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열지 않음

다사랑중앙병원

전국 최초 3회 연속 보건복지부 지정

알코올전문병원 다사랑중앙병원

생생다사랑

  • home
  • 생생다사랑

환자회복수기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치료받은 환자분들의 생생한 회복 경험담입니다.
알코올 중독 치료를 통해 새 삶의 희망을 찾으신 환자분들의 진솔한 회복 수기가
알코올중독으로 고통받고 있는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환자회복수기는 회원가입 후 로그인하셔야 보실 수 있습니다.

[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 새로운 삶을 위한 시작!
등록일 2022-11-17 조회수 480 이름 1389031911
첨부파일 게시글-회복수기.png
[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

새로운 삶을 위한 시작!



  저는 어렸을 적 엄한 아버지와 자상하신 어머니 그리고 형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제가 바라본 아버지는 무섭고 무뚝뚝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저녁상에는 . 항상 술병이 올라와 있었고 아버지는 밥을 안주 삼아 술을 드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술 때문에 사회생활이나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시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지역 사회에서 봉사도 많이 하시고 다른 사람 부럽지 않게 사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하곤 했습니다. 경제적인 부분이나 사회생활 부분이나 아버지는 두려움에 대상이기도 했지만, 저의 우상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배구”라는 운동을 중학교 때부터 시작했습니다. 운동 생활을 한다는 것은 마치 군대생활을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항상 배구부 숙소나 체육관에 있어야 하고 감독님께서 외박이나 휴가를 주시기 전까지는 집에 가거나 외출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학생시절에 가고 싶은 곳도 많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오로지 배구만을 할 수 밖에 없는 삶을 살았었습니다. 그렇게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학교에 감금(?)되어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항상 자유를 꿈꾸며 중·고등학교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대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저의 “자유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6년 동안 학교에서 운동만 하던 제가 지방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면서 부모님도 저를 감시하거나 터치할 수 없는 그런 생활이 시작 된 것입니다. 꿈만 꾸었던 자유로운 생활이 시작되니 “술”이라는 것이 제 인생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대학교 생활 동안 일주일에 5회 이상 술을 마셨습니다. 친구와 마시고, 선배와 마시고, 후배와 마시고, 여자 친구와 마시고 등등 셀 수 없이 술을 마셨습니다. 대학교 생활을 하는 동안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며 생활을 했기 때문에 술로 인한 사고는 없이 술을 마셨고 정말 그 시절에는 “애주가‘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대학 생활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와서 취업이라는 전선에 뛰어 들었습니다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에서 서울로 학원을 다니며 취업 준비를 했습니다. 이때는 술을 마시지 않고 지내는 시기였습니다. 운이 좋은 탓인지 제가 원하는 직업을 갖게 되었고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기분 좋은 것도 잠시였습니다. 회사에서는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고 그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술을 마시는 것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었는데 부모님께서 제가 술 마시는 것을 싫어하셔서 퇴근할 때 몰래 가방에 소주를 넣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저의 혼 술이 시작되었습니다.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가 주시는 밥을 먹고 방으로 들어가서 퇴근할 때 사온 소주를 마시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마땅한 안주는 없었지만 소주를 마시면서 점점 취기가 올라오면서 마치 제가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을 받으며 그 취기를 즐기는 그 시간이 저에게는 너무 소중했습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몇 번 정도 그렇게 하다가 점점 횟수가 늘어서 거의 매일 혼 술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혼 술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 줄은....  그 후 술이 나를 집어 삼켜 나를 그토록 망가트릴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당시 사귀던 여자 친구가 있었고 저는 그 여자 친구를 정말 사랑했습니다. 제 나이 29살 때 결혼을 하자고 청혼을 하였습니다. 여자 친구는 청혼을 받아주었고 그 다음 해인 30살에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와이프는 제 말을 존중해 주고 성격과 의견이 정말 잘 맞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결혼생활이 시작되고 저희는 분가를 해서 자유로운 삶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함께 살던 때와 다르게 마음껏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즐거웠습니다. 사랑하는 와이프와 한 집에서 살게 된 것도 즐거웠고, 제가 좋아하는 술을 아무리 마셔도 와이프는 크게 잔소리를 하지 않는 것이 더욱 저를 즐겁게 만들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술자리를 하는 날도 늘어나고 저는 고삐가 풀인 망아지처럼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와이프는 제 건강을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술을 마셨습니다. 결혼 후 저는 매일 술을 마시게 되었고, 집에 술이 떨어지는 날은 없었습니다.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되는 주말이 되면 아침부터 마셨습니다. 평일에는 출근을 해야 하는 어쩔 수없이 아침부터 마실 수 없었지만, 특별히 아버지 댁이나 처갓집 방문 등을 하지 않는 날이면 항상 해장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루 종일 술에 취해서 집안을 헤집고 다니곤 했습니다. 술은 저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아주 소중한 것이 되어있었습니다. 세상에 나 혼자 남아도 술만 내 옆에 있다면 저는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사실 그랬었던 것 같습니다. 친구를 만나도, 직장 동료와 함께 하더라도, 세상 누구와 함께 있더라도 술이 빠져있는 제 인생을 상상을 할 수도 없었고 상상을 해보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매일 술을 찾았고 그 때마다 술은 저에게 와주었습니다. 내 목으로 술이 넘어가는 그 순간은 너무 황홀했고 기뻤고 무아지경에 빠지는 듯 한 느낌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술을 너무 사랑했습니다. 제가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술을 사랑했습니다. 


