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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 알코올중독의 대물림을 끊고 싶다!
등록일 2022-11-17 조회수 438 이름 138903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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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

알코올중독의 대물림을 끊고 싶다!    



 나는 1968년도 강원도 산골 마을에 한 알코올중독 가정에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주사가 심했고, 내가 돌이 되기도 전에 음주폭력이 심해져서 어머니는 갓난아이를 두고 외가댁으로 피신하는 날이 많아 모유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랐다. 


 아버지가 술 마시고 오는 날이면 늘 집안은 초긴장 상태가 되었으며 걸핏하면 큰소리 지르고, 어머니를 폭행하고, 살림살이 때려 부수고, 밥통에 농약 뿌려놓고, 잠 못 자게 밤새도록 한 이야기 또 하고, 이런 환경 속에서 어머니와 우리 3남매는 허구한 날 쫒겨 나서 이웃집에서 잠을 자고 밥도 얻어먹으면서 생활하다 보니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고, 중학교 3학년 2학기말에는 학교가지 말라며 교복과 책가방을 부엌 아궁이에 넣고 불태운 일도 있었다. 


 계속되는 가정폭력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는 아예 가출을 하셨고, 할머님이 오셔서 농사일을 도우며 함께 생활하게 되었지만, 아버지 술 문제는 멈추어지지가 않았다. 농번기에는 아버지 대신 내가 마을 품앗이를 나가면, 농촌의 특성상 아침 일찍  일을 시작하기 전에 마을 아저씨들은 둘러 앉아 소주를 대접에 한잔씩 마시고 일할 준비를 하는데 아저씨들이 주는 술을 거부감 없이 나도 받아 마시게 되었다.


  처음 술을 접했을 때는 쓰디쓴 맛이었고 잠시 후 속이 따뜻해지며 얼큰한 상태로 일을 하게 되면 힘이 덜 드는것 같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술이 훗날 알코올중독이라는 멍에를 나에게 씌울 줄은 미처 몰랐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농사일과 소 먹이 꼴을 베느라 바빠서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아버지 술주정을 견디어가며 ,가을 추수를 끝내고 땔나무를 넉넉하게 해놓고 지긋지긋한 집구석이 싫어서 겨울 방학을 이용해 , 무작정 원주 시내로 뛰쳐나왔다. 다행이도 5촌 당숙의 소개로 원주 산업단지 길 건너 맞은편 작은 공업사에서 허드렛일을 하게 되었고, 작은 창고방 간이침대에서 추운 겨울밤을 보내야 했다.  밤에 전깃불을 끄면 시궁쥐가 침대위에 까지 올라와서 깜짝 놀라 잠에서 깰 때도 있었고, 저녁 늦게까지 힘든 일이 고되어 매일 세수할 때면 코피를 흘리면서도 돈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에 술집에서 마시는 일은 없었지만, 마음이 서글프고 괴로울 때면 가끔 소주를 한병 사다가 간이침대에 앉아서 마시곤 했다.


 하늘도 무심하신지, 일을 시작한지 두어 달 즈음 마을 이장님으로부터 공업사 전화기로 아버지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짐을 챙겨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어떻게 생겨먹은 인생이 이렇게 지지리도 복이 없는지....... 소박한 계획마저도 물거품이 되었고 아버지는 죽으면서 까지 내 앞길을 막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시골 5일장 날 밤늦게 까지 술을 마시고, 눈이 하얗게 내린 추운 동지섣달에 논두렁길을 걸어오다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동사했고, 그때에 아버지 나이 마흔두 살 이었고, 어린 동생들을 내게 맞기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 친척들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한해 농사를 더 짖게 되었다. 봄에 소 두 마리 쟁기질로 논과 밭을 갈 때는 허리가 끊어질 듯 한 고통에 술을 마시며 하루 종일 일을 했고 , 여름밤엔 무논에서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기막힌 내 현실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기도 했었다.        

                           

  한 해 농사를 마치고 할머님과 상의해서 시골 생활을 정리하고 나는 서울로 상경하여 고모부님 소개로 직장을 구하게 되었고 , 하숙을 하며 서울생활이 시작 되었다. 1986년도 아시안게임 유치 기념행사가 여의도 한강 시민공원에서 한창일 때, 마포대교를 걸어서 퇴근했고, 만리동 산동네 하숙집에 도착하면 하루의 피로를 풀기위해 술을 마시고 잠을 청하곤 했지만, 혈기 왕성한 20대 초반이라 일에 지장은 없었다. 성실하게 근무한 결과 사장님께 인정받게 되었고, 월급 20만원 중에 18만원을 정기적금을 들면서 돈을 모아 2년후 나는 독립해서 작지만 내 사업장을 갖게 되었다. 관악구 봉천동에 자리 잡고 헤어져 살던 동생들을 데려와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고, 사업도 잘 되어서 전국에 건설현장을 다니며 일을 했고 퇴근해서는 술집에 들러 거하게 마시고 귀가 하는 것이 당연한 일과가 되었다. 이 무렵 여동생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 1년 교재 후 결혼하여 아들 둘을 키우고 살면서 술은 많이 마시는 편이었지만 술 문제는 밤늦게 까지 친구들과 어울리고 돈이 지출 되는 것 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   


