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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랑중앙병원에서 치료받은 환자분들의 생생한 회복 경험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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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중독으로 고통받고 있는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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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다사랑 재활수기 공모전] 꿈을 향해 가는 오늘 저는 행복합니다
등록일 2021-02-09 조회수 351 이름 다사랑
첨부파일 2016환자회복수기_썸네일.jpg

[2016 다사랑 재활수기공모전 1등 다사랑상]

 

꿈을 향해 가는 오늘

저는 행복합니다

OO

 

살려 주세요 아빠! 잘못했어요.”

-

여자아이가 아빠에게 살려달라고 소리칩니다. 무엇인가로 두들겨 맞는 소리가 납니다.

죽어라. 죽어! 내가 그렇게 하지 말랬지!”

정말로 아이를 죽일 작정인가 봅니다. 벌써 몇 시간째 남자는 아이를 때리고 있습니다.

 

옆에서 아이엄마와 할머니가 말리는 소리도 납니다. 아이 잡겠다고.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아이엄마가 울며불며 소리를 지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 소리와 함께 할머니와 아이엄마가 소리소리 지르며 통곡합니다. “아이고, 불쌍한 것! 우리 불쌍한 아가, 어쩔꼬. 아이고 아이고하며 울며불며 소리칩니다.

 

그때 저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귀를 벽에 딱 붙이고 쭈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결국 죽었구나! 어떡하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그리고는 전화기를 들어 112에 전화를 했습니다. 아이가 죽었다는 얘기는 못하고 옆집에서 큰일이 난 것 같다고, 아빠가 애를 계속 때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얼마 뒤에 사이렌 소리가 나고 옆집의 곡소리는 조용해졌습니다. 전화벨이 울립니다. 저는 전화를 받습니다. 저와 통화를 했던 경찰이었습니다. 제가 신고한 그 집에는 아무 일도 없다고 했습니다. 정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맥없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한참을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게 있었습니다. 제가 겪은 금단현상 중 가장 생생하고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20살 때부터 직장생활을 하며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함께 일하는 선배 언니에게 처음 술을 배웠습니다. 처음 마신 술은 다른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크윽”, “소리를 낼 만큼 쓰지 않았고 취하지도 않았습니다. 달콤하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좋다고 해야 하나, 나른하고도 편한 기분이었습니다.

 

초창기에 술을 마실 때에는 그런 느낌으로 마셨습니다. 오랜만에 학창시절 친구를 만나거나 회사에서 회식을 하면서 삼삼오오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맛있는 것도 먹고 한바탕 수다도 떠는 즐거운 자리에 즐거움을 더하기 위해 술이란 도구를 사용하였습니다. 결혼을 하여 두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였을 때, 이때가 제가 유일하게 술을 마시지 않았던 때입니다.

 

결혼 후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아이들 아빠가 운영하던 사업체가 IMF 여파로 첫 번째 부도가 났습니다. 그 뒤로 계속하여 재기하려고 하였으나 하고 있던 사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어 결국에는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털어놓는 빚잔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빚잔치로 끝나지 않은 빚쟁이들 때문에 애들 아빠는 1년간 숨어 지냈고 나는 아이들과 셋이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1년 뒤 집으로 돌아온 애들 아빠는 온통 머릿속에 사업을 다시 시작할 생각뿐이었습니다. 어렵게 들어간 회사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몇 달을 못가 그만두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렇게 회사를 몇 군데 옮겨 다니며 애들 아빠는 사업을 해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돈이 어디 있어서 하느냐둘이 열심히 일하면 애들하고 먹고 살 수 있다고 어르기도 하고 달래기보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년 정도를 애들 아빠와 씨름을 한 것 같습니다. 맨 정신보다는 술을 마시며 했던 적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싸우면서도 열심히 일하면 아이들하고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을 놓아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날도 밤새 싸웠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와 보니 이미 술을 마시고 있던 애들 아빠와 서로 말로 줄 수 있는 상처는 다 주며 싸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음날 아침, 자고 있는 애들 아빠를 두고 두 아이 손을 잡고 학교에 데려다준 뒤 저는 직장으로 출근하였습니다.

