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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감사와 희망으로 바뀐 아침 햇살
등록일 2021-02-09 조회수 501 이름 다사랑
첨부파일 2018환자회복수기_썸네일.jpg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

 

감사와 희망으로 바뀐 아침 햇살

 

○○

 

창문 넘어 내리쬐는 햇살에 눈이 떠졌다. 방에 비치는 이 햇살이 누군가에게는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햇살이며 생명을 움트게 해야 하는 대지에는 꼭 필요할 수밖에 없지만 그때 내게는 술로 인해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느 날의 햇살일 뿐이었다. 눈을 뜸과 동시에 또다시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설렘보다는 술을 마시지 않음으로 인한 식은땀과 불안, 두려움이 나를 채웠다. 이런 두려움과 공포가 그렇게도 싫으면서도 난 술을 멈출 수가 없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가늠할 수도 없는 지경까지 갔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생각했다.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저 햇살을 받으며 집 앞에 있는 슈퍼로 달려가 소주 한 병을 들이켜야지. 그러면 이 두려움과 공포를 없앨 수 있을 거야!’ 마음이 분주해졌다. 그런데 그때 기억 저편에서 무엇인가 떠올랐다. ‘! 이제 그 집도 나에게는 외상을 주지 않는다고 했지. 나쁜 자식 그 까짓것 얼마나 한다고.’ 그러나 내게는 동전 한 닢도 없었다. 팔순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노령연금 20만 원도 찾아 어제 마지막으로 산 소주를 내 목구멍에 털어 넣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는 이러한 상황이 부끄럽기보다 당장의 소주 한 잔이 간절했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내게 소주 한 병을 준다면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으며 생명을 움트게 하는 햇살이 내게는 불안과 두려움을 갖게 만드는 햇살이었다.

 

악연도 이런 악연이 있나 싶은 술을 처음 만난 것은 아주 어렸을 때이다. 나는 서해안 작은 어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지금이라면 뉴스거리가 될 정도로 많았던 아버지의 형제는 12명이었다. 그래서 집에는 항상 많은 사람이 북적였다. 결혼하지 않은 삼촌들의 친구들이 언제나 집을 찾아왔고 꽃게 잡는 배를 운영하신 아버지의 배 선원들도 많이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바닷가여서 그런지 험한 뱃일을 해서 그런지 주변에 많은 사람이 항상 술에 취해 있었고 늘 술을 접하고 살았던 것 같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기름보일러나 전기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아서 항상 나무를 해 불을 지펴 밥을 했다. 지금보다 열악한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술은 지금이나 그때나 쉽게 살 수 있었다. 그 어린 나에게도 어른들은 마을 초입에 있는 양조장에 막걸리 심부름을 보냈다.

 

하루는 산을 다녀오신 할아버지가 산더미 같은 솔가지를 지게에 지고 저 멀리서 집으로 오고 계셨다. 할머니께선 가장 큰 사발에 막걸리를 담아 신 총각김치를 옆에 두고 할아버지가 도착하시기만 바라보고 계셨다. 굵은 땀방울을 뚝뚝 흘리시던 할아버지는 작대기로 지게를 받치고는 바로 막걸리 사발을 들이키셨다. 꿀꺽꿀꺽 목젖을 상하로 움직이며 그 많은 양을 단번에 마시고는 ~ 아주 시원하다! 아이고 살 것 같다!” 하시면서 막걸리 사발을 내려 놓으셨다. 6살이던 나는 할아버지의 시원함을 헤아릴 수 없었다. ‘왜 술을 할아버지가 저렇게 좋아하시고, 대체 어떤 맛이기에 시원하다고 하실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느 날 할머니가 내게 막걸리 심부름을 시키셨다. 아직 어렸던 나는 크나큰 양은주전자가 부담되었지만 할아버지를 위해 막걸리를 가득 담아 논두렁을 걸어오는 중이었다. 그때 할아버지의 시원함이 궁금했다. ‘대체 얼마나 시원하기에 우리 할아버지는 그 많은 양을 단번에 마실까?’ 주변을 살펴보니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 주전자 뚜껑에 막걸리를 담아 한 모금 마셔 봤다. 이 한 모금이 훗날 두려움과 불안으로 내게 엄습해 올 햇살인지도 모르고 막걸리를 목에 넘기기 시작했다. 시큼하고 시원하지도 않고 쓴맛도 있는 이것을 어른들은 왜 그리 시원하다고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내리쬐는 햇살을 머리에 쏘이며 난생처음 마신 막걸리 한 모금은 어렸던 나에게 흔히 말하는 알딸딸함을 가져다줬다. 이것이 내가 처음 술을 만난 기억이다.

