가 아닌 소주가 필요했습니다.   퇴원할 때는 “술을 마시면 다시 입원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 때문에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그때는 제 몸 생각보다는 다시는 정신병원에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술을 다시 마시게 되면서 저는 고통의 날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금단현상은 저를 거의 미칠 지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 때 제 옆에서 시린 손과 발을 주물러 주고, 토할 때면 등을 쳐주고, 아무것도 넘기지 못할 때에는 죽을 끓여 입에 넣어주는 딸아이가 있었습니다. 딸은 항상 제 곁에서 술을 찾는 저를 안타까워했고 금단증상을 겪는 저를 보며 같이 아파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혼자서는 술을 끊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난 2015년 8월, 이곳 다사랑중앙병원을 미리 예약해놓고 보호자인 아들이 군에서 휴가를 나올 때를 맞춰 저를 입원시키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대해 나쁜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저는 병원에 오면서도 아들에게 애원하며 매달렸습니다. 다시는 술 안 먹겠다고, 집으로 다시 가자며 혼자서 술을 끊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내 말을 어느 정도 믿게 되었는지 딸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으나, 딸아이는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딱 잘라 “엄마가 가지 않겠다고 하면 차에서 내려 EMS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저는 딸아이의 말에 모든 것을 체념하고 아들 손을 잡고 병원으로 와 입원 수속을 밟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9층 병동에 들어서는 순간 저는 이전 병원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딸아이가 정신병원이 아니라 알코올전문병원이라고 하더니 정말로 다른 것 같아서 일단은 안심하고 주말을 지냈습니다. 월요일 회진 때 원장 선생님과 상담사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고 그날부터 병원의 프로그램을 시작하였습니다.   첫날 중독학 시간에 수업을 듣고 나서 저는 무엇인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알코올 중독’이라는 그 단어가 제 머릿속에 ‘딱’ 박힌 듯한 느낌, 그 느낌이 싫지 않았습니다. 수업이 끝난 뒤 ‘알코올 중독’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쯤 상담사 선생님께서 부르셔서 첫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선생님께서 제게 하셨던 말씀을 제 머리와 가슴 속에 생생하게 담아두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입니다.   “평생 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는 않겠지만 지난 날 어떻게 술을 마셨든지 지금부터 병원의 프로그램에 충실하면 안 마시고도 살 수 있습니다. 저도 알코올 중독자입니다. 저는 선생님보다 더 심하게 망가졌던 알코올 중독자였지만 이제는 술을 마시지 않고 살고 있으며 이렇게 일도 하고 있습니다. 저도 광주 다사랑병원에서 치료받고 새롭게 회복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아홉 번 재발하였으나 10년 넘게 술을 마시지 않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보았습니다.그때부터 지금까지 꼭 6개월 지났습니다. 그동안 저에게는 너무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치료진의 진단을 온 몸과 머리,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시인했습니다. 수업이나 책을 통하여 제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사실을 수없이 많이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알코올 중독이 되었고 그동안 혼자서 끊어보겠다고 발버둥 쳤으나 끊을 수 없었던 것은 내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이미 중독이 되어서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술만 안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마음을 고쳐야 하고 겸손하고 정직해야 한다는 것, 또 모임 안에 있어야 술 없이 온전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상담사 선생님과 함께한 단계지 작업을 통하여 술 마시기 전의 나를 만날 수 있었고 내가 진정 어떤 사람이었고 술로 인하여 어떻게 변해 버렸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술로 괴롭혔던 나와 화해할 수 있었고 아이들과 또 가족에게 나의 진심을 다해 사죄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항복했을 때, 나의 위대하신 힘께서는 나에게 술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주셨고 마음의 평온함과 지혜도 함께 주셨습니다.   개방치료를 마친 뒤 퇴원하지 않고 재활을 선택한 것은 내가 새로운 삶을 살아갈 때에 가장 밑바탕이 되는 주춧돌을 단단하게 쌓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병에 대한 병식만 알고 사회로 나아갔을 때의 두려움도 있습니다. 지난 6개월간 치료를 받으며 제게는 하고 싶은 일과 꿈이 생겼습니다. 예전처럼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필요한 곳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힘이 들어도 보람된 일을 하고 싶습니다.   얼마동안이나 재활병동 생활을 할진 모르겠지만 이제 저는 시작했습니다. 