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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알코올은 교활하고 당황하게 만들며 강력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등록일 2021-02-09 조회수 346 이름 다사랑
첨부파일 2019환자회복수기_썸네일.jpg

[2019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

 

알코올은 교활하고 당황하게 만들며 강력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

 

술에 취한 나는 한 잔 술을 더 마시기 위해서 가족들에게 교활함의 극치였고 술이 강력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됩니다.

 

저는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1960년대 이전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아버지는 온순하셨고 가족밖에 모를 정도로 가정에 충실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투전꾼들의 꼬임으로 도박을 시작하셨고 그때부터 본전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가족 모두를 잊은 채 도박에 중독이 되어 매일을 술과 도박으로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든 재산을 다 날린 아버지는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형제·자매 32녀를 남긴 채 운명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많은 식구들을 거느리기가 정말 앞이 캄캄했다고 합니다. 32녀 중 막내인 제 나이 4살때 일입니다. 어머니는 남의 집 김을 매는 일부터 군부대 장병들의 군복세탁까지 혼자 힘으로 가족들의 생계 유지를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죽어라 막노동으로 가족 모두를 먹여 살리기란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결국 가족들은 뿔뿔히 헤어졌고 정말 지옥과도 같은 나날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양로원으로 가셨고, 큰 형은 원래 고향인 홍천으로, 큰 누나와 작은 누나는 각각 남의집 살이로 보내지면서 온 집안이 생이별을 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나마 공부를 잘하던 작은형과 막내인 저만 집에 남게 되었습니다. 작은 형은 줄곧 우등생이었고 저는 오로지 공부만하라는 엄한 형밑에 남게 되었습니다. 동네 친구들과 맘 놓고 놀지도 못하고 늘 책상에 앉으라던 형에게 놀다 걸리면 죽도록 두들겨 맞는 상황이 거듭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저도 줄곧 우등생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을 위해서 이듬해 우리식구는 읍내로 이사를 했습니다.

 

집은 단칸방 사글세 집이였습니다. 중학교는 수업료가 저렴한 고등공민학교로 입학하였습니다. 형은 제가 초등학교시절 우등생이니 나중에 검정고시를 보면 된다고 했습니다. 형님의 스파르타식 교육을 통하여 고등공민학교 3학년 때에 치러지는 고입입학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형님은 공무원이 되셨고 저는 정규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형님은 군입대로 집에는 어머니와 저만 남게 되었습니다. 습관처럼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는 늘 책상에 앉게 되었지만 이습관도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무서운 형이 없다는 해방감에 저는 스스로 자유를 만끽해야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가 찾아와 자기 학교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자고 하여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 친구의 학교는 남녀공학인 학교였으며 도서관에는 우리외 아무도 없었고 그 친구의 밀린 수학 과목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그 학교 도서관에 학생들이 하나,둘 모이더니 여학생들까지 도서관에 나타나 제게 수학문제를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중 한 여학생을 알게 되었고 얄팍한 수학 실력으로 자만감에 취하여 제 공부는 멀어져 갔습니다. 그 여학생을 만나는 날만 기다려지던 어느 날, 그 여학생의 남친이 제게 싸움을 걸어왔고 그 일을 계기로 저는 불량 학생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매번 싸움 끝에 얻어맞은 상처와 그 아픔을 잊기위해 술을 마셨고 또 화해하기위해 술을 마셨습니다. 제 생에 첫 잔은 싸움 끝에 남는 상처와 고통을 잊기 위해 마시게 된 것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19791, 한겨울이었습니다. 저의 첫잔은 포도주였습니다. 포도주는 쓰지 않고 달다는 친구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때 술을 처음 접했습니다. 포도주 몇 잔을 마시고 나니 마시는 건지, 먹는 건지 모를 정도로 취해 버린 저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샴페인, 그 다음은 소주를 양재기에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고 합니다. 첫 술자리부터 정신을 잃으며 그야말로 폭주 중에 폭주를 한 것입니다.

친구 자취 방에서 시작된 술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길거리에 쓰러져 동사하기 직전, 같이 마셨던 친구가 발견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들어보니 당시 친구 어머니가 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이 뭔 놈에 술이냐며 야단을 치시자 같이 마셨던 친구 두 명이 뒷문으로 피하다 방한켠에 쓰러져 있었는 저를 발견해 끌고 나와 길거리에 버리고 갔다고 합니다. 처음인데 가혹하리 만큼 체벌을 받은 것입니다.

 

그 소동으로 3일 동안 깨어나지 못하다 어머니의 지극정성인 간호로 살아나게 됩니다. 지금 생각하니 어머님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늘 책상에 앉아 책만 접했던 아들이 이런 날벼락을 주었으니 말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늘 접하는 친구들이 바뀌었습니다. 불량 학생들과 어울리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들보다 더 불량스럽게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패싸움을 접하게 되면서 타락의 길은 시작된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 제일 중요한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때부터 말입니다.

