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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생의 한 가운데에서
등록일 2021-02-09 조회수 337 이름 다사랑
첨부파일 2018환자회복수기_썸네일.jpg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최우수상]

 

생의 한 가운데에서

 

○○

 

인생은 한 점 뜬구름이 아니다. 한 조각 빵이 될 수도 없다. 그러나 왜 우리는 부는 바람 속에서 상처를 키우며 흐르는 물속에서조차 목마름을 느끼는가! 저 어둠 때문인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의 한 가운데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갈래머리 여고 시절 어느 책에서 읽었던 글귀입니다. 지금은 무슨 내용인지, 어떤 뜻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제 삶의 여정이 이와 같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저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제 기억의 첫 페이지는 아주 어린 시절 그때가 대여섯 살쯤 되었나 봅니다. 집이 아닌 낯선 곳에서 마루 기둥에 끈으로 묶여 있던 저는 엄마를 찾으며 눈물과 콧물, 땀에 범벅으로 된 채 울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자전거에 실려 탱자나무 울타리 쳐진 담장을 따라 엄마가 계신 집으로 오는 데서 기억은 끝이 납니다.

 

얼핏 얼핏 지나가는 흑백 필름 같은 기억과 엄마의 보충 설명에 따르면 제가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입에 풀질하기조차 힘든 가정형편 때문에 15녀의 우리 집은 이산가족이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고 합니다. 막내인 저는 아이가 없는 이웃집에 주었는데 제가 낮이고 밤이고 울기만 해 도저히 키울 수가 없어 도로 집으로 데리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 떠돌이 인생 서막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첫 번째 새아버지와 두 번째 새아버지 집을 거쳐 외갓집과 작은아버지집, 언니집, 오빠집을 두루 거치며 성장하게 됩니다.

 

어머니와 함께 있었던 것은 불과 몇 년뿐이었고 기억에도 없는 언니와 오빠 집에서의 생활은 어린 제게 두려움그 자체였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술 문제가 있었고 결국은 술이 원인이 되어 병으로 돌아가셨으며, 첫 번째 새아버지 역시 괴팍스러운 알코올 중독자셨습니다. 작은아버지와 오빠 또한 술병을 끼고 사는 중독자였기에 어린 저는 술만 보면 무서워 도망을 치곤 했습니다.

 

그러다 방학 동안 칼국수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를 예뻐해 주던 언니가 낮에는 멀쩡하게 일을 잘하다가도 밤만 되면 술을 마시고 온갖 주사를 부리며 울면서 뛰쳐나가 자주 그 언니를 찾아다니느라 곤욕을 치르곤 했습니다. 언니는 제가 일했던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을 마시고 똑같은 행동을 했고 당시에는 그 모든 것이 저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저는 취업을 하였고 직장에서 남편을 만나 어린 나이에 결혼하였습니다. 제 술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은 둘째 아이를 낳고 나서입니다. 저는 술을 처음 마실 때부터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유난히 빨리 취했고 취하면 난폭해지고 온갖 주사를 부리다가 엉엉 울며 뛰쳐나갔으며 집에 가서도 혼자 술을 마시곤 했습니다. 제가 그토록 싫어했던 첫번째 새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아르바이트할 때 만난 언니의 진상 모습들이 고스란히 저에게서 나타났습니다. 해장술을 마시는데 걸린 시간도 불과 한 달도 채 안 걸렸습니다. 아이 젖을 물릴 때도 술이 필요했고 환청, 환각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술이 있어야 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큰아이의 손에는 책가방 대신 술병이 들려 있었고 그것을 제게 주어야만 학교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저는 이성 문제까지 남편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저의 술 문제가 드러나면서 남편의 폭력도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느끼기도 전에 저는 남편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졌고 아주 작은 녹음기에서 저와 이성의 통화 내용이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날로 저는 제 삶을 모두 다 포기했습니다. 아니 사람이기를 인간이기를 저 스스로가 모두 다 놓아 버리고 오직 술로 도피하며 중독의 늪에 빠졌습니다.