제가 병원에서 퇴원하여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힘이 되고 나를 잡아줄 버팀목을 하나씩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재활치료를 하며 탄탄하게 해 놓아야 하는 것은 생활의 균형을 잘 잡는 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아이와 함께 하는 가정생활, 사회에서 일해야 하므로 어떻게 어떤 일을 하는 것도 제게는 중요합니다. 그리고 모임 생활, 신앙생활 이 네 개의 바퀴가 균형 있게 잘 돌아가야 저는 술을 마시지 않는 알코올 중독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재활치료를 받은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저는 모임생활이 온전한 생활의 한 바퀴가 되게 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빠지지 않고, 휠에 녹이 슬지 않게, 다른 바퀴와도 균형이 맞게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임에서 경험담을 들으며 같은 알코올 중독자들이 겪는 아픔과 고통을 함께 느낍니다. 모임 안에서 힘과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러 선생님들의 소중한 경험은 제게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값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힘이 저를 지탱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혼자가 아닙니다. 저에게는 저만의 위대하신 힘이 항상 저와 함께 하십니다. 또한 저의 또 하나 위대하신 힘 상담사 선생님도 함께 하시고 병원의 치료진 선생님들, 여러 환우 선생님들도 제가 회복의 삶을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힘이십니다.   저는 다사랑중앙병원에서 6개월간 치료 받으며 병원에 세팅되어 있는 프로그램의 힘 또한 대단한 것임을 믿고 있습니다. 47살이라는 나이에 27년을 술을 마시며 살아왔습니다. 병원의 프로그램을 진심으로 믿고 따라하며 저는 술을 마시며 잃어버렸던 나를 찾게 되었습니다. 27년간 잃어버렸던 나를 찾게 해준 다사랑중앙병원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치료를 받게 도와준 오빠와 동생, 가족들에게도 감사하고 병원으로 오게 해준 딸과 아들에게도 감사합니다.   이제는 자식을 위한 삶이 아니라 엄마 자신의 삶을 찾으라는 딸의 말이 생각납니다. 재활치료를 받는 동안 기초적인 생활의 패턴을 잡으며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 저의 1차 목표입니다. 알코올 중독자가 있는 병원에서 그들과 함께 하며 아픔과 고통 그리고 기쁨과 희망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제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이었던 상담사 선생님처럼 저도 아프고 고통 받는 알코올 중독자에게 빛과 희망이 되고 싶습니다. 그들과 함께 할 때에 나도 함께 회복되어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며 알코올 중독에 대하여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또 알코올 중독의 병에 대하여 더 많이 알리고 싶습니다. 고통 받고 있는 자신이 알코올 중독인지 모르고 중독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그들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 밑바탕을 튼튼히 하기 위해 오늘도 저는 병원생활을 열심히 하고 모임에도 갈 것입니다. 어느새 저는 모임 안에 있을 때 편안함과 안도감을 느낍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좋은 거름으로 밑바탕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재활 한 달째…. 짧지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제게는 이미 많은 것이 좋은 거름으로 채워졌습니다. 재활의 첫 단추가 잘 끼워졌습니다.   저는 오늘도 두 번째 단추도 잘 채워지길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이제껏 삶을 살며 저만을 위해서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는 제게 하고 싶은 일이 생겼고 꿈도 생겼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를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오늘이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다사랑 2021-02-09

[2016 다사랑 재활수기 공모전] 나를 용서하는 법

[2016 다사랑 재활수기공모전 2등 온전함상]   나를 용서하는 법김OO이 글을 쓰기에 앞서 이 글은 온전히 나의 경험이고 받아들임이다.그러므로 다른 이들의 경험과 다를 수 있으니 나의 기준에 맞추어 읽어주길 바란다.   ■ 간략한 52년 내 인생1964년생 용띠인 나는 충청도 OO의 평화로운 농촌마을에서 태어나 8살 때까지 조부모(祖父母)님과 살았다. 당시 아버님은 집안의 고집으로 신학문(*지금의 초등학교)을 배우지 못하고 서당에 다니셨고, 할아버님과 농사일을 하시다가 입대를 하여 군대에 계셨다. 제대 후에는 서울로 방직공장(*스웨터 등을 만드는 공장)에 일하러 상경하셔서 어릴 적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조부모님께서 엄하셔서 나도 한학(漢學)을 동몽선습(童蒙先習)까지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편으론 종손으로 태어난 나를 끔찍이도 아끼셔서 가난한 시골 살림에도 당시 촌사람들의 부의 상징이던 ‘흰 고무신’도 신고 다녔다.   어느 해 여름 긴 장맛비에 백마강 줄기의 냇물이 불어나 동무들과 조개를 잡으러 갔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적이 있는데, 지금도 물에 대한 트라우마로 남아 나를 괴롭힌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제일 먼저 수영학원부터 보냈다. 내가 태어나 두 번째로 잘한 일인 것 같다. 물론 첫 번째로 잘한 일은 두 아이를 태어나게 한 것이다. 