그날 저녁 퇴근해 집에 오니 애들 아빠는 가방에 옷가지를 넣고 쪽지 한 장 남겨두지 않은 채 사라졌습니다. 정말 바람처럼 사라졌습니다. 큰 아이가 12, 작은 아이가 8살 때입니다. 어느덧 11년의 세월이 흘러 큰 아이는 올해 23살이 되었고 작은 아이는 19살이 되었습니다. 11년 동안 살았는지 죽었는지, 애들 아빠의 소식을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매일 소주가 없으면 살 수가 없게 된 때는 2005, 애들 아빠가 집을 나간 후부터였습니다. 처음에는 며칠이 지나면 들어오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화도 나고 분하고. 내 감정을 어떻게 정리할 수도, 처리할 수도 없었습니다. 가슴은 몽둥이로 치듯 두근거리기가 일쑤였습니다. 불안하고 초조하여 전화기만 바라보고 어찌할 줄 모를 때, 소주를 한두 잔 마시면 일단 두근거리는 가슴이 편해졌습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웠었는데 잠을 잘 수도 있었습니다.

 

애들 아빠의 가출이 길어지면서 저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했습니다. 밤이면 잠든 두 아이를 보며 내가 이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한숨지으며 술로 밤을 새웠습니다. 무엇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나? 어떤 일을 해야 하나? 몇 달간 고민 끝에 제가 선택한 것은 다른 직업보다 돈을 많이 번다는 골프장 캐디였습니다. 이력서를 내고 처음 일하기 시작한 때가 지금처럼 겨울이었습니다. 힘든 교육을 받으며 정식 캐디가 되는 데까지 3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처음 1년은 하루에 20km씩 걷고 뛰는 일이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그만큼의 대가가 주어졌기에 힘든 줄 모르고 7년이란 시간을 한 골프장에서 일했습니다. 이때에도 저의 음주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면 아이들 반찬거리와 함께 소주 2병은 항상 장바구니에 담겨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집안일을 하고 다음날 먹일 아이들 반찬을 만들며 소주를 마셨고, 술이 모자라다 싶으면 집 앞 구멍가게로 달려가 더 사다 먹기도 했습니다. 골프장에서 일을 하는 낮에는 고객이 사주는 음료수를 맥주로 바꾸어 먹기도 하고, 동료들과 코스 보수 후 피곤함을 핑계로 막걸리를 한두 잔씩 먹기도 하였습니다.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그렇게 술을 마셨습니다.

 

그렇게 7년간 일하며 무리가 되었는지 복숭아뼈 부분에 물이 계속 차올라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골프장을 그만두고 일반 사무실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아이들도 어느 정도 커서 더 이상 제 손이 가지 않아도 되었고 저는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는 동료들과의 저녁 술자리가 잦아졌고 명절이나 휴가 때에는 혼자 낮이나 밤이나 술을 마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항상 내 손이 필요했던 아이들이 크면서 자신들만의 세계가 생기고 혼자만의 시간이 많아지면서 외로움을 탄 것 같습니다. 결국 자기연민에 빠지게 되고 저의 그릇된 망상으로 자신을 혼자만의 세상에 가둬놓고, 모든 것을 술에 의지하고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감사하고도 다행인 것은 두 아이가 저의 부족한 보살핌에도 엄마의 수고를 알고 감사하게 생각할 줄 아는 착하고 건강한 아이들로 커 주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랑해주며 정말 밥만 해줬는데도 아이들은 누가 보아도 혼자 키운 아이들답지 않게 밝게 커 주었습니다. 저는 제가 아닌 아이들이 믿는 하나님께서 아이들을 키워 주셨다고 생각하며 이때부터 아이들을 따라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에 나가고 3년쯤 되었을 때 술을 줄이든지 끊던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때쯤 처음으로 블랙아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술은 나의 생각과 의지대로 줄여지지도 끊어지지도 않았습니다. 며칠은 꾹 참기도 하였지만 얼마 못가 또 술잔을 잡고 있었고, 오늘까지만 마셔야지 하면서도 그것은 마음 뿐 도저히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 되어버리곤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4년 정도를 마셨다 끊는 조절음주를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알지 못하였지만 그만 마셔야지라고 마음먹고 술 마시기를 멈추었을 때나 더 이상 몸에서 받아주지 않아 술 마시기를 멈추었을 때, 저는 끔찍한 금단현상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던 큰 아이는 치료를 받아보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20147월에 아는 지인이 알려 준 인천의 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입원하고 보니 그 병원은 알코올병원이 아닌 정신병원이었습니다.