  술과 함께 살아가는 날이 쌓여가니 저의 몸도 슬슬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 코피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코피가 가끔 나니깐 잠시 지혈을 하고 나면 멈추겠지 하고 지혈을 하는데 지혈 후에 또 코피가 나고 또 지혈 하고 또 코피가 나고 그러다가 코피가 멈추지 않게 되었습니다. 피가 계속 쏟아지고 있으니 너무 놀라서 119를 타고 인근 병원으로 갔는데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해서 대학 병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도착을 하니 혈압을 먼저 체크했습니다. 혈압이  230이 넘어서 혈압을 떨어뜨리는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도 190이하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혈압이 떨어져야 코피도 멈춘다고 했는데 거의 밤새 약을 먹고 주사를 맞으며 코를 틀어막아 코피를 멈추기는 했지만 그 때부터 고혈압 판정을 받고 지금까지도 고혈압 약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피가 나기 시작했을 때 코에서 피가 났으니 코피로 끝났지 머리에서 터졌으면 뇌출혈로 위험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 후로 또 음주가 지속적으로 이어졌습니다. 고혈압은 약을 먹으니 이제 코피가 터질 일은 없으니 그 일이 있기 전과 동일하게 술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배가 너무 아파서 위염인 줄 알고 참고 참다가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게 되었는데 처음 들어보는 “췌장염” 이었습니다. 


