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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회복수기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치료받은 환자분들의 생생한 회복 경험담입니다.
알코올 중독 치료를 통해 새 삶의 희망을 찾으신 환자분들의 진솔한 회복 수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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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 기도를 바꾸다
등록일 2022-11-17 조회수 313 이름 138903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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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


기도를 바꾸다   



    " 나는 언니를 용서할 수 없어" 제 술 문제를 알기 전에는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여동생이었습니다. 그런 여동생의 이 말을 듣고 2019년 10월 13일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20살 회사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처음 술을 마시게 되었고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술을 남들보다 더 많이 마셔도 취하지 않으며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다음날도 멀쩡히 출근함에 따라 나름 술로 인정받게 된 저에게는 하나의 능력이었습니다. 거의 매일은 아니더라도 약속을 잡고 술을 마셨습니다. 그러다 20대 중반 첫 블랙아웃이 되어 외박한 상태로 여 직원실에서 눈을 떴을 때 느꼈던 공포와 불안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음주는 조절할 수 있다는 교만과 기쁨, 슬픔, 짜증 등의 모든 상황에 대한 해결책이었기에 멈출 수 없었습니다. 결혼한 시댁이 갈빗집을 운영하셔서 일 끝나면 술친구였던 남편과 매일 술을 마셨습니다. 술을 안 마셨던 기간은 세 아이를 가졌을 때뿐이었습니다. 


  식당에서 일하면서 시댁에서 월급은 받지 못했기에 시부모님이 시골로 내려간 1년 동안 이때다 싶어 노후 자금이라 생각하며 아무도 몰래 보험을 들었습니다. 들었던 보험이 감당할 수 없는 빚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시어머님이 다시 돌아오셨고 개인 빚도 모자라 시어머님 보험에서 중간 인출까지 했던 저는 모든 일상이 숨 막히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매일 눈을 뜨면서부터 불안감에 술이었고 아침에 눈을 뜨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겁이 많아 전쟁이 나서 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했습니다. 


  게다가 대학 졸업 후 아무것도 하지 않던 시동생이 가게 일에 관여하게 되면서 열심히 일하면 물려받게 될 내 가게라고 믿었던 기대와 희망까지 흔들렸습니다. 모든 불만과 불만이 술이 되었고 엄마 손이 필요했던 아이들을 보살피지 못하는 그저 술만 마시는 엄마였습니다. 아이들의 준비물을 챙기기보다 아이들 옷장 서랍 속에 술병을 숨겨놓는 엄마였습니다. 


  세상엔 비밀이 없듯이 모든 일을 알게 되었고 그 일로 힘들어진 하루하루를 술로 보내다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이혼 후 친정에 돌아왔을 때 제 술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엄마와 여동생은 이혼이 무슨 문제냐 잘 살면 된다고 하시며 보듬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집을 비우면 술에 취한 모습을 보이고 엄마와 여동생이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 응급실로 오게 만드는 기막힌 일도 만들었습니다. 집은 나가 연락도 없이 모텔을 전전하며 술을 마셔서 신용 불량자라는 딱지를 달기 전 돌아와 엄마를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그 후에도 정신 못 차린 저는 제 생일날 외식하자는 가족 앞에 술을 마시고 나타났고 참을 수 없었던 여동생에게서 집을 나가는 것과 병원 입원 중 선택하라는 통보에 병원을 택했습니다. 첫 병원 입원이 무서웠지만, 술에 취했던 그때에도 집을 나가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병원 대기하며 13일을 기다리는 동안 엄마의 일을 도와가며 입원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저를 입원시킨 후 병원 1층 로비에서 엄마는 눈물을 보이셨다고 합니다. 


  병원에서 수업 받으며 술을 끊지 못했던 것은 엄마가 늘 말하던 나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 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매일 눈물 흘리며 내일부터는 마시지 않겠다 일기를 쓰며 다짐하지만, 다음날 눈을 뜨면 술부터 찾았던 일들에 대한 해답을 찾았고 상담사 선생님께서 알려주시는 대로 한다면 술을 끊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알코올 중독자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척’만 했던 저는 술을 마실 때 아이를 때렸다는 A.A.메시지를 듣고 상담사 선생님께 당당하게 그런 적이 없다며 얘기했고 그 교만함이 제 입원 기간 첫 번째 퇴원 욕구의 시작이었습니다. 엄마와 상의 없이 퇴원에 표시했던 저는 여동생에게 "언니는 가족들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다"라는 말에서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척’이었기에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나 자신이 이기적이며 사랑하는 가족에게 해를 끼쳤다는 것을 4단계를 쓰며 알게 되었지만, 그 힘듦을 회피하려 했던 저에게 두 번째의 퇴원 욕구가 올라왔습니다. 