 

창문 하나 열 수 없게 모두 막아놓았고 정신분열증 환자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폐쇄된 공간에서 그들과 매일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함께 하는 것은 제게는 지옥에서 지내는 것처럼 괴로웠습니다.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간단한 책 읽기, 종이접기, 몸이 불편한 사람을 도와주는 일 뿐이었습니다. 그나마 그곳에서 2개월 동안 있으면서 제가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나보다 불쌍한 사람도 많다는 것과 이런 곳에 다시 오지 않으려면 술을 마시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해 겨울, 아들이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군대에 들어간 아들이 보고 싶은 마음에 술의 유혹도 있었지만, 병원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6개월 동안 술을 끊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병식이 전혀 없었던 저는 너무 피곤한 몸으로 잠을 잘 수 없어서 맥주 한 캔 정도는 괜찮겠다는 생각에 술을 다시 마시게 되었습니다. 첫 날은 맥주 한 캔으로 끝났지만 그 다음 날에는 더 많은 양의 맥주가 필요했고, 그 다음날은 맥주가 아닌 소주가 필요했습니다.

 

퇴원할 때는 술을 마시면 다시 입원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 때문에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그때는 제 몸 생각보다는 다시는 정신병원에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술을 다시 마시게 되면서 저는 고통의 날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금단현상은 저를 거의 미칠 지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 때 제 옆에서 시린 손과 발을 주물러 주고, 토할 때면 등을 쳐주고, 아무것도 넘기지 못할 때에는 죽을 끓여 입에 넣어주는 딸아이가 있었습니다. 딸은 항상 제 곁에서 술을 찾는 저를 안타까워했고 금단증상을 겪는 저를 보며 같이 아파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혼자서는 술을 끊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난 20158, 이곳 다사랑중앙병원을 미리 예약해놓고 보호자인 아들이 군에서 휴가를 나올 때를 맞춰 저를 입원시키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대해 나쁜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저는 병원에 오면서도 아들에게 애원하며 매달렸습니다. 다시는 술 안 먹겠다고, 집으로 다시 가자며 혼자서 술을 끊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내 말을 어느 정도 믿게 되었는지 딸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으나, 딸아이는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딱 잘라 엄마가 가지 않겠다고 하면 차에서 내려 EMS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저는 딸아이의 말에 모든 것을 체념하고 아들 손을 잡고 병원으로 와 입원 수속을 밟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9층 병동에 들어서는 순간 저는 이전 병원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딸아이가 정신병원이 아니라 알코올전문병원이라고 하더니 정말로 다른 것 같아서 일단은 안심하고 주말을 지냈습니다. 월요일 회진 때 원장 선생님과 상담사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고 그날부터 병원의 프로그램을 시작하였습니다.

 

첫날 중독학 시간에 수업을 듣고 나서 저는 무엇인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알코올 중독이라는 그 단어가 제 머릿속에 박힌 듯한 느낌, 그 느낌이 싫지 않았습니다. 수업이 끝난 뒤 알코올 중독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쯤 상담사 선생님께서 부르셔서 첫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선생님께서 제게 하셨던 말씀을 제 머리와 가슴 속에 생생하게 담아두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입니다.

 

평생 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는 않겠지만 지난 날 어떻게 술을 마셨든지 지금부터 병원의 프로그램에 충실하면 안 마시고도 살 수 있습니다. 저도 알코올 중독자입니다. 저는 선생님보다 더 심하게 망가졌던 알코올 중독자였지만 이제는 술을 마시지 않고 살고 있으며 이렇게 일도 하고 있습니다. 저도 광주 다사랑병원에서 치료받고 새롭게 회복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아홉 번 재발하였으나 10년 넘게 술을 마시지 않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꼭 6개월 지났습니다. 그동안 저에게는 너무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치료진의 진단을 온 몸과 머리,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시인했습니다. 수업이나 책을 통하여 제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사실을 수없이 많이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알코올 중독이 되었고 그동안 혼자서 끊어보겠다고 발버둥 쳤으나 끊을 수 없었던 것은 내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이미 중독이 되어서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술만 안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마음을 고쳐야 하고 겸손하고 정직해야 한다는 것, 또 모임 안에 있어야 술 없이 온전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상담사 선생님과 함께한 단계지 작업을 통하여 술 마시기 전의 나를 만날 수 있었고 내가 진정 어떤 사람이었고 술로 인하여 어떻게 변해 버렸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술로 괴롭혔던 나와 화해할 수 있었고 아이들과 또 가족에게 나의 진심을 다해 사죄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항복했을 때, 나의 위대하신 힘께서는 나에게 술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주셨고 마음의 평온함과 지혜도 함께 주셨습니다.

