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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2018년 환갑 생일이 다시 태어난 단주 생일입니다
등록일 2021-02-09 조회수 364 이름 다사랑
첨부파일 2018환자회복수기_썸네일.jpg

[2018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대상]

 

2018년 환갑 생일이 다시 태어난 단주 생일입니다

 

○○

술은 마약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의 시작이 눈덩이 굴러가듯 커져 버리는 건 순식간이죠. 그런 의미에서 이번 수기공모전을 통해 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하나의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과거에 대한 저의 고통이 연민으로 다가와 남의 고통보다 커 보이며 심지어는 내가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같은 인간의 생을 살며 그 긴 여정 동안 중독에 관한 번뇌를 벗어 버리는 것은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지병이 있음에도 어리석게 술을 마시며 그 고통을 키워온 것은 저의 큰 실수였습니다. 먼저 저의 고통스러운 지병에 관해 설명하자면 눈이 햇빛에 매우 민감해 따갑고 시리며 쉽게 건조해지는 증상으로 20여 년 가까이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면 자리에 앉아 도착할 때까지 눈을 꼭 감고 가야 할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대학병원 안과를 꾸준히 다니며 치료해 보았지만, 원인과 병명은 알 수 없었습니다. 저의 혈액으로 혈청 안약을 만들어 넣는 것이 최선의 치료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니던 안과의 전문의께서 학회를 가셔서 임시로 뵙게 된 한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자가 면역 질환인 쇼그렌 증후군일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검사를 받으니 그 병이 맞다는 확진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질환을 안고 있는지라 평소에 많이 민감하고 스트레스에 취약한 편입니다. 특히 이 병은 산정 특례에 해당되는 희귀한 질환으로 심각한 경우 자살시도까지 하게 될 정도로 고통이 큰 질병입니다. 개인적으로 타인에게 이러한 질병을 견뎌내고 산 제 인생에 대해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강합니다.

 