 

세월은 흘러 형님께서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셨습니다. 제일 먼저 하신 일이 학교에 찾아가서 담임선생님을 만나 제 성적을 확인하는 일이였습니다. 성적도 성적이었지만 변해버린 동생의 행동 거지가 완전히 깡패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은 형님께 그야말로 큰 충격과 실망을 주었습니다. 결국 저의 대학입학 예비고사 성적은 형편 없었고 대학 진학도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대학 진학 하기를 바라던 형의 모든 희망을 져버리게 됩니다.

 

저는 계속해서 깡패같은 친구들과 어울렸고 형이 충고라도 할라치면 큰소리가 오갔습니다. 끝내 따귀라도 맞게 되면 이제 나도 컸다며 같이 주먹질을 하며 형도 몰라보는 개망나니가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매일을 술과 담배에 찌들어 다방아가씨들과 어울리며 냇가에 텐트를 치고 놀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형님께서 이곳을 떠나 제발 지금 어울리는 친구들과 관계도 끊고 새출발하라며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사실 저도 이렇게 살아서는 않되겠다는 생각이 마음 한켠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차분히 나를 찾아 다시 공부를 해보자는 생각에 서울 남양동에 있는 재수학원 종합반에 들어가 재수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울 학생들의 학구열은 대단했습니다. 제가 시골에 있었던 그런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학원문이 열리자 서로 앞자리 앉으려고 학원생들의 뛰는 모습부터가 달랐습니다. 저는 열공 하겠다는 의지 덕분에 바로 적응할 수 있었고 재수생 생활 3개월차에 형님께 공무원 시험 보면 어떻겠냐 제안을 았습니다.

 

그렇게 바로 공무원시험을 치르게 되었고 필기시험 합격했습니다. 아직 면접이 남았지만 면접 준비를 왜 하냐며 모든 짐을 싸서 다시 집으로 내려왔습니다. 당시에는 대학은 무슨, 형님처럼 나도 공무원이나 하자.’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친구들을 만나 강변으로 가서 바로 술을 마셨고 그 동안 못 마신 술을 한꺼번에 다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 면접시험을 보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시험에 떨어졌다고 또 술을 찾았고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군대에 입대를 했습니다. 그나마 군에 있던 30개월은 저의 무질서했던 생활이 정리되었던 시기였습니다.

 

군복무를 마치자 직업을 가져야 했습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여러 번 실패했지만 많은 고전 끝에 29살의 나이로 합격했습니다. 공무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고 당시 아내는 이미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해 바로 결혼을 하며 저의 방황은 여기서 막을 내리나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시골에 위치한 면사무소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공무원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마을 이장님들과 술자리, 직원들과 술자리, 회식, 동창회, 체육대회 등 늘 술자리의 연속이었습니다. 술자리를 같이했던 사람들은 제가 술을 잘 마신다며 술 마실 자리면 저를 찾아주었고 저는 신바람이 났습니다.

 

그후에도 인사발령이 여러 번 났지만 그렇게 술을 마셨어도 출퇴근 만큼은 정확히 지키며 제 역할 확실히 수행했습니다. 그렇게 공무원 생활 12년 째가 되던 제 나이 41세 때, 결국 술문제로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안 먹고 계속 술만 마시다 술이 깰만 하면 또 마시는 일이 13일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제가 끝내 의식을 잃자 생명의 위험을 느낀 아내는 병원 앰블러스를 불러 병원에 저를 입원을 시켰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치료진들은 제가 병원에 입원한지 5일째라고 했습니다. 병원은 대학병원 정신과로 외부와 단절된 폐쇄 병실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기력을 찾자 아내에게 전화해 왜 나를 밖에도 못나가고 꼼짝할 수도 없는 곳에다 갔다놓았냐며 당장 퇴원시키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습니다. 아내에게 갖은 욕설 다 퍼붓고 오직 갇혀있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내가 왜 거기까지 갔는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병원 입원기간은 제게 분통만 터지는 기간이었습니다.