  1단계 발표 후 외출을 통해 집에 가면 답답했고 특히 여동생과는 말도 제대로 나누지 않는 불편함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마음을 숨기고 잘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다닌 A.A.모임은 도피처였습니다. 4단계 쓰기를 멈췄던 저는 퇴원을 하고자 했으나 이를 결정하러 온 가족들의 태도에 또 한 번의 밑바닥을 보았습니다. 제 결정에 의해 퇴원을 한 후 첫 잔을 입에 댄다면 가족들에게 버려져 혼자 외롭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멈추게 했습니다. 다시 병원 치료를 선택한 저는 4, 9단계를 마치고 식당 재활을 하며 상담사 선생님과 퇴원 계획을 세우던 중 코로나라는 또 하나의 시련을 맞게 되었습니다. 코로나가 이렇게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얼마 남지 않은 식당 재활을 하며 병원 안에서 병원 A.A. 모임인 늘푸른 모임에서 사회봉사를 하고 온라인을 통해 A.A.모임을 매일 참여하며 멤버분들의 경험담을 듣고 제 경험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사이 코로나는 더 심각해졌고 퇴원 계획으로 세운 학원도 다닐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식당 재활이 끝나갈 때 상담사 선생님의 제안과 힘써주심 그리고 병원의 배려로 청소 재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식당과 청소 재활하는 기간 동안에 엄마와 여동생에게 병원비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온라인 A.A.모임과 재활을 하며 지내던 중 여성 병동을 청소하시던 분이 그만두시게 되었습니다. 그때 약속의 글처럼 저에게 퇴원과 동시에 병원에서 직원으로 일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감사함보다는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받아들이기까지 제 교만함과 싸워야 했습니다. 제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빅 북에서 나오는 대차대조표라는 것도 만들었고 상담사 선생님의 현실적인 조언 그리고 가족들의 응원이 있었습니다. 제게 주어진 기회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저는 여유로움과 느끼지 못했던 자유 그리고 제 인생의 첫 독립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날이 2021년 3월 5일이었고 저의 단주 기념일입니다.


  첫 월급을 타고 적금, 청약을 만들게 되면서 과거 술을 마시면서 제대로 가져보지도 쓰이지도 못한 제 이름을 찾게 되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저의 일상은 하루하루가 감사함의 나날이었습니다. 가끔 눈을 들어 본 햇빛 가득한 하늘에 울컥해지기도 했습니다. 술을 마실 때의 햇빛이 쨍쨍한 하늘은 숙취로 인한 두통으로 얼굴을 찌푸리게 만드는 그래서 피해야 하는 하늘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이 끝나면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A.A. 모임에 참석하며 봉사했습니다. A.A. 모임 안에서 후원자 선생님과 12단계를 1단계부터 다시 하며 지금은 세 아이와 엄마에게 9단계 보상을 하고 여동생에 대한 보상을 앞두고 있습니다. 


  퇴원 후 다사랑중앙병원 관리부서에서 1년 6개월 근무를 한 지금 또 한 번 약속의 기적이 찾아왔습니다. 병원에서 9층 보호사로서 새로운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절망의 끝에서 왔던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저와 같은 병을 가진 분들을 도와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하려고 정문을 들어온 그때에는 술을 끊고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뿐이었는데... 현재 저에게 일어난 일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기에 저에게는 기적입니다.“이렇게 사람구실 하며 살아줘서 고맙다” 9단계 보상할 때 엄마가 저에게 해주신 말입니다. 또한 불편해서 나를 피하고 언니를 용서할 수 없다던 여동생은 집에 가면 엄마보다 더 하나라도 챙겨 주려고 합니다. 개방 때 주말 집에 갔을 때 본인 물건을 말없이 가져갔다는 이유로 화를 냈던 동생이 이제는 제 것까지 같이 주문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감사의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언제든 한 잔의 술로 다시 구덩이에 빠질 수 있는 저는 알코올 중독자임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술 마시며 지내던 때에 잊지 못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집을 나와 모텔에서 두 달 가까이 지낼 때입니다. 크리스마스와 설 명절 즈음이었습니다. 눈이 오는 날 불 꺼진 높은 모텔방에서 두 손 가득히 선물을 들고 다니던 행복 가득한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나에게는 저런 날은 이젠 없다며 생각하며 두려움과 절망, 공포의 눈물을 흘렸던 그날의 그 순간입니다. 그 이후 병원 입원하여 5년이 지난 지금 저는 그 거리에서 두 손 가득 선물을 들고 있는 행복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이전의 저는 술을 끊게 해달라는 기도와 바라는 것을 주시기를 제 주변이 바뀌기를 바라는 기도만 드렸습니다. 지금의 저는 바라는 것을 달라는 기도보다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함으로 술을 끊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신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저에게 위대한 힘이 되어준 우리 가족들과 다사랑중앙병원 치료진분들 그리고 상담사 선생님께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감사함을 전할 수 있어서 가슴이 벅찹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