 

동전 한 닢도 없는 내가 술을 먹을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과 불안은 더 심해졌으며 머리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방에는 전날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도 없는 술병들이 정신없이 굴러다녔다. 이제는 말하기도 보기도 무서운 막내아들을 피해 어머니는 간절히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께 막내아들을 살려 달라 기도하시러 기도원으로 피신 아닌 피신을 하셨다. 아파트 앞 슈퍼에서는 이제 외상도 안 된다고 하였기에 더 이상 그곳에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주인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들끓기 시작했다. 꼬마 녀석들이 놀이터에서 놀다 동전을 떨어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그곳도 여러 날 뒤졌지만 매번 허탕만 치고 돌아와 더욱 감정이 격해졌었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구급차 소리를 듣고 번쩍 떠올랐다. 한 사람의 생명을 안타까워한 것이 아니라 저 구급차를 타고 죽은 사람을 처리하는 장례식장에 가면 술을 먹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이성으로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술을 마셔야 한다는 생각에 오산 장례식장으로 무작정 걸었다. 나의 이성이나 나의 몰골이나 나의 상태는 술을 마셔야 한다는 뇌의 갈망에 사로잡혀 그 무엇도 가로막을 수 없었다.

 

다 낡아진 슬리퍼를 신고 반바지를 입고 무작정 장례식장으로 들어가 앉았다. 서울역 노숙자같이 허름한 모습이었던 나는 아무 연고도 없는 장례식장에 턱 하니 앉아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웅성대는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술을 마셔야 한다는 간절함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 같다.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 상주가 측은한 눈빛으로 육개장과 술을 내줬다. 마시고 가라고 그리고 부족하면 이야기하라는 소리에 연거푸 고개를 숙이고 바로 앉은 자리에서 소주 3병을 마셨다.

 

무슨 생각을 하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술이 이미 나의 머리를 잠식해 올바른 판단이나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술이 몸속으로 들어가니 그제야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졌고 지금 내가 어디에 와있는지 알게 되었다. 부끄러움이 들면서도 지금 내 수중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얼큰하게 마신 술기운을 빌려 상주에게 술 5병만 달라고 했다. 상주는 술이 거나하게 올라온 내가 소란을 피울까 걱정해서인지 소주 5병과 육개장을 담아주었다. 나는 크나큰 보물을 얻은 것처럼 그것을 들고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어느 누군가에게는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햇살이고 대지에는 생명을 움트게 하는 따사로운 햇살이지만 나에겐 그저 술을 마시고 술을 얻었다는 기분 좋은 햇살로만 여겨졌다. 검은 봉지에 소주 5병을 담아 승리에 취한 개선장군처럼 술에 취해 슬리퍼를 질질 끌며 집으로 돌아왔다. 분명 내일 아침도 오늘과 똑같은 햇살을 받을 테지만 나의 머리는 술로 인해 그것까지 생각하진 못하고 있었다.

 

술은 나의 의지로만 해결할 수 없다! 지속적인 약물과 교육 또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을 바꾸지 않는다면 절대 단주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2014, 병원 관리병동에 입원해 지금까지 술로 인한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되짚어 보며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 술은 어렸을 적 보았던 할아버지가 힘든 노동 후 마실 때 느끼시던 시원함과 기분 좋음으로 기억돼 내 안에 내재해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남용하였고 그러다 보니 의존증이 되었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술을 마시지 않고 있는 이 순간도 입에 첫 잔을 대는 순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40년 넘게 내 안에 쌓여온 습관들은 절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조급함, 이기적인 생각, 중독적 사고, 나만 피해자라는 생각까지 술로 인해 나에게 남은 것 중 그 어떤 것도 좋은 것이 없었다. 나는 습관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조급한 성격으로 인해 5분을 넘지 않았던 식사 시간에는 의식적으로 숫자를 세며 식사를 하였고, 오른손잡이인 내가 왼손으로 양치질을 하며 의식적으로 왼손잡이가 되도록 노력하였다. 신호등에서는 일부러 신호가 한 번 더 바뀔 때까지 기다렸다 건넜다. 이러한 습관들은 절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가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처절했던 장례식장의 마지막 햇살을 상기했다.

 

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지키려고 하고 있다. 하루 세끼를 거르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으며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도록 노력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쌓인다!”라는 주치의 원장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성경 말씀이 또 불교를 믿는 사람에게는 법전이 진리인 것처럼 알코올 의존증을 가진 나에게는 A.A.가 진리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수년간 경험을 통해 A.A.를 떠나서는 절대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지키고 또 나라는 사람이 가졌던 습관을 버리려고 노력하다 보니 지금은 다사랑중앙병원의 환자가 아닌 가족이 되었다.

 

가끔 한 번씩 몸이 술을 기억해 진한 몸살을 앓듯이 술이 생각나지만 오늘 내리는 햇살이 불안과 두려움이 아닌 가을 냄새 물씬 풍기는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기에 감사함을 느낀다. 아무 연고도 없는 장례식장에 술을 마시러 갔던 기억은 지금의 나에게 끝없는 동기 부여가 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가는 계절을 느낄 수 있고 희망을 채워 나갈 수 있기에 따사로운 햇살에 아직도 익숙지 않은 왼손으로 양치를 하며 나를 다잡아 본다.

 

오늘의 ○○! 출근해서 식사할 때 한 숟갈 한 숟갈 너의 나이만큼 씹어보자! (하 하 하) 시간이 오래 걸리겠는데 (히히) 그래도 좋다. 오늘 하루도 온전한 정신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기에! 또 꿈을 하나씩 이루어 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