 

28일만에 퇴원하게 되었고 사무실에 복귀 하자 제가 병가 처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병가처리? 아니 아픈것도 아니고 술 마시다 쓰러져서 입원해도 질병으로 병가처리 된다고?’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리를 비우느라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야근을 일삼았습니다. 근무시간 내내 화장실을 갔다 오는 시간 빼고는 자리를 비우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태를 수습 하느라 진땀을 흘리며 근무에 임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간은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출장이라도 가게 되면 산과 들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다 술이 있으면 아주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병원에서 퇴원한지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또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습니다. 출근을 하면 업무를 후다닥 처리해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했고, 바로 옆에 있는 직원에게 사업장에 나가기 위해 출장을 내야겠다고 말고선 사업장 한 바퀴를 획 돌고는 술자리에 가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3개월을 못 넘기고 술만 마시다 장취가 되어 끝내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41세가 되도록 병원이라고는 모르고 살았는데 왜 이리되나 왜 반복이 되나?’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공직에 있는 터라 병원 입원기간 늘 짧았습니다. 바로 근무에 임해야 되니까요. 그러다 1년에 병가 일수가 어떻게 되는지 상세히 알게 되었고, 이에 맞춰 아주 지능적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저의 교활함이 하늘을 찌르게 된 것이죠. 하지만 퇴원 후 다시 사무실을 출근하기란 정말 힘들었습니다. 직원들이 다 저를 멸시하는거 같았고 저만 쳐다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때마다 저들이 내 월급 주는건 아니잖아?’하는 자기합리화를 했습니다. 그땐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모든 걸 다 포기할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대학병원의 정신과 입퇴원을 수없이 반복하였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이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며 술버릇의 악순환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도 금주 기간이 그나마 6개월정도 넘어가니 나름 제 자신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자각 끝에 ~ 나는 알콜중독자였구나를 차츰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싫다면서도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면 술자리로 이어졌습니다. 친구들이 부어라 마셔라 할때면 저는 나름 꾹 참다가도 이내 꿔다 놓은 보리자루가 된 기분과 친구들과의 관계가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술을 마시고 말았습니다. 그 한잔의 술은 얼마간의 금주기간을 수포로 만들었고 결국 말술을 마시는 악순환이 거듭 되었습니다.

 

아침이면 머리가 너무 아프고 속이 메스꺼워 너무 괴롭로울 땐 술이 깨기도 전에 한 잔을 마시고 또 그 한 잔의 술에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술이 깨기도 전에 한 잔을 마시는 해장술이란 것을 접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중증 알코올중독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알코올중독의 뜻은 그나마 다사랑중앙병원에서 교육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머리로만 알게 되는 이론적 배움일 뿐이었습니다. 이론적인 깨달음은 제가 수없이 입퇴원을 반복하게 만들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진심없이 밖으로 보기에만 모범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아주 교활하고 강력하게 말입니다.

 

1단계 나는알코올에 무력했으며 나의 삶을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시인했다.

AA멤버에게 12단계 중 1단계만이라도 붙들고 받아들인다면 단주생활 할 수 있다는 경험담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런 악순환 속에 사는 것은 더 이상은 아닌거 같다는 깨달음에 사표를 내고 명예퇴직해 공직생활 30년을 마무리했습니다. 지난날 동기들이 모두 승진할 때마다 마음은 아팠지만 그래도 현직에 있는 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 뒷바라지 속에는 늘 제 아내가 있었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다사랑중앙병원은 체계적으로 시스템이 잘 되어있는 병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관리병동, 개방병동, 재활병동 이런 체계는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알코올중독은 뇌질환이기 때문입니다. 단계별 치료는 정말 훌룡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적응, 단계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병원입원 시 제 상담을 맡으신 윤희숙 상담사님께서 제게 12단계 필사를 해보자는 말씀, 불완전한 영성, 아직도 가야할 길 도서 필독, 수요일 AA 모임이 있을 때마다 맨 앞에 앉으라는 눈초리, 병원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잔소리들이 저를 위한 것임을 왜 지금에서야 알게 됐는지... 상담사님이 진정으로 환자를 위하는 마음에 열과 성을 다했음을 말입니다. 지금도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다사랑중앙병원에서의 많은 토론과 학습은 제 단주생활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폭주로 시작되었던 제 음주가 멈춘지 2년이 넘어갔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제게는 단주생활의 양식이 된 것입니다.

 

2018년 뇌출혈로 의식을 잃고 2회에 걸친 수술 끝에 사경을 헤메다가 살아났습니다. 뇌출혈의 원인은 술과 담배였습니다. 너무도 끔찍한 병이란 걸 직접 경험하면서 그렇게 제 몸을 휘감았던 술과 담배로 인해 이지경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싶어 수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제가 준 상처가 컸는지 아내는 중환자실에 있는 제게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정말 억울해서 이 사람 저 세상으로 못 보내겠다고 제발 살려달라고 말입니다. 오늘도 맑은 하늘을 만끽하며 이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어느덧 술과 담배를 접하지 않은지 2년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아들에게 며느리가 될 사람을, 딸에겐 사위가 될 사람을 소개받아 인사를 했습니다. 이 모두가 너무도 감사한 일이라고 봅니다. 이제는 다사랑중앙병원의 여러 치료진, 환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지금 회복의 길을 걷고 있는 저는 모든 것에 너무도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이 모든 기초를 다지게 도움을 주신 다사랑중앙병원 치료진들께 거듭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