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열지 않음

다사랑중앙병원

전국 최초 3회 연속 보건복지부 지정

알코올전문병원 다사랑중앙병원

생생다사랑

  • home
  • 생생다사랑

환자회복수기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치료받은 환자분들의 생생한 회복 경험담입니다.
알코올 중독 치료를 통해 새 삶의 희망을 찾으신 환자분들의 진솔한 회복 수기가
알코올중독으로 고통받고 있는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환자회복수기는 회원가입 후 로그인하셔야 보실 수 있습니다.

[2016 다사랑 재활수기 공모전] 제2의 삶을 살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등록일 2021-02-09 조회수 354 이름 다사랑
첨부파일 2016환자회복수기_썸네일.jpg

[2016 다사랑 재활수기공모전 3등 감사함상]

 

2의 삶을 살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OO

 

저는 1952년생 알코올 중독자입니다. 의학적으로 판명된 것은 아니지만 유전성 영향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알코올 중독이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가진단으로 볼 때 저의 집안은 고려 말 목은(이색) 선생의 후손들로 유교사상이 유별나 부친, 조부, 증조부님까지 술은 잡수셨으나 정도에 맞게 예를 지키며 즐기셨고 작고하신 사인들이 술에 의함이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부친은 충청도 OO 시골에서 한의원을 하셨습니다. 저는 다른 집 아이들보다는 유복한 소년기를 보냈지만 고등학교 시절 뜻하지 않게 집안에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자라는 과정에서 인성교육 등에 많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체벌이 두려워서 표출된 행동은 해보지 못했던 저는 집안에 찾아온 불행과 동시에 비행의 날을 시작하며 처음으로 술을 마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자라는 과정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비행의 길은 1년도 넘지 않았고, 학업은 중단됐으나 부친께서는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는 실정이 돼서 제가 가족들을 이끌고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됐습니다. 소위 말하는 명문가 자식으로 유복하게 자란 저로서는 엄청난 충격과 함께 험한 세파에 좌충우돌하며 가족들을 부양해야 되는 실정 속에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해야만 됐으며 자연히 술을 가까이 하게 됐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충격에 의한 각오가 남들과 달라서인지는 몰라도 접하는 일마다 생각 밖의 성과를 거뒀고 저는 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전역 후에는 안경공장을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을 해봐도 군 생활 중 다른 전우들보다 월등히 술을 좋아했고 주량도 훨씬 많았던 것 같습니다.

 

나이 30세에 현재의 아내와 혼인을 했고 35세에 안경업을 청산하고 부동산 중개와 함께 건축업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거의가 술에 의하여 일을 만들고 술에 의하여 계약이 성사되고 하여튼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술에 의존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을 해보면 술 때문에 되고 안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술판이 아니면 안 될 것만 같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여튼 단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어 매일을 술로 보냈습니다.

 

1987년 초가을, 아마 절기로는 처서가 지나고 백로쯤 됐을 때 같습니다. 아들이 OO초교 1학년 때인데 교복을 입고 있는 상태로 차안에서 잠이 들었고, 저는 잠시 술집에 들어가서 한 잔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차와 함께 아들이 유괴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차는 잃었지만 조상님이 도와주셨는지 천만다행으로 유괴범들이 아들을 24시간 만에 돌려주었습니다.

순전히 술에 의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아들을 잃을 뻔한 일을 겪고서도 술을 끊을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고도 내가 인간인가 싶습니다. 별 죄의식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 후로도 술은 계속됐고 그해 겨울인 듯한데 당시 광화문 근처에서 열린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자리가 끝나고 여자 동창들을 차에 태우고 집에 오는 길에 어느 일식집에서 한 잔을 더 마신 뒤 친구들과는 헤어지고 대리운전을 시켜서 집엘 왔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예물로 받은 고가의 시계(일명 R금딱지)가 제자리에 없었습니다. 아차 싶어서 동창들한테 전화를 해보니 대리기사와 차에 탈 때까지만 해도 시계를 차고 있는 모습을 분명히 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까 차안에서 잠시 동안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전에도 블랙아웃이 가끔 있었는데 그때 후로는 블랙아웃이 일주일이면 2~3번 정도씩 발생했습니다.

 

저의 알코올 중독 시점이 언제부터였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해봅니다.

어찌됐든 간에 사업은 동종업자들이 모두 부러워할 정도로 승승장구 발전했습니다. 작은 빌딩이었지만 사옥을 짓고, 의젓한 건설회사를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사업의 규모가 졸지에 확장되는 것과 동시에 외환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저와 같은 조무래기 기업들은 예견할 수 없던 일이었습니다. 결국엔 각 현장마다 유치권을 행사하는 현수막이 나붙었고 저는 현실도피 행각을 벌였습니다. 책임자 몇 명과 아내가 뒷수습을 하는 상황에서도 저는 뒤에서 술에 젖은 나날을 보내기를 약 2년여 동안이나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외환위기가 회복이 되면서부터 빌딩마다 임대도 매매도 순조롭게 풀리며 모든 부채가 해결됐고, 저는 아직 한참 젊은 나이기는 하지만 이 기회에 모든 것을 처분하고 여생을 편하게 즐기면서 살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또 그럴만한 충분한 여력도 됐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물질에 눈이 멀어 돈을 벌기 위해 불법을 적법으로, 부당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마셔댔는데, 그 후로는 정말로 살판난 것처럼 누리고 즐기고 매일 해외로까지 원정을 다니며 술과 골프에 젖어서 살았습니다.

