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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다사랑 재활수기 공모전] 나를 용서하는 법
등록일 2021-02-09 조회수 384 이름 다사랑
첨부파일 2016환자회복수기_썸네일.jpg

[2016 다사랑 재활수기공모전 2등 온전함상]

 

나를 용서하는 법

OO

이 글을 쓰기에 앞서 이 글은 온전히 나의 경험이고 받아들임이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의 경험과 다를 수 있으니 나의 기준에 맞추어 읽어주길 바란다.

 

간략한 52년 내 인생

1964년생 용띠인 나는 충청도 OO의 평화로운 농촌마을에서 태어나 8살 때까지 조부모(祖父母)님과 살았다. 당시 아버님은 집안의 고집으로 신학문(*지금의 초등학교)을 배우지 못하고 서당에 다니셨고, 할아버님과 농사일을 하시다가 입대를 하여 군대에 계셨다. 제대 후에는 서울로 방직공장(*스웨터 등을 만드는 공장)에 일하러 상경하셔서 어릴 적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조부모님께서 엄하셔서 나도 한학(漢學)을 동몽선습(童蒙先習)까지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편으론 종손으로 태어난 나를 끔찍이도 아끼셔서 가난한 시골 살림에도 당시 촌사람들의 부의 상징이던 흰 고무신도 신고 다녔다.

 

어느 해 여름 긴 장맛비에 백마강 줄기의 냇물이 불어나 동무들과 조개를 잡으러 갔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적이 있는데, 지금도 물에 대한 트라우마로 남아 나를 괴롭힌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제일 먼저 수영학원부터 보냈다. 내가 태어나 두 번째로 잘한 일인 것 같다. 물론 첫 번째로 잘한 일은 두 아이를 태어나게 한 것이다. 지금은 아이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하고 목 안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들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취학통지서가 나와 서울로 상경하였고 군 제대 후 사회에 일원이 되기까지의 일대기는 격동의 80년대를 살아온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참으로 드라마틱하게 살아온 것 같다. 결혼을 하고, 내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인 아이들을 낳고 회사를 설립하고, 일하고 또 일하며 정말 정신없이 살았고 또 행복했던 시절도 있었다.

 

앞만 보고 달리는 기차처럼, 무슨 성공을 위해서도 아니고, 대부분의 가장이 그러하듯이 소소한 일탈도 없이 휴일이면 아이들과 놀러가고 직원들 회식자리 참석하고, 친구들 모임에 나가 술도 마시고 하루하루를 아이들 커가는 즐거움에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내 인생이 이렇게 망가지리라고는 하늘도, 나 자신도, 아무도 몰랐다. 바로 3년 전까지 말이다.

 

내겐 너무 아팠던 그해 겨울

22녀 중 장남이자 종손인 나는, 지금 대학교 2학년인 딸과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이 하나 있는, 혼사 사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냥 알코올 의존증환자이다.

3년 전까지 성실하게 회사를 운영하던 나는, 부유하지는 않지만 남에게 돈 빌려 쓰는 일 없이 아이들을 키우고 아내와는 친구처럼, 오빠처럼, 행복하게 내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며 술을 좋아하는 평범한 가장이었고, 업계에서는 정평이 나있던 능력 있는 오너였다.

2013년 그해 봄부터 시작된 악몽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암의 종류 중에 다발성 골수증이라는 것이 있단다. 골수에서 만들어내는 피가 병들어 있다는 병증이다. 어떻게 이름도 생소한 그놈이 주말마다 산에 다니시고 건강하시던 아버지에게 소리 없이 찾아와 살고 있었는지. 정말 순식간이었다.

 

귀가 잘 안 들리시고, 피가 잘 멈추지 않아서 사촌동생이 교수로 있는 서울OO병원으로 진료를 받으러 갔더니 동생 하는 말이 형님, 준비하셔야 합니다라고, 참으로 매몰차게도 이야기한다. 무슨 몇 년도 아니고 몇 개월도 아니고 검사결과가 나오자마자 하는 소리다. 그저 돌아가시는 것을 지켜보라고 한다. ‘네가 의사 아니냐! 방법이 없냐!’라는 연속극에서나 나오던 말들을 입안으로 삼키며 그렇구나, 그래하는 말들을 수없이 되새기며 언제 올지 모를 날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점점 정신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보면서, 어느 순간 술을 마시고 있는 나를 보면서, 받아놓은 시간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내 눈에 황반병성이라는 불치병이 있다. 한마디로 실명하는 병이다. 치료제는 없고 실명을 늦추는 역할을 하는 항암제를 맞는 것이 전부다. 주사를 어디에 맞는가? 눈에다 맞는다. 눈뜨고 주사바늘이 눈을 찌르는 것을 보았는가? 진짜로 무섭다. 싸움? 낯선 자리의 두려움? 치과? 모르겠다. 하여튼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가장 무서운 두려움이다.