2000년도 서울시 6차 동시분양 아파트 청약자 모집 광고를 보고, 총각 때부터 들어놓은 청약부금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주택은행에 신청한 결과 40대1의 경쟁에서 당첨되어 지금 거주하고 있는 상도동 래미안 아파트로 이사 왔다. 새 집으로 이사 올 때 아내와 아이들은 무척 좋아 했고, 서른다섯 이내에 서울에 내 집 장만의 목표도 이루었다. 새 집에 와서 막내를 낳았고 특별한 관심과 애정으로 키웠고, 올해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다. 나는 나름대로 사업을 꾸려가면서 가장으로써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 했지만 늘 혼자인 듯 외롭고 우울하며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몰려오면 항상 술을 마셨다. 좋아서 마신 것보다 습관적으로 마셨다. 음주량도 많아지고 횟수도 잦아지면서 음주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한 것은 40대 후반부터 인 것 같다.


  자아 방어기재(부정 , 투사 , 최소화 , 합리화)는 심했고 ,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 사고로 감정적 분규가 있을 때면,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데 일단 마시고 보자는 생각이 먼저였고 자기연민에 빠져서 우울증 화병 진단을 받고 약을 복용 하면서도 의사의 금주 권고를 무시하고 갈망감을 견디지 못해서 술을 마셨다. 


밖에서 지인과 술자리를 하게 되면 폭음을 해서 다음날이면 어떤 대화를 했는지 술을 얼마나 몇 병이나 마셨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불랙아웃이 자주 있었다. 심지어 폭음으로 의식을 잃고 길거리에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이 무렵 불면증이 심해서 술을 마셔도 잠을 못자고 7일간을 밤낮으로 전혀 잠을 잘 수 없었고 피곤함과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 수면제를 처방받아 약의 도움으로 잠들기 시작했다. 술을 마셔도 집은 잘 찾아 갔는데 때로는 방향 감각을 상실하여 엉뚱한 곳에서 헤매는 일도 있었고, 윗 층의 층간소음 문제로 취중에 칼을 들고 올라가서 시끄럽게 소란을 일으켜 경찰에 연행되어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나와 후에 검찰청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어느 일요일 아침부터 막걸리를 식탁에 앉아서 마시다가 아내의 핀잔과 비난에 화가 나서 언성이 높아 졌는데 , 자고 있던 큰 아이가 화를 내며 나와서 내 어깨를 밀쳤고 나는 거실 바닥에 뒤로 넘어 지면서 배신감에 눈에 보이는게 없었다. 해병대 전역하고 대학 졸업해서 직장에 다니는 큰아들에게 “낳아서 길러준 아버지한테 이런 식으로 밖에 못해?” 라고 하며 분노가 폭발하여 과도를 휘둘러 피하는 아이에 손을 베어 거실에 피가 낭자했고, 둘째 아이가 뒤에서 꽉 안고 있는 사이 경찰이 오고 큰아이는 응급실로 가고 나는 경찰서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다음날 술이 들깬 상태에서 집구석이 싫다는 이유로 옷가지를 챙기러 집에 왔는데 , 디지털 도어락은 열리는데 보조 잠금 장치가 잠겨있어서 현관문을 열수 없자 해머로 도어락을 부수고 열쇠 수리공을 불러 잠금장치를 해제 시키고 가방을 싸서 집을 나왔다. 


마땅히 갈곳이 없으니 인근에 있는 모텔로 가서 장기 투숙할 요량으로 한 달 숙박료를 계산했다. 화도 나고 술이나 마셔야겠다고 밖으로 나가서 소주 10병을 사와서 모텔방에 앉아 글라스 잔에 술을 따라 마시고 있자니 알코올이 온몸에 퍼지면서 세상만사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술 먹는다고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어서 좋고, 쉬면서 일 있으면 나가고 마음 편하게 살아보자는 생각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몰랐었다 내가 알코올에 무력했으며, 내 삶을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집을 나갔다는 소식을 들은 광명시에 살고계신 막내 고모로부터 전화가 와서 하시는 말씀이 “너 지금 어디에 있어? 고모가 너 살려 줄게 병원에 입원하자. 꼼짝 말고 거기 있어.” 그런 후 고모는 곧바로 도착했고 고모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이 경기도 의왕시 소재 다사랑 중앙병원 이었다. 


  7병동 입원 생활이 처음이라서 적응 하는데 시간은 걸렸지만 조금씩 익숙해 질 무렵 다사랑 병원 밖에서의 생활이 그리웠으며 일에 대한 걱정도 많아서 정신이 혼란한 상태였다. 반복되는 알코올중독에 관한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 하면서 숙고하기 시작했고 이왕 하는가 제대로 한번 해보자는 각오와 다짐을 하면서 나름 열심히 임했지만, 때로는 부정하고 투사하며 합리화 하려는 중독성 사고들로 인해서 괴롭고 답답한 날들을 보내기도 했었다 .