 

그러다 쓰러지면 남편은 시댁인 전주에 저를 실어다 놓곤 했습니다. 4대가 함께 사는 시댁이었기에 모든 가족의 눈이 저를 지켜보며 감시했고 어찌어찌 술 없이 몇 달을 버티다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서야 겨우 수원 집으로 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각서의 글씨가 채 마르기도 전에 저는 또다시 술을 마셨고 그럴수록 남편의 폭력 또한 심해졌습니다. 입술은 살점이 갈라져 열다섯 바늘을 꿰매야 했고 팔은 골절됐으며 툭하면 머리를 맞아 의식을 잃었지만 구걸해 술을 마시면 또 살아났습니다.

 

이를 악물고 젖 먹던 힘까지 다 동원해 한동안 술을 마시지 않고 직장도 다녔습니다. 모진 목숨 살고 싶어 안산에 있는 정신과도 다녔습니다. 그렇게 1년을 넘기고 또 6개월을 넘기자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그만 오라며 저를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기쁜 소식에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술을 마셨고 다시 예전의 저로 돌아갔습니다. 아니 상황은 훨씬 더 나빠져 죽음에 이를 정도의 블랙아웃 상황을 거쳐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후 저는 처음으로 저의 민낯을 보았고 알코올 중독의 병식을 알았습니다. 20년이 넘는 세월을 저는 술 앞에서 무너졌고 철저히 고립되어 온갖 멸시와 천대를 술병에 담으며 살아있는 제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술의 어두움이 저의 눈과 귀를 막았기 때문에 살려 달라는 구조 신호 역시 어느 곳에 해야될지 몰랐습니다. 저주 받은 운명이라 생각하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게 도움의 손길을 주신 선생님이 계십니다. 오랜 기간 술에 중독된 저는 4단계 발표를 하고 교만함이 생겼습니다. 저는 정직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이 저를 맡아주신 상담사 선생님과 함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술만 먹고 얌전히 잠만 잔 것이 아닙니다. 술과 짝꿍인 이성 문제가 있었고 일상생활의 기본인 손 씻기, 발 씻기, 세수와 샤워조차 하지 않는 지독한 게으름이 있었습니다. 대인관계는 말 그대로 4차원적인 수준이어서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몰랐습니다.

 

이 모든 것이 술의 갈망때문이란 것을 선생님의 가르침을 통해 알았게 됐습니다. 저는 눈물을 쏟으면서 하루에 한 가지씩 연습과 훈련을 하고 이를 점검 받으며 제 결점들을 제거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개방, 재활, A.A.모임을 다니며 10개월의 입원 생활을 마쳤습니다. 퇴원 후에는 1년 계획표를 작성하고 그대로 유지해 지난 5월에 단주 3년칩도 받았습니다. 저에게 있어 다사랑중앙병원은 친정집이고 제2의 인생이 시작된 곳입니다. 죽어야만 끝나는 병에서 이렇게 기적처럼 살았습니다.

 

교육시간에 배운 에니어그램과 동기강화 훈련, 12단계, 인지행동치료, 매일의 명상 등은 1단계를 인정하게 했으며 상담사 선생님의 지극한 사랑과 가르침은 두려움 없이 4단계를 다시 쓰게 했습니다. 제 나이 쉰 하고도 다섯입니다. 백세시대 인생의 절반을 살았습니다. 글 서두에 쓴 생의 한 가운데에서 있지만 요즘 저는 너무도 행복합니다. 술 없이 맑은 정신으로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매 순간 느끼며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남편은 저를 포기하고 싶었지만 죽어서 후회가 없도록 가장 좋은 알코올 전문병원에 입원이나 시켜보자 했다고 합니다. 그런 남편의 선택이 저를 살렸고 지금은 저보다 남편이 더 병원을 신뢰하며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저는 안타까운 죽음도 많이 봤습니다. 저와 친했던 병원의 언니, 동생, A.A.모임의 선생님들이 본인만의 방법으로 회복하려다가 잘못된 경우였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납니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어둠 속에서 알코올 중독이란 병으로 홀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 메시지가 조금이나마 힘과 희망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항상 저를 후원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는 원장님과 상담사 선생님, 단영초 선생님들의 사랑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