 

그러기를 약 4~5년 세월을 보내면서도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속담에 맞게 다달이 병?의원을 찾아다니며 간 검진을 자주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지방간 수치가 좀 높을 뿐 큰 이상은 없었습니다. ‘그만큼 마셔댔으면 간경화나 간암이 될 만도 한데 내가 간하나 만큼은 잘 타고 났구나하는 생각을 참 자주 했던 것 같습니다.

 

2008년도 어느 날 돈 욕심인지 일 욕심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내가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접었으니 당신은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다만 우리가 지난 IMF 때 충분한 경험을 겪었으니 그 점을 잊지 말고 절대로 무리한 짓은 삼가달라고 당부의 말만 했었습니다. 그리고 전혀 관여치 않았고 술과의 놀이에만 젖어 살았습니다.

 

그러던 2012년 어느 날 아내의 사업에 이상 징후가 느껴졌으며 사기 행각에 말려들고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되는 등 엎친 데 덮친다는 말처럼 도저히 헤쳐 나갈 수가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나설 수도 없고 나선다 해도 소용없는, 오히려 방해만 되는 상태가 되어 저는 망연자실하여 속된 말로 집안에 틀어박혀 멍 때리고 있었습니다. 지갑에 돈이 충분하게 들어 있어도 밖엘 나가기가 싫고 같이 즐기던 사람들도 만나기가 싫고 오직 집에서만 술을 마셨습니다. 한꺼번에 술집에서 술을 주문하듯 몇 박스씩 배달을 시켜놓고 하루에 몇 번을 먹는지 얼마나 먹는지 모르게 마셔댔습니다. 이곳에서 처음 들은, 즉 장취 상태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때부터는 간에 대한 검진도 마음에 없었습니다. 술기운이 없어지는 듯하면 괴로운 감정과 두렵고 불안하고 서글프고 오로지 죽고 싶은 마음이 끊이질 않아 하루에 몇 번씩 혼자 울곤 했습니다. 그래서 술이 깨면 죽을 것 같아서 계속해서 무의식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마셔댔습니다. 잔에서 컵으로, 나중에는 컵도 필요가 없고 안주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마침내 20152월 초순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제 방에서 간 혼수로 쓰러진 것을 살림하는 아주머니가 발견하고 모 대학병원 응급실로 가게 됐습니다. 그날 오후에 정신을 차렸고 입원 치료에 들어갔습니다. 모든 검사 결과 수치가 정상으로 나왔는데 입원한 김에 내시경, MRI 등 검진을 받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때 어느 환자가 고관절 골절상으로 들어 왔는데 수술에 앞서 여러 가지 검사 중에 허상이 보이는 듯하며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모습을 봤습니다. 이틀 뒤에는 그와 똑같은 사람이 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모두 묶인 채로 검사를 받았고 수술 후에도 폐쇄 병실에 묶여있게 됐습니다. 주치의에 의해 그들의 상태가 알코올 중독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죽음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으나(아니 오히려 저의 바람이었습니다) 내가 그들처럼 된다면 저의 가정과 이제 딸 하나 낳아 신혼살림에 들어간 아들내외와 예쁜 손녀, 그리고 특히나 저의 아내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에 어쩔 줄 몰라 우두커니 병원 천장만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가족들과 주치의를 모셔놓고 논의한 끝에 이곳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하기로 마음먹고 그날부로 퇴원을 하고 이곳에 오게 됐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하기 전날 밤에도 소주 1병을 마셨습니다. 나에게, 내 인생에 앞으로는 술이 없다는 생각을 하니까 꼭 짝을 잃은 기분이 들어 입원하는 날에도 편의점에 들려 청하 1병을 마셨습니다. 그 청하 1병이 현재까지(10개월) 마지막 술이 됐습니다.

 

저는 2015316일 오후 6병동에 입실을 했습니다. 기억이 나질 않지만 처음에는 제가 간호사님들한테 복장이 불량하다, 간호사로서 소양이 부족하다는 등 온갖 트집을 잡으며 말썽을 부렸다는데 아마도 그것이 저의 금단현상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며칠 뒤 저는 3병동으로 변동이 됐고 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모든 환우들이 이구동성으로 병원을 불신하고 교육을 받기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열정적으로 교육에 임했습니다. 알코올에 의존하는 삶을 산 것이 20여년의 세월이고, 제가 우울증이 심했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저만의 생각이지만 단주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단주와 병행하며 모든 품과 행, 언어도 함께 바른 사람으로 교정해야 하고, 성격 또한 자각해야 될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여 교육과목에도 있는 온전한 생활(바른생활) 교육이 좀 더 중점적으로 해야 단주에, 회복의 길에 재발의 위험이 적어지고, 그러면 화, 분노 관리가 줄어들 것입니다. 저 역시 예외는 아니고 중독자 대부분이 인성에 결함이 많다는 것을 요즘 더욱 느끼고 있습니다.

 

끝으로 드릴 말씀은 저는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 후 장기간 복용하던 혈압약을 현재는 먹지 않아도 괜찮게 됐고, 협심증 증세로 흉통이 자주(1주일에 2~3) 있었는데 이곳에서 단주하면서부터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과 치료진들의 은공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10189주 교육이 끝나고 이튿날 19일부터 단주에 관한 회복일지를 쓰고 있습니다. 매일,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 일지를 평생 쓸 것이며 저의 삶이 다하는 때에 제2의 삶을 살게 해주신 다사랑중앙병원에 바칠 것을 이 수기를 통해서 약속을 드리는 바입니다. 재차 말씀 드리지만 저는 물론 저의 가족 모두가 다사랑중앙병원과 치료진 여러분께 진정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배움이 짧아 문장력도, 언어구사도, 철자법도 엉터리인줄 알면서도 용기 내어 이렇게 글로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