  다사랑 중앙병원 담당상담사 선생님의 특별한 관심과 열정 덕분에 1개월여의 관리병동 생활을 성실하게하고, 1단계 발표를 하면서 나의 알코올중독과 왜곡된 사고의 제 멋대로의 잘못된 삶을 전반적으로 정직하게 시인 했다. 하늘에서 비가 처량하게 내리던 어느 날 5층 흡연장에서 담배를 피우며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물방울이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떨어진 자리에 계속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문득 세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내가 술을 끊지 못한다면 내 아이들에게 알코올중독이 대물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피폐해진 내 삶도 문제 이지만, 아이들 장래의 삶도 걱정하게 되면서 나의 세대에서 알코올중독의 쇠사슬을 단호하게 끊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다사랑 중앙병원 개방병동으로 전동하여 9주간의 프로그램에 참여 하면서 환우 선생님들의 관심과 배려 그리고 지지해 주심으로 특별한 우정의 따뜻함을 느꼈고, 규칙적인 생활 습관에 적응 하면서 긍정적인 사고로의 전환과 희망을 갖기까지에는 다사랑중앙병원 치료진의 정성어린 지도와 열정이 있었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개방병동 생활 당시에는 코로나 질병 전이라서 토요일은 외박이 허락되어 설레는 마음을 안고 1박2일 집에 다녀올 수 있었고, 개방병동으로 복귀하는 날은 제 시간 내에 도착 하려고 늘 서둘러서 출발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사회 적응 훈련이며 술의 유혹을 잘 극복할 수 있는지 관찰하기 위한 프로그램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


  개방병동에서의 생활에 충실 하면서 4단계 발표와 9단계 발표를 준비할 때는 나의 지난날들을 회상하게 되었고 , 술을 마신 내 자신이 잘못 살아온 것으로 인해서 피폐하고 불행해진 가정과 가족에 대해서 책임과 뉘우침을 갖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내가 술을 마심으로 인해서 경제적 손실과 각종 사건사고에 따른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 것에 대한 미안한 감정과 함께 사과하고 직접 보상해야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앞으로 술 취하지 않는 온전한 맑은 정신으로 살아야 겠다는 결심과 사람답게 살자는 의지를 굳건히 다짐하면서 나는 개방병동 9주 수료를 하고 3개월여 만에 퇴원 했다. 그러나 내 삶의 현실 세계에서는 나 혼자의 의지력만으로는 단주할 수 없었다. 


다사랑 중앙병원의 치료진과 특히 담당상담사 선생님께서 수없이 많이 강조하고 부탁하셨던 회복 프로그램을 나는 실천하지 않았고, 외래진료 까지 회피 하면서 재발은 예정된 일이었다. 낙오된 한 마리 병든 어린 새처럼 나는 고독한 자기연민에 빠져서 외롭고 우울해 하며 불안에 떨었고 그럴 때마다 술로 도피를 했지만, 교활하고 당황하게 만들며 강력한 알코올은 나를 다섯 번이나 다사랑 폐쇄병동으로 가도록 만들었다.


  다사랑 중앙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동안 나의 아내는 다사랑에서 권유하는 가족교육에 성실하게 참여하면서 가족회복 모임인 알아넌을 소개 받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어느 누구 보다도 회복의 열망을 갖게 된 알아넌 멤버가 되었다. 다사랑 중앙병원에서 다섯 번째 퇴원을 할 무렵 아내는 나에게 까리따스라는 알코올 회복센터가 있는데 함께 가서 상담하고 6개월 수료를 하자는 것이었다. 퇴원 후 다음날 센터를 방문 상담하고 바로 6개월의 회복 프로그램에 들어갔고 6개월이 지난 지금 나 스스로 1년 연장을 했다. 그동안 다사랑 중앙병원에 정기적으로 외래진료를 받으러 다녔고 나는 3대 회복 프로그램인 인지행동, 동기부여, 12단계 생활화, 그리고 A.A모임에 꾸준히 나가고 있고 종교 모임에도 참여하고 있다.  


  단주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 술 마시던 시절에 따라 다녔던 불안, 근심, 공포, 두려움, 우울증, 자기연민, 불면증 등의 고통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지고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다. 가족관계 또한 많이 회복되어 지금은 아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을 전해 듣고 아이들도 나처럼 평온함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 평생에 술 마시지 않은 맑은 정신으로 명절을 보낸 것이 처음 이었고, 특별한 일이 없는 평범한 일상이 행복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회복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다사랑 중앙병원의 의료진과 상담사 선생님의 세심한 관심과 격려 덕분이며, 이번 회복수기 공모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다사랑 중앙병원의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