 

그러나 그것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던 내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고 또한 이런 상황과 묘하게 물려 어려워지기 시작한 회사를 핑계로 늘 술을 찾기 시작했고, 항상 내 옆에 술이 마치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이전의 음주 습관과는 또 다른 행동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미처 자각하지도 못한 채 그렇게 73세의 일기로 아버님을 보내드리고 말았다. 형제들과 칠순(七旬) 식사를 마련해 드린 것이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게 나는 아버님을 보내드리고 그때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 독약이 시나브로 내 몸의 반쪽이 되어 나를 잠식해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급기야 술의 도움을 받고

학교를 졸업하고 국내 굴지의 주류회사 계열사에서 근무를 시작했으나 당시 부도위기에 이른 회사의 사정으로 다른 직원들과 함께 프리랜서로 회사외 프로젝트에 투입된 것이 이 평범하지 못한 전산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 후 여러 회사의 프로젝트를 거쳐 능력을 인정받아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고, 꾸준히 성장시켜 나가며 작지만 탄탄한 회사로 이루어냈다. 하지만 시스템이 변화되면서 영세한 중소기업은 살아남기 힘든 환경이 되었고, 직원들 월급날이 되면 임금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 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술을 마시면 그저 기분이 좋아져 호인이라는 평판을 받던 나였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다음날 새벽이면 일어나 일을 하는 이른바 아침형 인간이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낮술, 해장술을 입에 대기 시작하더니 사람들과 어울리기 미안해지고 점점 더 혼자 술을 마시는 습관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돈이 없어 집 근처 공원, 아파트 후미진 곳 등 사람이 잘 안 보이는 곳으로 숨어 들어가 아무 의미 없이 깡술을 마셨다. 도대체 무슨 이유가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는데, 아마도 그때그때 되지도 않는 적절한 핑계거리를 만들어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또 속으로 중얼거리며 마셨던 것 같다.

그래도 집에서는 차마 아이들 때문에라도 이러면 안 되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짐도 금세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 같은 알코올 환자가 그렇듯 집안에 숨길 수 있는 곳에는 어디에든 숨겨놓고 몰래 마시기 시작했다.

 

몰래 먹는다는 것. 그게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아침을 아이들이랑 먹으려면 손이 떨려 수저도 들 수가 없어 밥 먹기 전에 술을 먹고 아닌 척 했다. 바보 같은 나는, 아이들도 아이엄마도 모르는 줄로만 알았다. 금단증상이 점점 심해지자 안주를 집어먹을 힘도 없어 술병 하나, 물병 하나를 가방에 숨겨놓고 병째 한 모금, 안주로 물 한 모금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죽여가고 있었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니고 지쳐서 잠이 들고 깨어보면 깜깜한 밤. 또 밤.

이상하다? 느낌은 낮인데 왜 아무것도 안 보이지?’ 더듬더듬 전등 스위치를 찾으려다 넘어지고, 기어 다니며 그것이 밤이 아니라 내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안 순간 나는 통곡을 했다. ‘이렇게 죽는구나! 차라리 잘 되었다라고 체념을 하면 서서히 보인다. 한동안 장님 상태에서 내가 어질러놓은 방 안이, 그곳에 서 있는 나를 닮은 외계인 하나가.

 

그렇게 술로 나날을 보내던 중 OOO 프로젝트에서 일을 하자는 제의가 들어와서 출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금단증상이 시작되어 손이 떨려 컴퓨터 키보드를 칠 수도, 문서를 만들 수도 없어서 건물 화장실에서 술을 마시며 일을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나중에는 보온병에 술을 담아 마시기도 하는, 정상인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미친놈처럼 출근하다가 그만두게 되었다.

 

병원에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퇴원해서 나올 때마다 했던 굳은 맹세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취직이 안 된다는 이유, 그리고 돈을 벌지 못한다는 이유, 그래서 아이들과도 생이별을 하고 있다는 조급함이 나를 또 병들게 했고 횟수가 많아질수록 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가는 시간도 점점 빨라졌다. 숨이 멎을 것 같고, 세상은 황량해보이고, 나는 갈 곳이 없고 이놈의 술은 왜 먹을까?’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그러나 생활의 일부가 된 술병을 보물단지 마냥 옆에 끼고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내 가족에게 준 선물들

한참 예민한 청소년기의 자식들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준 나는 어디 더 아플 수 있는 사람이 없을까 찾아 궁리를 하는 놈 마냥 머리 풀고 꽃 꽂은 색시가 되어 한 분 남아계신 어머니께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선물을 해드렸다.