몸 관리를 소홀히 하면 안 되는데도 어리석게 건강관리를 하지 않고 극한의 알코올 중독 상황까지 저를 몰아갔던 저 자신을 반성해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병이 있음에도 마시게 되는 술의 중독성이 그만큼 강하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술을 마시게 되면 몸이 더 건조해져 힘들기도 했지만 술을 멈추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제 과거의 이야기를 한 번 되짚어 보려고 합니다. 어떻게 술을 마시게 되었는지, 그리고 입원하기까지 어떠한 과정이 있었는지 한 번 살펴보며 다른 힘든 분들도 공감하시고 위로가 됐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1997년 무렵, IMF로 사업이 많이 어려워지자 남편의 지병이던 바이러스 간염이 간경화로 급속히 진행되었습니다. 수년 동안의 정성스러운 치료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199926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니던 중소기업의 전무라는 직책을 내려놓고 세상을 떠나기 1년 반 전 시작했던 사업은 이미 많이 기울어져 있던 상태였고, 남편이 남기고 간 책임은 저에게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신도시에 살고 있던 집을 급매로 팔고 저는 2명의 자식과 함께 주변 먹자골목 14평대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빚은 청산할 수 있었지만 가진 돈이 별로 없어 살길이 막막했던 그 시절, 1995년도부터 고부갈등의 괴로움을 떨치고자 마셨던 술은 조금씩 늘어 어느덧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더불어 남편과의 사별 이후 핏줄이 얼어버린 것 같은 지친 마음과 아이들 낳고 살림 위주로 살았던 인생이 갑자기 생업 전선에 놓이게 되면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으로 마음을 다잡으며, 주변 교회 사람들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작은 좌판에 탁자 몇 개 놓고 떡볶이 장사를 하며 생활기반을 다졌습니다. 그러나 불법 영업이었던 탓에 고소를 당하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좌판을 접게 되면서 생계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23살 터울의 큰언니께서 내가 찾아가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이 찾아주는 일을 하라는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술을 파는 곳보다는 아이들에게 떳떳할 수 있는 엄마가 되기 위해 김밥집에서 하루 12시간씩 일을 했습니다. 일에 익숙하지 않았던 저는 하루 만에 잘리기도 하고, 겨우 한 달을 버티다가 극심한 몸살로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집에서 2km 정도 떨어진 김밥집에 취직되어 새벽 시간에 설거지하는 일부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일에 서툰 저를 친절하게 도와주던 한 친구와 가까워지면서 일이 없는 날에는 둘이 술친구가 되어 지냈습니다. 술을 과하게 마실 때는 몸이 많이 안 좋았지만, 극한의 우울함 때문에 음주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 건 아니었습니다. 시어머님이 같이 살게 되면서 베란다에 매실주를 만들어 두셨고, 호기심에 술을 마시게 됐습니다. 그러나 늦은 나이에 처음 접한 술이 더 무섭다고 저는 고부갈등으로 인한 삶의 고통을 풀기 위한 수단으로 술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의 배려하심보다 술의 이끌림에 저 자신을 맡겨놓는 날이 많아지는 것을 자책했지만 생활이 힘들어질수록 술의 욕망에 승복하는 날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힘든 날들이 계속될수록 술에 나를 바치고 아픔 속에서도 해탈을 얻듯 자기연민 속에 나를 맡기는 날들이 많아졌으며 주변을 보살피지 못하고 내 고통을 달래주는 삶 위주로 지내는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내 인생에서 제일 가난했을 때 남편을 잃은 아픔 속에 자식 둘과 2400만 원 전셋집이 전부였던 그 시기는 마치 태양마저 얼어가듯 차갑고 힘든 시기였으며 그땐 술이 참 그립고 달았습니다. 소주를 마시고 취하게 되면 자기연민을 주체할 수 없어 아이들에게 한풀이를 했습니다. 일하느라 아이들을 돌볼 순 없었지만 적어도 재정적으로 필요한 건 다 해주고 싶어 최선을 다해 노력했습니다. 그런 자신이 참으로 대견스러운 한편 하루하루가 힘든 노동의 연속인지라 버거웠습니다. 그래서 술에 더 의존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병으로 몸이 아픈 남편을 위해 다양한 약용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만들었던 경험과 초등학교 급식 조리사 아르바이트, 다수의 대기업 미각심사 참여 경험 그리고 친구와 함께 취득해 놓았던 조리사 자격증 덕분에 요리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김밥집 새벽 근무로 오래 일하면서 가게 주인으로부터 호감을 얻게 되었고 김밥집을 동업하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2003년 동업을 시작했고, 친구에게 돈을 빌려 동업자에게 거금의 돈을 지급한 후 혼자 자영업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주인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며 적게는 12시간 많게는 17시간까지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설날, 추석 외에 별다른 휴일 없이 근무하는 것은 꽤 고통스러웠습니다. 최선을 다해 일했기에 장사는 잘되었지만 고된 일을 마치고 나면 술 없이 잠들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알코올 클리닉에 다니며 약을 먹으면서 2년간의 단주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힘들게 보냈던 아들의 외국 유학이 2번의 자살시도로 중단되었습니다. 때마침 다니던 알코올 클리닉의 폐업으로 병원에 다니기 곤란한 상황이 되었고 다른 병원을 찾지 않고 이제까지 꾸준히 약을 잘 먹어온 대로 스스로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기대가 컸던 아들이 조현정동장애로 장기 입원을 하게 된 상황에 무력함을 느끼고 매우 속상했지만 술을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단지 어느 날 문득 오늘만 먹고 내일은 먹지 말자라는 갑작스러운 생각이 저를 다시 술로 이끌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아마 이것이 하루하루 단주 생활을 열심히 해나가다 술에 다시 빠지게 된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게 일이 익숙해지면서 문화프로그램에도 많이 참여하였으며 성경 한 권을 컴퓨터로 사경 하여 상도 받았고, 손글씨나 컴퓨터 교육도 받으며 시장 상인회에서 우수 상인으로 시상 받기도 하는 등 열정적으로 살아왔습니다. 지병인 쇼그렌 증후군 증세도 많이 나아져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노동을 감내하며 자식들이 어떻게 살아나가는지 일일이 도울 수 없었고 딸은 한 번의 대학 중퇴와 재입학 그리고 아들은 정신장애 3급을 받으며 힘들어하는 모습에 번뇌가 찾아왔습니다.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한 시점부터 빠른 속도로 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기억력 저하와 몸에 이상이 있다는 징후들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 술에 일상을 맡기고 말았습니다. 결국 단기적 기억상실이 일어나는 날들이 많아졌고 음식도 멀리하게 되어 158cm의 키에 42kg까지 몸무게가 떨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각한 우울 증상과 집안에서 걸어가며 소변을 보는 요실금까지 겪게 됐습니다. 그렇게 자식들에게 인생의 괴로움을 울며 하소연하는 날들이 많아졌고 2003년부터는 13년간 운영해 오던 가게를 접으면서 남는 시간 동안 술에 더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몰래 감추어 두고 먹는 소주병의 개수는 늘어만 갔습니다.