  대학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저는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3일을 보냈습니다. 제가 깨어나고 보니 3일이 지나 있었습니다. 그 동안 수도 없는 진통제를 맞으면서 숨만 쉬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저는 세상에서 그렇게 아픈 병이 있는지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술이라고 의사선생님께서 말씀을 하셨고 퇴원을 할 때 기름진 음식과 술은 절대 마시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퇴원을 한 후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 다짐은 2달을 못 넘겼고 다시 조절 음주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소주 1병만 또 오늘은 소주 2병만, 또 오늘은 소주 3병만 또 오늘은 소주4병만 이렇게 전처럼 마시기로 돌아오기까지 1달도 걸리지 않아 예전처럼 또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고혈압과 고지혈증 그리고 췌장염까지 오니 와이프의 잔소리는 더욱 심해져 갔습니다. 그래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마셔댔습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췌장염 너무 ……. 많이 아팠습니다. 또 다짐을 했습니다.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지속적인 음주, 저는 다짐 했습니다. 취할 때까지 마시지 않겠다고, 회식 때만 술을 마시겠다고, 약속이 있을 때만 마시겠다고, 집에는 술을 사오지 않겠다고, 해장술을 절대로 마시지 않겠다고, 1차만 마시겠다고, 밤 12시 전까지만 마시겠다고, 와이프의 잔소리가 심해지면 마시지 않겠다고, 친구들과 헤어지면 더 이상 술을 사지 않겠다고, 더 마시자고 친구들에게 조르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다짐 따위는 필요가 없었습니다. 모든 다짐을 뒤로하고 저는 또 취하고, 회식이 끝나면 2차 가자고 선동을 했고 또 3차로 이어지고 해장술을 마시고, 약속을 만들어서 술을 마시고, 약속이 안 잡히면 혼자 술을 마시고,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또 취했습니다. 이제 제가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닌 술이 저를 삼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또 찾아온 췌장염, 이번에는 췌장염만 오지 않았습니다. 알코올성 섬망이 같이 왔습니다. 섬망이 점점 심해져 갈 때 저는 환청부터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환시, 저는 그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간호사들과 . 보호사들은 모두 괴물로 보이기 시작했고 저는 그들과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섬망이 진행되는 동안 저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와이프까지도 밀어내 버리고 저의 폭력적인 행동은 계속 되었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병원의 중환자실로 입원이 되어버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저의 팔과 다리, 머리는 묶여 있었고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하니 기저귀를 채워놨으니 그냥 싸도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중환자실에서 며칠을 보내고 일반 병실에서 입원해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을 고생 시키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다시 술잔을 잡았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을 처음 알게 된 후 와이프는 입원이 아니더라도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는 것이 어떠냐고 저에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다사랑 중앙병원을 내원하게 되고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으며 단주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잠시 처제 집에 놀러갔을 때 그 단주는 깨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처제 집에서 엄청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일로 와이프는 아이들을 데리고 처갓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 “될 대로 되라” 라는 마음으로 혼자 집에서 폭음과 장취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와이프가 2달 만에 집에 돌아와서 하는 말이 “정신병원에 입원할래? 아니면 나랑 이혼할래?”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이혼하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입원할 당시에도 술에 너무 취한 상태여서 무조건 입원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자 너무 후회가 돼서 병원 내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다시 저의 팔과 다리는 침대에 묶이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으며 처음에는 감옥 같아서 너무 싫었습니다. 폐쇄병동에 갇혀서 3일 동안 주사를 맞으며 감옥 같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나마 담배를 피울 수 있어서 그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3일이 지나고 교육을 받으러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지루하기만 하고 재미도 없고 남는 것도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간식비로 노트와 펜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교육 시간에 강사님들이 교육하는 내용을 받아 적기 시작했습니다. 집중을 하여 교육을 받다보니 생각보다 교육 시간이 재미가 있었습니다. 유익한 정보도 많이 있었고 저의 단주에 도움이 되는 교육 내용들이 좋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육을 받고 상담사님께서 주시는 숙제를 해 나가면서 조금씩 병원에 적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집에서 성경책을 보내왔습니다. 어머니께서 시간이 남을 때 성경을 필사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교육 시간에는 교육에 집중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담배도 피고, 운동도 하고, 성경 필사도 하고, 다른 환우들과 친하게 지내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입원 했을 때는 도통 잠이 오질 않아 수면제를 언제 주냐며 간호사님들께 호소도 하고 적응을 잘하지 못하였지만 간호사님들과 보호사님, 상담사님, 주치의 선생님들이 너무 잘 해주셔서 빨리 적응을 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5주라는 시간 동안 폐쇄 병동에서 지내다가 1단계 발표를 하고 개방 병동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폐쇄병동과 시스템이 조금 달라서 적응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개방 병동이 조금 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방병동으로 이동해서 가장 특이했던 점 3가지가 있었습니다. 수요일 저녁마다 AA모임을 했었는데 처음 하는 모임이라서 뭐가 뭔지 모르고 참석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외출 시간이 주어져서 그 시간에 간식을 사러가거나 산책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었습니다. 그리고 폐쇄 병동에서 보다 더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교육 시간이 주어졌었습니다. 12단계 프로그램, 온전한 생활, 사회 기술 훈련, 현실 치료, 인지행동치료, 4 단계 발표, 재발방지 집단, 에니어그램, 기도와 명상 등 많은 프로그램들이 있어서 저에게는 더 없이 좋은 교육이 되었습니다. 특히 에니어그램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하루는 같은 방을 쓰는 환우가 외출 시간이 끝나도 돌아오질 않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집에 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며칠 뒤에 그분의 짐을 가져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저의 마음은 동요되었었습니다. 