지금은 아이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하고 목 안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들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취학통지서가 나와 서울로 상경하였고 군 제대 후 사회에 일원이 되기까지의 일대기는 격동의 80년대를 살아온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참으로 드라마틱하게 살아온 것 같다. 결혼을 하고, 내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인 아이들을 낳고 회사를 설립하고, 일하고 또 일하며 정말 정신없이 살았고 또 행복했던 시절도 있었다.   앞만 보고 달리는 기차처럼, 무슨 성공을 위해서도 아니고, 대부분의 가장이 그러하듯이 소소한 일탈도 없이 휴일이면 아이들과 놀러가고 직원들 회식자리 참석하고, 친구들 모임에 나가 술도 마시고 하루하루를 아이들 커가는 즐거움에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내 인생이 이렇게 망가지리라고는 하늘도, 나 자신도, 아무도 몰랐다. 바로 3년 전까지 말이다.   ■ 내겐 너무 아팠던 그해 겨울2남2녀 중 장남이자 종손인 나는, 지금 대학교 2학년인 딸과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이 하나 있는, 혼사 사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냥 ‘알코올 의존증’ 환자이다.3년 전까지 성실하게 회사를 운영하던 나는, 부유하지는 않지만 남에게 돈 빌려 쓰는 일 없이 아이들을 키우고 아내와는 친구처럼, 오빠처럼, 행복하게 내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며 술을 좋아하는 평범한 가장이었고, 업계에서는 정평이 나있던 능력 있는 오너였다. 2013년 그해 봄부터 시작된 악몽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암의 종류 중에 ‘다발성 골수증’ 이라는 것이 있단다. 골수에서 만들어내는 피가 병들어 있다는 병증이다. 어떻게 이름도 생소한 그놈이 주말마다 산에 다니시고 건강하시던 아버지에게 소리 없이 찾아와 살고 있었는지…. 정말 순식간이었다.   귀가 잘 안 들리시고, 피가 잘 멈추지 않아서 사촌동생이 교수로 있는 서울OO병원으로 진료를 받으러 갔더니 동생 하는 말이 “형님, 준비하셔야 합니다”라고, 참으로 매몰차게도 이야기한다. 무슨 몇 년도 아니고 몇 개월도 아니고 검사결과가 나오자마자 하는 소리다. 그저 돌아가시는 것을 지켜보라고 한다. ‘네가 의사 아니냐! 방법이 없냐!’라는 연속극에서나 나오던 말들을 입안으로 삼키며 ‘그렇구나, 그래’ 하는 말들을 수없이 되새기며 언제 올지 모를 날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점점 정신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보면서, 어느 순간 술을 마시고 있는 나를 보면서, 받아놓은 시간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내 눈에 ‘황반병성’이라는 불치병이 있다. 한마디로 실명하는 병이다. 치료제는 없고 실명을 늦추는 역할을 하는 항암제를 맞는 것이 전부다. 주사를 어디에 맞는가? 눈에다 맞는다. 눈뜨고 주사바늘이 눈을 찌르는 것을 보았는가? 진짜로 무섭다. 싸움? 낯선 자리의 두려움? 치과? 모르겠다. 하여튼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가장 무서운 두려움이다.   그러나 그것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던 내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고 또한 이런 상황과 묘하게 물려 어려워지기 시작한 회사를 핑계로 늘 술을 찾기 시작했고, 항상 내 옆에 술이 마치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이전의 음주 습관과는 또 다른 행동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미처 자각하지도 못한 채 그렇게 73세의 일기로 아버님을 보내드리고 말았다. 형제들과 칠순(七旬) 식사를 마련해 드린 것이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게 나는 아버님을 보내드리고 그때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술’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 독약이 시나브로 내 몸의 반쪽이 되어 나를 잠식해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 급기야 술의 도움을 받고학교를 졸업하고 국내 굴지의 주류회사 계열사에서 근무를 시작했으나 당시 부도위기에 이른 회사의 사정으로 다른 직원들과 함께 프리랜서로 회사외 프로젝트에 투입된 것이 이 평범하지 못한 전산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 후 여러 회사의 프로젝트를 거쳐 능력을 인정받아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고, 꾸준히 성장시켜 나가며 작지만 탄탄한 회사로 이루어냈다. 하지만 시스템이 변화되면서 영세한 중소기업은 살아남기 힘든 환경이 되었고, 직원들 월급날이 되면 임금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 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술을 마시면 그저 기분이 좋아져 호인이라는 평판을 받던 나였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다음날 새벽이면 일어나 일을 하는 이른바 ‘아침형 인간’이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낮술, 해장술을 입에 대기 시작하더니 사람들과 어울리기 미안해지고 점점 더 혼자 술을 마시는 습관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돈이 없어 집 근처 공원, 아파트 후미진 곳 등 사람이 잘 안 보이는 곳으로 숨어 들어가 아무 의미 없이 깡술을 마셨다. 도대체 무슨 이유가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는데, 아마도 그때그때 되지도 않는 적절한 핑계거리를 만들어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또 속으로 중얼거리며 마셨던 것 같다. 그래도 집에서는 차마 아이들 때문에라도 ‘이러면 안 되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짐도 금세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 같은 알코올 환자가 그렇듯 집안에 숨길 수 있는 곳에는 어디에든 숨겨놓고 몰래 마시기 시작했다.   