 

그러던 중 조현정동장애로 재활 치료를 받는 아들과 함께 요양보호사 교육을 받다 우연히 살림 도우미 교육을 알게 됐습니다. 이를 통해 재취업에 성공해 공백 기간 없이 다시 일로 복귀할 수 있었지만 술을 멀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노동에 대한 스트레스를 만취한 상태로 분가한 딸에게 전화해 하소연하는 것으로 해소했습니다. 저의 심해지는 우울증과 만취 시 기이한 행동으로 인해 아들은 알코올성 치매를 의심하였고 결국 저는 신경과 치매 정밀검사를 받아 경도인지장애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몰래몰래 방문을 닫고 술을 마셨던 터라 이러한 음주 생활에 방해 요소는 많지 않았습니다. 몇 년을 이렇게 지내다 보니 술이 깨면 다시 술을 먹는 장취에 빠지게 되었고 술기운 없이는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의식이 점점 무뎌져 온종일 수면에 취해 안 깨어났으면 하는 생각과 함께 삶에 대한 의욕도 상실하게 되어 기본적인 위생관리조차 잘하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저 매일 4~6시간 동안 하는 살림 도우미 일에 대한 의무감과 TV 그리고 술, 아들 부양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겨우 살아가는 하루살이가 되어갔습니다.

 

정신병원 입원을 3번 정도 반복하다 집에서 생활하던 아들은 자기가 다니던 정신과의 알코올 클리닉에 저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아들이 담배를 끊겠다며 5일간 금연 클리닉 합숙에 들어갔고 저는 일도 미루어 가며 술을 마셨습니다. 아들이 돌아오기로 한 날, 늦게 올 거라고 예상했던 아들이 예상치 못하게 오전 중에 돌아오게 되었고 그 동안 숨겨왔던 제 모습을 들키게 되었습니다. 심하게 어질러진 제 방안을 보게 된 아들은 저를 집 근처 다사랑중앙병원까지 끌고 가 김석산 원장님께 진료받게 하였고, 만취 상태였던 저는 그렇게 보호 입원이 되었습니다.

 

갑작스런 첫 입원에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고 제가 아들에게 보호 입원을 강요했듯 저 또한 보호 입원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지만 정신병원 생활의 괴로움을 호소하던 아들에게 항상 말했던 것처럼 나도 병원에 입원해서 쉬고 싶다는 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고통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입원 생활에 대한 거부감이 없을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의 사별 이후 18년 동안 지속된 고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감이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병원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단주에 대한 각오가 없다면 병원 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은 반복되는 휴식뿐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마음을 다잡으며 차차 단주에 대한 열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경험이 있던 아들은 자주 방문해 안부를 물었고, 저도 마음을 온전히 다듬고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하면서 단주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다른 병실 환우들이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공부방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구나하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입원은 처음이라 병원 생활은 강압적인 분위기에 약과 밥만 주고 교육은 가끔 받을 것이라 생각했던 저의 착각은 금방 바뀌었습니다.

 

알코올 병동은 나 자신을 진단하며 중독에 대한 이해를 돕고 지속적 상담을 통해 나의 잘못된 습관과 가족에게 준 상처를 같이 치유하는 하나의 치유 공동체였습니다. 병동 생활은 알코올 중독 회복에 관련된 서적들을 접하면서 내가 했던 행동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방향 그리고 맑은 정신을 갖기 위해 필요한 마음가짐을 서서히 확립해가는 기회였습니다. 가장 행복했던 건 노동으로부터 해방이었으며 상담사 선생님과의 학습을 통해 술에서부터 해방하려는 숨겨진 의지가 껍질을 벗기 시작하였습니다. 나 자신의 온전함을 회복하려는 노력과 생활습관에 변화가 생기면서 술 없이 잠들 수 없던 날들에 대한 힘든 기억이 없어지고 있었습니다.