  “나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들어서 힘든 시간을 보냈었습니다. 폐쇄병동에 있을 때부터 부모님께 그리고 와이프에게 나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오던 저이기 때문에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은 더욱 커져 갔습니다. 그렇게 개방 병동에서 지내면서 식사도 하고, 교육도 받고, 필사도 하고, 운동도 하고, 담배도 피고, 야식도 먹고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퇴원 날짜가 점점 다가왔습니다.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저의 정신병원 생활이 드디어 끝나는 구나 다시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으리. 꼭 단주에 성공해야 갰다는 마음을 하루에도 1,000번 이상 했습니다. 


  그렇게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퇴원을 하니 정말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식구들과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3달을 채우지 못하고 저는 몰래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메리카 노에 소주를 섞어서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몰래 술을 조금씩 마시게 되었습니다. 담배 한 대 피러 나갔다 온다고 하고 소주 반병, 또 담배 핀다고 나가서 한 병,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고 편의점 다녀온다고 하고 또 한 병, 한 병으로 부족하니 소주병을 숨겨 놓고 왔다 갔다 하면서 계속해서 마시게 되었습니다. 결론은 다시 정신 병원으로 입원이었습니다. 술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저를 데리고 정신 병원 앞으로 가서 “이혼 할래? 입원 할래?” 라는 말을 또 했습니다. 저는 가게에서 과자하나만 사달라고 하고 재빠르게 소주 한 병을 집어서 부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소주 한 병을 마시고 나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내 발로 들어갈게”라고 이야기 하고 다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두 번째 입원을 하고 병원에서 많이 울었습니다. 첫 번째 입원을 했을 때 사람들이 처음 입원하는 게 힘든 일이지, 두 번 세 번 여러 번 입원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미친 거 아니야? 여기가 뭐가 좋다고 또 들어온단 말이야,” 라고 생각 했었는데 제가 두 번째 입원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저는 또 입원을 하고 말았습니다. 많은 후회가 밀려 왔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후회하고 또 후회 했습니다. 너무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고 있었습니다. 밥도 먹지 못하겠고 시간이 가지 않고 저에게는 정말 지옥과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다시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하고 또 했습니다. 


  퇴원을 한 후 단주를 하리라고 다짐 했습니다. 절대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술을 마시지 않겠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단주는 쉽지 않았습니다. 편의점에 있는 소주가 저를 부르는 말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그래도 참았습니다. “갈망”이 몰려 왔지만 그래도 참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생단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마음 밖에는 없었습니다. 방법을 찾던 중 “AA” 온라인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핸드폰으로 “온라인 AA 모임”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대체 이걸 왜 들으라고 하는 건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지만 계속 듣다 보니 조금씩 무언가가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오프라인 AA 모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온라인 AA모임"에서 알게 된 멤버에게 물어 물어서 “안산 AA모임”에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어색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듣기만 하다가 저도 “경험담”을 시작했습니다. 이상하게 모임을  하고 집에 갈 때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때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게 오프라인 모임의 힘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안산 AA모임”에 사회봉사를 맡고 있으며 “수원성 AA모임”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의 오프라인 모임에 참여하고 있으며 시간일 날 때마다 “회복의 힘”이라는 책을 필사하고 위대한 힘께 저를 맡기고 저의 생각이 먼저가 아닌 위대한 힘의 뜻을 따르는 단주 생활과 회복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병원에 입원 했을 때의 기억이 현재 단주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병원에서 얻은 것들과 AA모임에서 얻은 힘, 그리고 여러 협심자 선생님들이 나누어 준 힘 등에 도움을 받아 지난 8월에는 1년 단주 칩을 받고 단주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술을 마셨을 때 저의 생활과 단주를 하고 있는 현재의 삶은 삶의 질이 달라져서 건강하고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제가 된 것 같아서 너무 기쁩니다. 단주와 회복의 삶을 이어가서 보다 성장된 저를 만들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저의 새로운 삶을 위한 시간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글을 읽어 주신 많은 선생님들께 감사드리며 “술 = 죽음”, “단주 = 행복”이라는 단어를 기억하고 12단계 중“ 우리는 알코올에 무력했으며, 우리의 삶을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시인했다”를 기억하고 실천한다면 단주를 성공할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선생님들의 앞날에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