몰래 먹는다는 것. 그게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아침을 아이들이랑 먹으려면 손이 떨려 수저도 들 수가 없어 밥 먹기 전에 술을 먹고 아닌 척 했다. 바보 같은 나는, 아이들도 아이엄마도 모르는 줄로만 알았다. 금단증상이 점점 심해지자 안주를 집어먹을 힘도 없어 술병 하나, 물병 하나를 가방에 숨겨놓고 병째 한 모금, 안주로 물 한 모금…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죽여가고 있었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니고 지쳐서 잠이 들고 깨어보면 깜깜한 밤. 또 밤.‘이상하다? 느낌은 낮인데 왜 아무것도 안 보이지?’ 더듬더듬 전등 스위치를 찾으려다 넘어지고, 기어 다니며 그것이 밤이 아니라 내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안 순간 나는 통곡을 했다. ‘이렇게 죽는구나! 차라리 잘 되었다’ 라고 체념을 하면 서서히 보인다. 한동안 장님 상태에서 내가 어질러놓은 방 안이, 그곳에 서 있는 나를 닮은 외계인 하나가….   그렇게 술로 나날을 보내던 중 OOO 프로젝트에서 일을 하자는 제의가 들어와서 출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금단증상이 시작되어 손이 떨려 컴퓨터 키보드를 칠 수도, 문서를 만들 수도 없어서 건물 화장실에서 술을 마시며 일을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나중에는 보온병에 술을 담아 마시기도 하는, 정상인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미친놈처럼 출근하다가 그만두게 되었다.   병원에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퇴원해서 나올 때마다 했던 굳은 맹세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취직이 안 된다는 이유, 그리고 돈을 벌지 못한다는 이유, 그래서 아이들과도 생이별을 하고 있다는 조급함이 나를 또 병들게 했고 횟수가 많아질수록 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가는 시간도 점점 빨라졌다. 숨이 멎을 것 같고, 세상은 황량해보이고, 나는 갈 곳이 없고 ‘이놈의 술은 왜 먹을까?’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그러나 생활의 일부가 된 술병을 보물단지 마냥 옆에 끼고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 내가 내 가족에게 준 선물들한참 예민한 청소년기의 자식들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준 나는 어디 더 아플 수 있는 사람이 없을까 찾아 궁리를 하는 놈 마냥 머리 풀고 꽃 꽂은 색시가 되어 한 분 남아계신 어머니께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선물을 해드렸다.통곡, 고통, 가슴을 베어내는 아픔, 또 무슨 종류의 아픔이 있을까? 마치 내가 태어나 그렇게까지 많은 아픔의 단어를 찾아내서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의 영혼까지 파괴하려고 지옥에서 뛰쳐나온 야차같이 변해갔다. 모든 부모가 그렇듯 그토록 사랑하며 내 한스런 목숨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내 자식들에게 삶의 희망인 웃음을 깨끗이 없애버렸다. 힘들어 잠깐 웃음을 기억 못하는 아이가 아니라 아예 잃어버린 아이로 만들었다. 아비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내가 말이다. 생떼(*싱싱하게 자라는 우리나라의 잔디)같은 새끼들의 웃음을 술에게 팔아먹은 것이다. 1000원씩 주고…….그 어린 것들의 해맑은 웃음을 술과 개 망나니짓을 하는데 팔아먹은 나는 미친놈이다. 그러니 나를 용서할 수 가 있을까? 없다.   생이별을 하고 그리운 마음에 사진첩을 뒤적이면 그 어떤 사진 속에도, 동영상 속에도, 다른 기록의 그 어디에도 나는 없다. 마치 유령인간이 된듯하다. 위선만 남아있는 빈껍데기의 ‘나’만 있을 뿐이다. 능력 있는 가장, 온화하고 친구 같은 아빠, 그리고 다정한 남편…. 모든 게 나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면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오고, 나는 또 술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 몽롱한 눈으로 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 목이 마르면 또 술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 징징거리고……. 이게 사람인가. 내가 사람인가. 벌써 세 번이나 병원을 1년 넘게 들락거리며 들인 돈이 얼마인가? 추운 겨울 파산선고를 받은 나 때문에 보일러도 떼지 못한 방에서 춥다고 전화한 아들이 “아빠 몸은 어때? 이제 술 안 먹지?” 하면서 오히려 나를 위로하는 목소리가 비수가 되어 온몸을 난도질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 나는 무얼 해야 하는가, 그렇다. 또 술 먹는 것 외엔 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또 하루하루를 죽지못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2015년 8월 10일 또 막내 동생이 나를 입원시키려고 찾아왔다. 끊어지지도 않는가보다. 형제라는 질긴 끈은. 어지간하면 모른 체 하련만 띠동갑인 우리 막내 동생은 술에 빠져 사는 나를 포기하지 못하고 살려보겠다고 휴가를 내고 찾아와 나를 이곳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시키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어머니와 함께 돌아갔다.   왜 나는 상황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술’을 택한 걸까? 회사일로 힘들어 할 때 가장 내 가까이에 있었고 자식들과 생이별을 하고 마음이 아플 때는 돌아가신 아버님 같았고, 이혼을 하고 힘들 때는 연인처럼 있어줬고, 취업이 안 되어 혼자 있을 때 친구처럼 다가왔고, 몸뚱이에서 썩은 내가 진동할 때에도 의사처럼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내 미친 정신은 그리 생각하도록 조종당하고 있었던 게다. 