통곡, 고통, 가슴을 베어내는 아픔, 또 무슨 종류의 아픔이 있을까?

마치 내가 태어나 그렇게까지 많은 아픔의 단어를 찾아내서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의 영혼까지 파괴하려고 지옥에서 뛰쳐나온 야차같이 변해갔다. 모든 부모가 그렇듯 그토록 사랑하며 내 한스런 목숨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내 자식들에게 삶의 희망인 웃음을 깨끗이 없애버렸다. 힘들어 잠깐 웃음을 기억 못하는 아이가 아니라 아예 잃어버린 아이로 만들었다. 아비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내가 말이다. 생떼(*싱싱하게 자라는 우리나라의 잔디)같은 새끼들의 웃음을 술에게 팔아먹은 것이다. 1000원씩 주고…….

그 어린 것들의 해맑은 웃음을 술과 개 망나니짓을 하는데 팔아먹은 나는 미친놈이다. 그러니 나를 용서할 수 가 있을까? 없다.

 

생이별을 하고 그리운 마음에 사진첩을 뒤적이면 그 어떤 사진 속에도, 동영상 속에도, 다른 기록의 그 어디에도 나는 없다. 마치 유령인간이 된듯하다. 위선만 남아있는 빈껍데기의 만 있을 뿐이다. 능력 있는 가장, 온화하고 친구 같은 아빠, 그리고 다정한 남편. 모든 게 나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면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오고, 나는 또 술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 몽롱한 눈으로 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 목이 마르면 또 술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 징징거리고……. 이게 사람인가. 내가 사람인가. 벌써 세 번이나 병원을 1년 넘게 들락거리며 들인 돈이 얼마인가? 추운 겨울 파산선고를 받은 나 때문에 보일러도 떼지 못한 방에서 춥다고 전화한 아들이 아빠 몸은 어때? 이제 술 안 먹지?” 하면서 오히려 나를 위로하는 목소리가 비수가 되어 온몸을 난도질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 나는 무얼 해야 하는가, 그렇다. 또 술 먹는 것 외엔 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또 하루하루를 죽지못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2015810일 또 막내 동생이 나를 입원시키려고 찾아왔다. 끊어지지도 않는가보다. 형제라는 질긴 끈은. 어지간하면 모른 체 하련만 띠동갑인 우리 막내 동생은 술에 빠져 사는 나를 포기하지 못하고 살려보겠다고 휴가를 내고 찾아와 나를 이곳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시키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어머니와 함께 돌아갔다.

 

왜 나는 상황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을 택한 걸까? 회사일로 힘들어 할 때 가장 내 가까이에 있었고 자식들과 생이별을 하고 마음이 아플 때는 돌아가신 아버님 같았고, 이혼을 하고 힘들 때는 연인처럼 있어줬고, 취업이 안 되어 혼자 있을 때 친구처럼 다가왔고, 몸뚱이에서 썩은 내가 진동할 때에도 의사처럼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내 미친 정신은 그리 생각하도록 조종당하고 있었던 게다. 술에게서…….

결국은 술 앞에 철저히 패배하였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 술은 내게 무슨 영광의 휘장처럼 온몸을 휘감아 돌며 그 안의 발톱을 뿌리박고 내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병원생활