 

병원 교육의 단계별 학습 중 제1단계의 내용이었던 나는 술 앞에서 무력했으며 내 삶을 수습할 수 없었다를 통해 나 자신을 인정하면서부터 마치 영화관에서 주인공이 된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보듯 객관적인 시각에서 나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좀 더 나아가 4단계 교육을 통해 내 인생의 자서전을 써보고 나의 성격적 결함에 대해 이해하고 행동의 오류를 검토하며 나를 변화시켰습니다. 9단계 교육에서는 내가 술을 마시게 된 이유와 과정을 돌이켜보고 나의 잘못을 시인하며 그에 대한 피해를 보상하는 마음가짐을 가짐으로써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평온한 감정 속에 몰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원망과 강한 자기연민, 모자란 자신감, 지나친 자기 합리화라는 나의 결점들은 서서히 그 고리를 끊고 있었습니다. 또한 술을 처음 마시게 된 이유였던 시어머니와의 갈등에 대한 묵은 원망과 자기 분노의 과정을 돌이켜보며 글을 쓰고 반성하는 시간을 통해 나의 악업을 용서하고 이해하며 해방의 감정을 느꼈습니다. 이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받아주며 타인에 대한 분노와 악한 마음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익히고 감정을 치유하며 아픈 마음에서 평온한 마음으로 변화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성격적 결함에 대해 검토하게 된 것도 학습과 상담을 통한 배움 덕분입니다. 이전에는 항상 나는 잘못이 없다고 주장했고 내게 주어진 상황에 억울하고 분하게 느껴지는 감정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격리된 병원 생활을 통해 안정을 취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과거를 되짚어 보니 이기적으로 나만 위했었다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너무 좋은 기회 아닐까요?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 평온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중독에서 벗어나면서 느꼈던 병원 생활은 그만큼 뜻깊은 일이었습니다.

 

평온함을 청하는 기도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시고, 어쩔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주시고, 그리고 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소서를 암송하며 자신을 다스렸습니다.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참여하며 때로는 분별없이 고집만 내세우던 나의 모습을 되짚어 보았고 그렇게 게으름 없이 꾸준히 정진한 저에게 회복은 평온한 마음의 유지라는 선물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마지막 9단계 발표날이자 환갑이 되는 생일날, 두 자녀와 동료들 앞에서 나 자신을 반성하고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고 퇴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날이 제가 다시 태어난 날이라고 축하하고 싶습니다. 저의 또 다른 생일로서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무술년 개띠 해, 저의 만 60세 생일은 세상에서 가장 보람찼던 하루가 아닐까 싶습니다.

 

발표 마지막 즈음에 9단계 과정을 지도해 주시던 상담사 선생님께서 권해주신 자식들에게 사과 편지쓰기의 결과물을 자식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휴식을 취하며 더는 술과 함께 하는 인생을 걷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루하루 피곤한 날들과 장애가 있는 아들을 돌보아야 하는 일에 지치는 날도 있었고, 쇼그렌 증후군에 의한 극한 피로에 많은 고통이 수반된 날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일상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는 나를 꾸준함으로 이끌었고 그렇게 퇴원 후 알코올 중독자 모임(A.A.: Alcoholic Anonymous) 100일 연속 참여에 성공하였습니다. 또한 알코올 중독 치유 후원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분의 도움 속에 많은 배움을 얻고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로 산 인생보다 그렇지 않은 인생이 더 길지만 술을 중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알코올 중독은 나의 의지 부족으로 인해 술을 계속 찾게 되는 것이 아니라 뇌의 기능 이상으로 생기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저처럼 스트레스 요인을 얻게 되었을 때 자기 의지로만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다시 술의 길로 빠지는 선택입니다.

 

알코올 중독이 병이라는 인식을 갖고 병원치료와 알코올 중독자 모임 등에 지속해서 참여하는 것은 앞으로 제 평생의 과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도 수기를 쓰고 후원자와의 교육 그리고 A.A. 모임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저를 도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맺음말로서 A.A. 100일 작전을 성공한 저를 격려하고자 꽃다발을 들고 와 축하해 주신 후원자님을 비롯해 2주에 한 번씩 약을 처방해 주시는 선생님 그리고 병원 생활에 도움을 주신 상담사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들, 보호사 선생님들께도 큰 감사를 보냅니다.

 

아직 금주를 시행한 지는 11개월 남짓이지만 첫 1년이 가장 힘들다고 합니다. 이제 저는 그 큰 산을 넘어가려 합니다. 마지막으로 A.A.를 통해 만난 많은 식구 그리고 경제적으로 많이 도와준 딸에게 감사하며 수기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