술에게서…….결국은 술 앞에 철저히 패배하였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 술은 내게 무슨 영광의 휘장처럼 온몸을 휘감아 돌며 그 안의 발톱을 뿌리박고 내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 병원생활이곳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하기 전에도 같은 치료목적을 가진 알코올 전문병원에서 3개월, 6개월, 6개월 도합 1년 3개월간 입?퇴원을 반복했다. 술에 대한 유해성 교육, 12단계, 미술치료, 음악치료, 음주예방 교육 등 똑같은 교육을 병원에 들어갈 때마다 받았다.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알코올 전문 치료병원의 특성을 소개하면, 일단 폐쇄병동이다. 주치의 허락이 없이는 바깥과 왕래할 수 없는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정신병원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처음에 입원한 병원은 경기도 부천의 OO병원이었다. 처음 가보는 폐쇄병원의 낯섦과 처음 보는 험악한 환자들…. 나도 그들과 같은 부류임을 깨닫지 못하고 무시하고, 나와는 격이 다른 사람으로 폄하했다. 그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힘들어하면 ‘겨우 그게 바닥까지 경험한 거냐?’, ‘내가 경험한 것을 너희는 상상도 못할 거다!’ 라는 생각으로, 세상에 나보다 불행하고 힘든 사람은 없다고 별 거지 발싸개 같은 자랑을 해댔다. 그러다 결국은 ‘너도 나도 똑같은 아픔을 가진 환자구나’ 라고 자각을 하며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 치료를 받던 중에 지금은 이혼한 안식구가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를 퇴원시키러 찾아와 점심식사 후 낮잠을 자던 중에 퇴원했다. 입원 3개월 만이었다. 그때는 퇴원하고 나가면 다시 재기하여 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그러나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도 기울어진 회사를 다시 일으킬 수는 없었다. 그렇게 허송세월을 하며 생 단주로 5개월 정도를 보내다가 결국은 한 잔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맥주 한 캔을 먹은 것이 시초가 되어 일주일 만에 방에 숨어 술을 마시는 이전의 나로 돌아가 있었다. 영업을 하려해도 운전은 할 수 없고 손발이 떨려 버스를 올라타지 못하고 식은땀으로 도배를 하는, 전보다 못한 놈으로 돌아가 있었다. 견디다 못해 나는 스스로 일반 종합병원을 찾아가 입원을 했고 입원 이틀 만에 담배를 피우러 가던 기억을 끝으로 기절을 하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눈을 떠보니 하얀 방에 꽁꽁 묶인 나를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이 전에 입원했던 OO병원임을 일주일 만에 알았다. 또 다시 반복된 병원 생활, 똑같은 일상들,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교육들, 종이접기, 독서만이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반송장처럼 그렇게 또 6개월을 살았다.   아니, 굉장한 일이 한 가지 있었다. 결국 아내와 이혼을 했다. 이혼신청을 하러 법원에 가는데 병원 측과 의사소통이 잘못되어 급하게 가느라 환자복을 입고 법원에 출두하여 신청을 하고, 한 달 후 우리는 법적으로 남남이 되었다. 양육권, 친권 모두 없이 이젠 세상에 홀로 남아서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외로운 인생이 된 것이었다. 180일 후 또 다시 퇴원했다. 면접을 보는 데마다 내 경력 때문에 취업이 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또 다시 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마치 너무나 술을 사랑한 중국의 시인처럼…….   누가 나 좀 살려달라고 수없이 외쳐도 보고, 죽을 결심도 해보고, 그것이 안 되자 나는 점점 더 나락으로 빠져 들어 갔다. 흔히 허송세월(虛送歲月)이라고 한다. 내일 죽을 사람이 간절히 원했다는 ‘오늘’을 그렇게 술에 담아 뱃속에 버리고 다시 또 몸에서 썩은 내가 나기 시작하자, 선친께서 아우에게 부탁을 하셨는지 당신 제삿날 동생들이 다 모여 제사를 지내고, 난 또 막내의 손에 이끌려 수원의 OO병원에 입원했다.   이젠 병원생활도 몸에 뱄다. 병원이 집 같다. 아주 편한 집, 술에 찌든 나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편한, 그런 집말이다. 어이가 없었다. 이렇듯 익숙하다니…….3년을 하루같이 나를 믿고 기다려준 나의 어머니, 형제들, 내 새끼들에게 다시는 이런 고통을 주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초심의 마음으로 돌아가 수업도 빼지 않고 듣고, 발표도 하고, 이제는 다신 병원생활을 하지 말자고, 그렇게 증오스럽던 나를 이제 그만 용서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수없이 최면을 걸며 6개월을 또 병원에 있었다. 그런데 용서는 개뿔이다. 이제는 욕도 안 나온다.   이제는 정신 차리고 살자며, 떳떳한 애비로 아들로 살아보자고, 다 내려놓고 우선 내 쉴 곳만이라도 마련하고 살아가며 다시 시작하자고 했지만 나도 나를 못 믿는데 뭔 일을 할 수가 있었을까. OO병원에서는 주치의 선생님이 ‘개방병동’이라는 곳에서 하루라도 생활을 해보고 퇴원하라는 것도 뿌리치고(‘돈도 한 푼 없고 배운 일용직업 기술도 없이 개방에서 밖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면 또 다시 망가질까봐’라는 나름의 이유를 대고) 퇴원을 했다.이후는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나를 용서할 수가 없다는 이유를 대고 퇴원한 다음 날부터 소주 됫병을 사놓고 먹기 시작했다. 점점 숨기는 기술만 늘어가고 있는 내 모습은, 아마 최고의 거짓된 삶을 살아가는 연기대상감이었을 것이다.   ■ 다사랑에서의 병원생활2015년 8월 10일 다사랑중앙병원에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찾아와 원장님과 상담을 하고 입원을 했다. 그때 원장님은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또 불쌍한 인생이 하나 들어왔구나” 라고? 