이곳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하기 전에도 같은 치료목적을 가진 알코올 전문병원에서 3개월, 6개월, 6개월 도합 13개월간 입?퇴원을 반복했다. 술에 대한 유해성 교육, 12단계, 미술치료, 음악치료, 음주예방 교육 등 똑같은 교육을 병원에 들어갈 때마다 받았다.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알코올 전문 치료병원의 특성을 소개하면, 일단 폐쇄병동이다. 주치의 허락이 없이는 바깥과 왕래할 수 없는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정신병원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처음에 입원한 병원은 경기도 부천의 OO병원이었다. 처음 가보는 폐쇄병원의 낯섦과 처음 보는 험악한 환자들. 나도 그들과 같은 부류임을 깨닫지 못하고 무시하고, 나와는 격이 다른 사람으로 폄하했다. 그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힘들어하면 겨우 그게 바닥까지 경험한 거냐?’, ‘내가 경험한 것을 너희는 상상도 못할 거다!’ 라는 생각으로, 세상에 나보다 불행하고 힘든 사람은 없다고 별 거지 발싸개 같은 자랑을 해댔다. 그러다 결국은 너도 나도 똑같은 아픔을 가진 환자구나라고 자각을 하며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 치료를 받던 중에 지금은 이혼한 안식구가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를 퇴원시키러 찾아와 점심식사 후 낮잠을 자던 중에 퇴원했다. 입원 3개월 만이었다. 그때는 퇴원하고 나가면 다시 재기하여 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그러나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도 기울어진 회사를 다시 일으킬 수는 없었다. 그렇게 허송세월을 하며 생 단주로 5개월 정도를 보내다가 결국은 한 잔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맥주 한 캔을 먹은 것이 시초가 되어 일주일 만에 방에 숨어 술을 마시는 이전의 나로 돌아가 있었다. 영업을 하려해도 운전은 할 수 없고 손발이 떨려 버스를 올라타지 못하고 식은땀으로 도배를 하는, 전보다 못한 놈으로 돌아가 있었다. 견디다 못해 나는 스스로 일반 종합병원을 찾아가 입원을 했고 입원 이틀 만에 담배를 피우러 가던 기억을 끝으로 기절을 하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눈을 떠보니 하얀 방에 꽁꽁 묶인 나를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이 전에 입원했던 OO병원임을 일주일 만에 알았다. 또 다시 반복된 병원 생활, 똑같은 일상들,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교육들, 종이접기, 독서만이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반송장처럼 그렇게 또 6개월을 살았다.

 

아니, 굉장한 일이 한 가지 있었다. 결국 아내와 이혼을 했다. 이혼신청을 하러 법원에 가는데 병원 측과 의사소통이 잘못되어 급하게 가느라 환자복을 입고 법원에 출두하여 신청을 하고, 한 달 후 우리는 법적으로 남남이 되었다. 양육권, 친권 모두 없이 이젠 세상에 홀로 남아서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외로운 인생이 된 것이었다. 180일 후 또 다시 퇴원했다. 면접을 보는 데마다 내 경력 때문에 취업이 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또 다시 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마치 너무나 술을 사랑한 중국의 시인처럼…….

 

누가 나 좀 살려달라고 수없이 외쳐도 보고, 죽을 결심도 해보고, 그것이 안 되자 나는 점점 더 나락으로 빠져 들어 갔다. 흔히 허송세월(虛送歲月)이라고 한다. 내일 죽을 사람이 간절히 원했다는 오늘을 그렇게 술에 담아 뱃속에 버리고 다시 또 몸에서 썩은 내가 나기 시작하자, 선친께서 아우에게 부탁을 하셨는지 당신 제삿날 동생들이 다 모여 제사를 지내고, 난 또 막내의 손에 이끌려 수원의 OO병원에 입원했다.

 

이젠 병원생활도 몸에 뱄다. 병원이 집 같다. 아주 편한 집, 술에 찌든 나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편한, 그런 집말이다. 어이가 없었다. 이렇듯 익숙하다니…….

3년을 하루같이 나를 믿고 기다려준 나의 어머니, 형제들, 내 새끼들에게 다시는 이런 고통을 주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초심의 마음으로 돌아가 수업도 빼지 않고 듣고, 발표도 하고, 이제는 다신 병원생활을 하지 말자고, 그렇게 증오스럽던 나를 이제 그만 용서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수없이 최면을 걸며 6개월을 또 병원에 있었다. 그런데 용서는 개뿔이다. 이제는 욕도 안 나온다.

 

이제는 정신 차리고 살자며, 떳떳한 애비로 아들로 살아보자고, 다 내려놓고 우선 내 쉴 곳만이라도 마련하고 살아가며 다시 시작하자고 했지만 나도 나를 못 믿는데 뭔 일을 할 수가 있었을까. OO병원에서는 주치의 선생님이 개방병동이라는 곳에서 하루라도 생활을 해보고 퇴원하라는 것도 뿌리치고(‘돈도 한 푼 없고 배운 일용직업 기술도 없이 개방에서 밖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면 또 다시 망가질까봐라는 나름의 이유를 대고) 퇴원을 했다.

이후는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나를 용서할 수가 없다는 이유를 대고 퇴원한 다음 날부터 소주 됫병을 사놓고 먹기 시작했다. 점점 숨기는 기술만 늘어가고 있는 내 모습은, 아마 최고의 거짓된 삶을 살아가는 연기대상감이었을 것이다.