 

개방치료를 마친 뒤 퇴원하지 않고 재활을 선택한 것은 내가 새로운 삶을 살아갈 때에 가장 밑바탕이 되는 주춧돌을 단단하게 쌓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병에 대한 병식만 알고 사회로 나아갔을 때의 두려움도 있습니다. 지난 6개월간 치료를 받으며 제게는 하고 싶은 일과 꿈이 생겼습니다. 예전처럼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필요한 곳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힘이 들어도 보람된 일을 하고 싶습니다.

 

얼마동안이나 재활병동 생활을 할진 모르겠지만 이제 저는 시작했습니다. 제가 병원에서 퇴원하여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힘이 되고 나를 잡아줄 버팀목을 하나씩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재활치료를 하며 탄탄하게 해 놓아야 하는 것은 생활의 균형을 잘 잡는 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아이와 함께 하는 가정생활, 사회에서 일해야 하므로 어떻게 어떤 일을 하는 것도 제게는 중요합니다. 그리고 모임 생활, 신앙생활 이 네 개의 바퀴가 균형 있게 잘 돌아가야 저는 술을 마시지 않는 알코올 중독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재활치료를 받은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저는 모임생활이 온전한 생활의 한 바퀴가 되게 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빠지지 않고, 휠에 녹이 슬지 않게, 다른 바퀴와도 균형이 맞게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임에서 경험담을 들으며 같은 알코올 중독자들이 겪는 아픔과 고통을 함께 느낍니다. 모임 안에서 힘과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러 선생님들의 소중한 경험은 제게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값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힘이 저를 지탱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혼자가 아닙니다. 저에게는 저만의 위대하신 힘이 항상 저와 함께 하십니다. 또한 저의 또 하나 위대하신 힘 상담사 선생님도 함께 하시고 병원의 치료진 선생님들, 여러 환우 선생님들도 제가 회복의 삶을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힘이십니다.

 

저는 다사랑중앙병원에서 6개월간 치료 받으며 병원에 세팅되어 있는 프로그램의 힘 또한 대단한 것임을 믿고 있습니다. 47살이라는 나이에 27년을 술을 마시며 살아왔습니다. 병원의 프로그램을 진심으로 믿고 따라하며 저는 술을 마시며 잃어버렸던 나를 찾게 되었습니다. 27년간 잃어버렸던 나를 찾게 해준 다사랑중앙병원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치료를 받게 도와준 오빠와 동생, 가족들에게도 감사하고 병원으로 오게 해준 딸과 아들에게도 감사합니다.

 

이제는 자식을 위한 삶이 아니라 엄마 자신의 삶을 찾으라는 딸의 말이 생각납니다. 재활치료를 받는 동안 기초적인 생활의 패턴을 잡으며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 저의 1차 목표입니다. 알코올 중독자가 있는 병원에서 그들과 함께 하며 아픔과 고통 그리고 기쁨과 희망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제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이었던 상담사 선생님처럼 저도 아프고 고통 받는 알코올 중독자에게 빛과 희망이 되고 싶습니다. 그들과 함께 할 때에 나도 함께 회복되어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며 알코올 중독에 대하여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또 알코올 중독의 병에 대하여 더 많이 알리고 싶습니다. 고통 받고 있는 자신이 알코올 중독인지 모르고 중독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그들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 밑바탕을 튼튼히 하기 위해 오늘도 저는 병원생활을 열심히 하고 모임에도 갈 것입니다. 어느새 저는 모임 안에 있을 때 편안함과 안도감을 느낍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좋은 거름으로 밑바탕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재활 한 달째. 짧지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제게는 이미 많은 것이 좋은 거름으로 채워졌습니다. 재활의 첫 단추가 잘 끼워졌습니다.

 

저는 오늘도 두 번째 단추도 잘 채워지길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이제껏 삶을 살며 저만을 위해서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는 제게 하고 싶은 일이 생겼고 꿈도 생겼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를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오늘이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