아니면 “저걸 어떻게 사람을 만드나?” 뭐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셨나 싶다. 아침부터 마신 술은 온몸에 퍼지고 손은 바들바들 떨고, 어머니나 동생이 뭐라 할라치면 내 방어를 하느라 여념이 없고……. 그렇게 상담을 하고 나는 6층으로 올라왔다. 음주 측정을 하는데 간호사 선생님도 놀란다. 수치가 장난이 아니었던 듯싶다. 기계고장 운운했던 걸 보면. 하긴 2리터짜리를 거의 다 먹었으니까.   자, 이제 늘 그렇듯이 CR(*격리실)에 가서 코끼리 주사 한방 맞고 자야지 하고 있는데 병실로 데려간다. 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스럽다. 다른 병원에서는 무조건 CR로 들어가 주사 맞고 깨어나면 병실로 이동 했는데…….병실에서 먼저 들어 와 있던 환우에게 글씨를 쓸 수가 없어 간식장부에 물을 시켜달라고 하고는 둘이 가만가만 이야기하다 보니, 이 병원은 다른 점이 몇 가지가 잇다.   첫째, 각 단계별로 1,4,9 단계 발표가 있다는 것.둘째, 관리병동, 개방병동, 재활병동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셋째, 내가 경험한 병원보다 호텔급이라는 것 (아마 다른 병원에서 생활을 해본 환우라면 이해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재활병동’이라는 것이 가장 가슴으로 와 닿았다. 이번에는 무언가 될 것 같다는 희망을 품기 시작했고, 또다시 시작된 교육도 새롭게 바라보니 나름 또 더 배울 것이 있었다. 쓸데없는 병원생활에 대한 자만이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원장님의 한 마디는 나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치료를 하지 말고 나를 위해 치료를 해야 합니다.”순간 내 뒤통수를 뭔가 치고 갔다. 어쩌면 정말로 그랬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니 맞는 것이다. 어이가 없다. 그 오랜 병원생활을 나 자신이 아닌 걱정하는 이들을 안심시킨다는 명목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도 후회스러워 그날 저녁 곰곰이 짚어 보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고 가족에게 죄송스럽고 나에 대한 미안함에 차마 하늘을 볼 수도 없었다.   나는 나를 용서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용서라는 포장 뒤에 숨어 있으려 했기 때문에 여태까지 진심으로 나를 되돌아보질 못한 것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나의 잘못된 점과 바꾸어야 할 점을 찾아보니 너무나 많아 삶 자체가 거짓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잘한 점을 찾아보기로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없다. 아무것도. 철저하게 아무것도 없다. 이건 가슴이 끊어지는 아픔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살았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마를 새 없이 비처럼 내린다.   다음날 담당 상담사님을 만나 나를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마침 면회 온 동생과 함께 갔는데 ‘겸손’이라고 단번에 말씀하신다. 그동안 무수히 들었고 배웠고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것도 위선이었던 것이다. 모든 병원의 관계자들 의사, 간호사, 보호사 등이 다 똑같이 치료해주고 보듬어 주며 치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겠지만, 다사랑중앙병원이 나랑 맞아 떨어진 것 같다. 특히 치료 프로그램이 나에게 새 삶을 찾을 수 있는 용기를 준 것 같다.   올 초 단주를 위한 신년 계획에서 나는 주저함 없이 “정확한 계획 없이 퇴원을 안 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나를 이제 조금이나마 알기에 그럴 것이다. 섣부른 판단으로 다시 또 죄인이 되고 싶지 않기에…….   ■ 재활병동에서의 새로운 다짐관리병동에서의 1단계 발표, 개방병동에서의 4, 9단계 발표 후 재활병동으로 옮긴 지 벌써 두 달이 되었다. 절대 서두르지도, 조급해 하지도 않겠다는 그동안의 다짐을 다시 돌이켜보며 지금처럼 내가 평온해지기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고 지켜준 나의 가족들에게 너무도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다. 있다면 내가 온전히 살아가는 길뿐…. 지만일 퇴원을 했다면 또 다시 전과 같은 똑같은 일상으로 틀림없이 돌아가 어둠 속에서 허덕이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에게 이런 축복의 기회를 주신 병원에 감사를 드리며, 그동안 거쳐 왔던 다른 병원에서 만난 환우들도 항상 좋은 소식만 들리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내 생각에 조금 더 있다가 퇴원했으면 하고 아쉬워했던 환우들과 그동안 정이든 환우 여러분도 항상 건승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한다.   이제 다음달 10일이 되면 이곳에 입원한지 6개월째다. 그토록 용서하지 못했던 나를 일부나마 용서하고 진정한 나만의 의미인 ‘재활(再活)’을 이루고 더 나아가 ‘갱생(更生)’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병원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다사랑 2021-02-09