 

다사랑에서의 병원생활

2015810일 다사랑중앙병원에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찾아와 원장님과 상담을 하고 입원을 했다. 그때 원장님은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또 불쌍한 인생이 하나 들어왔구나라고? 아니면 저걸 어떻게 사람을 만드나?” 뭐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셨나 싶다. 아침부터 마신 술은 온몸에 퍼지고 손은 바들바들 떨고, 어머니나 동생이 뭐라 할라치면 내 방어를 하느라 여념이 없고……. 그렇게 상담을 하고 나는 6층으로 올라왔다. 음주 측정을 하는데 간호사 선생님도 놀란다. 수치가 장난이 아니었던 듯싶다. 기계고장 운운했던 걸 보면. 하긴 2리터짜리를 거의 다 먹었으니까.

 

, 이제 늘 그렇듯이 CR(*격리실)에 가서 코끼리 주사 한방 맞고 자야지 하고 있는데 병실로 데려간다. 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스럽다. 다른 병원에서는 무조건 CR로 들어가 주사 맞고 깨어나면 병실로 이동 했는데…….

병실에서 먼저 들어 와 있던 환우에게 글씨를 쓸 수가 없어 간식장부에 물을 시켜달라고 하고는 둘이 가만가만 이야기하다 보니, 이 병원은 다른 점이 몇 가지가 잇다.

 

첫째, 각 단계별로 1,4,9 단계 발표가 있다는 것.

둘째, 관리병동, 개방병동, 재활병동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

셋째, 내가 경험한 병원보다 호텔급이라는 것

(아마 다른 병원에서 생활을 해본 환우라면 이해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재활병동이라는 것이 가장 가슴으로 와 닿았다. 이번에는 무언가 될 것 같다는 희망을 품기 시작했고, 또다시 시작된 교육도 새롭게 바라보니 나름 또 더 배울 것이 있었다. 쓸데없는 병원생활에 대한 자만이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원장님의 한 마디는 나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치료를 하지 말고 나를 위해 치료를 해야 합니다.”

순간 내 뒤통수를 뭔가 치고 갔다. 어쩌면 정말로 그랬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니 맞는 것이다. 어이가 없다. 그 오랜 병원생활을 나 자신이 아닌 걱정하는 이들을 안심시킨다는 명목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도 후회스러워 그날 저녁 곰곰이 짚어 보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고 가족에게 죄송스럽고 나에 대한 미안함에 차마 하늘을 볼 수도 없었다.

 

나는 나를 용서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용서라는 포장 뒤에 숨어 있으려 했기 때문에 여태까지 진심으로 나를 되돌아보질 못한 것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나의 잘못된 점과 바꾸어야 할 점을 찾아보니 너무나 많아 삶 자체가 거짓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잘한 점을 찾아보기로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없다. 아무것도. 철저하게 아무것도 없다. 이건 가슴이 끊어지는 아픔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살았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마를 새 없이 비처럼 내린다.

 

다음날 담당 상담사님을 만나 나를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마침 면회 온 동생과 함께 갔는데 겸손이라고 단번에 말씀하신다. 그동안 무수히 들었고 배웠고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것도 위선이었던 것이다. 모든 병원의 관계자들 의사, 간호사, 보호사 등이 다 똑같이 치료해주고 보듬어 주며 치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겠지만, 다사랑중앙병원이 나랑 맞아 떨어진 것 같다. 특히 치료 프로그램이 나에게 새 삶을 찾을 수 있는 용기를 준 것 같다.

 

올 초 단주를 위한 신년 계획에서 나는 주저함 없이 정확한 계획 없이 퇴원을 안 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나를 이제 조금이나마 알기에 그럴 것이다. 섣부른 판단으로 다시 또 죄인이 되고 싶지 않기에…….

 

재활병동에서의 새로운 다짐

관리병동에서의 1단계 발표, 개방병동에서의 4, 9단계 발표 후 재활병동으로 옮긴 지 벌써 두 달이 되었다. 절대 서두르지도, 조급해 하지도 않겠다는 그동안의 다짐을 다시 돌이켜보며 지금처럼 내가 평온해지기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고 지켜준 나의 가족들에게 너무도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다. 있다면 내가 온전히 살아가는 길뿐. 지만일 퇴원을 했다면 또 다시 전과 같은 똑같은 일상으로 틀림없이 돌아가 어둠 속에서 허덕이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에게 이런 축복의 기회를 주신 병원에 감사를 드리며, 그동안 거쳐 왔던 다른 병원에서 만난 환우들도 항상 좋은 소식만 들리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내 생각에 조금 더 있다가 퇴원했으면 하고 아쉬워했던 환우들과 그동안 정이든 환우 여러분도 항상 건승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한다.

 

이제 다음달 10일이 되면 이곳에 입원한지 6개월째다. 그토록 용서하지 못했던 나를 일부나마 용서하고 진정한 나만의 의미인 재활(再活)’을 이루고 더 나아가 갱생(更生)’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병원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