[2016 다사랑 재활수기 공모전] 제2의 삶을 살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2016 다사랑 재활수기공모전 3등 감사함상]   제2의 삶을 살게 해줘서 감사합니다이OO   저는 1952년생 알코올 중독자입니다. 의학적으로 판명된 것은 아니지만 유전성 영향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알코올 중독이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가진단으로 볼 때 저의 집안은 고려 말 목은(이색) 선생의 후손들로 유교사상이 유별나 부친, 조부, 증조부님까지 술은 잡수셨으나 정도에 맞게 예를 지키며 즐기셨고 작고하신 사인들이 술에 의함이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부친은 충청도 OO 시골에서 한의원을 하셨습니다. 저는 다른 집 아이들보다는 유복한 소년기를 보냈지만 고등학교 시절 뜻하지 않게 집안에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자라는 과정에서 인성교육 등에 많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체벌이 두려워서 표출된 행동은 해보지 못했던 저는 집안에 찾아온 불행과 동시에 비행의 날을 시작하며 처음으로 술을 마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자라는 과정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비행의 길은 1년도 넘지 않았고, 학업은 중단됐으나 부친께서는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는 실정이 돼서 제가 가족들을 이끌고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됐습니다. 소위 말하는 명문가 자식으로 유복하게 자란 저로서는 엄청난 충격과 함께 험한 세파에 좌충우돌하며 가족들을 부양해야 되는 실정 속에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해야만 됐으며 자연히 술을 가까이 하게 됐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충격에 의한 각오가 남들과 달라서인지는 몰라도 접하는 일마다 생각 밖의 성과를 거뒀고 저는 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전역 후에는 안경공장을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을 해봐도 군 생활 중 다른 전우들보다 월등히 술을 좋아했고 주량도 훨씬 많았던 것 같습니다.   나이 30세에 현재의 아내와 혼인을 했고 35세에 안경업을 청산하고 부동산 중개와 함께 건축업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거의가 술에 의하여 일을 만들고 술에 의하여 계약이 성사되고 하여튼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술에 의존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을 해보면 술 때문에 되고 안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술판이 아니면 안 될 것만 같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여튼 단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어 매일을 술로 보냈습니다.   1987년 초가을, 아마 절기로는 처서가 지나고 백로쯤 됐을 때 같습니다. 아들이 OO초교 1학년 때인데 교복을 입고 있는 상태로 차안에서 잠이 들었고, 저는 잠시 술집에 들어가서 한 잔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차와 함께 아들이 유괴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차는 잃었지만 조상님이 도와주셨는지 천만다행으로 유괴범들이 아들을 24시간 만에 돌려주었습니다. 순전히 술에 의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아들을 잃을 뻔한 일을 겪고서도 술을 끊을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고도 내가 인간인가 싶습니다. 별 죄의식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 후로도 술은 계속됐고 그해 겨울인 듯한데 당시 광화문 근처에서 열린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자리가 끝나고 여자 동창들을 차에 태우고 집에 오는 길에 어느 일식집에서 한 잔을 더 마신 뒤 친구들과는 헤어지고 대리운전을 시켜서 집엘 왔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예물로 받은 고가의 시계(일명 R금딱지)가 제자리에 없었습니다. 아차 싶어서 동창들한테 전화를 해보니 대리기사와 차에 탈 때까지만 해도 시계를 차고 있는 모습을 분명히 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까 차안에서 잠시 동안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전에도 블랙아웃이 가끔 있었는데 그때 후로는 블랙아웃이 일주일이면 2~3번 정도씩 발생했습니다.   저의 알코올 중독 시점이 언제부터였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해봅니다. 어찌됐든 간에 사업은 동종업자들이 모두 부러워할 정도로 승승장구 발전했습니다. 작은 빌딩이었지만 사옥을 짓고, 의젓한 건설회사를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사업의 규모가 졸지에 확장되는 것과 동시에 외환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저와 같은 조무래기 기업들은 예견할 수 없던 일이었습니다. 결국엔 각 현장마다 유치권을 행사하는 현수막이 나붙었고 저는 현실도피 행각을 벌였습니다. 책임자 몇 명과 아내가 뒷수습을 하는 상황에서도 저는 뒤에서 술에 젖은 나날을 보내기를 약 2년여 동안이나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외환위기가 회복이 되면서부터 빌딩마다 임대도 매매도 순조롭게 풀리며 모든 부채가 해결됐고, 저는 아직 한참 젊은 나이기는 하지만 이 기회에 모든 것을 처분하고 여생을 편하게 즐기면서 살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또 그럴만한 충분한 여력도 됐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물질에 눈이 멀어 돈을 벌기 위해 불법을 적법으로, 부당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마셔댔는데, 그 후로는 정말로 살판난 것처럼 누리고 즐기고 매일 해외로까지 원정을 다니며 술과 골프에 젖어서 살았습니다.   그러기를 약 4~5년 세월을 보내면서도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속담에 맞게 다달이 병?의원을 찾아다니며 간 검진을 자주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지방간 수치가 좀 높을 뿐 큰 이상은 없었습니다. ‘그만큼 마셔댔으면 간경화나 간암이 될 만도 한데 내가 간하나 만큼은 잘 타고 났구나’ 하는 생각을 참 자주 했던 것 같습니다.   2008년도 어느 날 돈 욕심인지 일 욕심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내가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접었으니 당신은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다만 우리가 지난 IMF 때 충분한 경험을 겪었으니 그 점을 잊지 말고 절대로 무리한 짓은 삼가달라”고 당부의 말만 했었습니다. 그리고 전혀 관여치 않았고 술과의 놀이에만 젖어 살았습니다.   그러던 2012년 어느 날 아내의 사업에 이상 징후가 느껴졌으며 사기 행각에 말려들고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되는 등 엎친 데 덮친다는 말처럼 도저히 헤쳐 나갈 수가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나설 수도 없고 나선다 해도 소용없는, 오히려 방해만 되는 상태가 되어 저는 망연자실하여 속된 말로 집안에 틀어박혀 멍 때리고 있었습니다. 지갑에 돈이 충분하게 들어 있어도 밖엘 나가기가 싫고 같이 즐기던 사람들도 만나기가 싫고 오직 집에서만 술을 마셨습니다. 한꺼번에 술집에서 술을 주문하듯 몇 박스씩 배달을 시켜놓고 하루에 몇 번을 먹는지 얼마나 먹는지 모르게 마셔댔습니다. 이곳에서 처음 들은, 즉 장취 상태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때부터는 간에 대한 검진도 마음에 없었습니다. 술기운이 없어지는 듯하면 괴로운 감정과 두렵고 불안하고 서글프고 오로지 죽고 싶은 마음이 끊이질 않아 하루에 몇 번씩 혼자 울곤 했습니다. 그래서 술이 깨면 죽을 것 같아서 계속해서 무의식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마셔댔습니다. 잔에서 컵으로, 나중에는 컵도 필요가 없고 안주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마침내 2015년 2월 초순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제 방에서 간 혼수로 쓰러진 것을 살림하는 아주머니가 발견하고 모 대학병원 응급실로 가게 됐습니다. 그날 오후에 정신을 차렸고 입원 치료에 들어갔습니다. 모든 검사 결과 수치가 정상으로 나왔는데 입원한 김에 내시경, MRI 등 검진을 받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때 어느 환자가 고관절 골절상으로 들어 왔는데 수술에 앞서 여러 가지 검사 중에 허상이 보이는 듯하며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모습을 봤습니다. 이틀 뒤에는 그와 똑같은 사람이 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모두 묶인 채로 검사를 받았고 수술 후에도 폐쇄 병실에 묶여있게 됐습니다. 주치의에 의해 그들의 상태가 알코올 중독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죽음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으나(아니 오히려 저의 바람이었습니다) 내가 그들처럼 된다면 저의 가정과 이제 딸 하나 낳아 신혼살림에 들어간 아들내외와 예쁜 손녀, 그리고 특히나 저의 아내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에 어쩔 줄 몰라 우두커니 병원 천장만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가족들과 주치의를 모셔놓고 논의한 끝에 이곳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하기로 마음먹고 그날부로 퇴원을 하고 이곳에 오게 됐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하기 전날 밤에도 소주 1병을 마셨습니다. 나에게, 내 인생에 앞으로는 술이 없다는 생각을 하니까 꼭 짝을 잃은 기분이 들어 입원하는 날에도 편의점에 들려 청하 1병을 마셨습니다. 그 청하 1병이 현재까지(10개월) 마지막 술이 됐습니다.   저는 2015년 3월 16일 오후 6병동에 입실을 했습니다. 기억이 나질 않지만 처음에는 제가 간호사님들한테 복장이 불량하다, 간호사로서 소양이 부족하다는 등 온갖 트집을 잡으며 말썽을 부렸다는데 아마도 그것이 저의 금단현상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며칠 뒤 저는 3병동으로 변동이 됐고 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모든 환우들이 이구동성으로 병원을 불신하고 교육을 받기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열정적으로 교육에 임했습니다. 알코올에 의존하는 삶을 산 것이 20여년의 세월이고, 제가 우울증이 심했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저만의 생각이지만 단주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단주와 병행하며 모든 품과 행, 언어도 함께 바른 사람으로 교정해야 하고, 성격 또한 자각해야 될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여 교육과목에도 있는 온전한 생활(바른생활) 교육이 좀 더 중점적으로 해야 단주에, 회복의 길에 재발의 위험이 적어지고, 그러면 화, 분노 관리가 줄어들 것입니다. 저 역시 예외는 아니고 중독자 대부분이 인성에 결함이 많다는 것을 요즘 더욱 느끼고 있습니다.   끝으로 드릴 말씀은 저는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 후 장기간 복용하던 혈압약을 현재는 먹지 않아도 괜찮게 됐고, 협심증 증세로 흉통이 자주(1주일에 2~3번) 있었는데 이곳에서 단주하면서부터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과 치료진들의 은공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10월 18일 9주 교육이 끝나고 이튿날 19일부터 단주에 관한 회복일지를 쓰고 있습니다. 매일,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 일지를 평생 쓸 것이며 저의 삶이 다하는 때에 제2의 삶을 살게 해주신 다사랑중앙병원에 바칠 것을 이 수기를 통해서 약속을 드리는 바입니다. 재차 말씀 드리지만 저는 물론 저의 가족 모두가 다사랑중앙병원과 치료진 여러분께 진정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배움이 짧아 문장력도, 언어구사도, 철자법도 엉터리인줄 알면서도 용기 내어 이렇게 글로 전합니다.  

다사랑 2021-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