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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회복수기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치료받은 환자분들의 생생한 회복 경험담입니다.
알코올 중독 치료를 통해 새 삶의 희망을 찾으신 환자분들의 진솔한 회복 수기가
알코올중독으로 고통받고 있는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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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 중독에서 치유중인 나!
등록일 2022-11-17 조회수 473 이름 1389031911
첨부파일 게시글-회복수기.png
[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

중독에서 치유중인 나!    



  저는 2018.09.30. 남편과 가족에 의해 강제 입원된 유*화입니다. 저는 제가 왜 입원을 해야 하는지 이유를 정말 몰랐습니다. 저는 다만 술이 좋아서 마셨을 뿐인데 억울한 마음에 왜 라는 의문을 갖고 강제 입원이 되었습니다. 왜 라는 이유 중 하나는 남편도 술을 마시고 있었고 남편은 과거부터 술 때문에 사고도 엄청 많이 친 사람인데 입원을 안 하고 왜 저만 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의 다사랑중앙병원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웃긴 건 사람들이 저보고 알코올 중독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한 사람 중 단 한명도 본인이 중독자라고 인정하지 않았고 저랑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저 술을 좋아했을 뿐이고 그래서 매일 마셨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병원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습니다. 퇴원만 해봐라! 저는 보란 듯이 가족들 앞에서 짝으로 놓고 마시겠다고 다짐하며 또 다짐하며 하루하루 병원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병원이 술을 끊기 위해서는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하면서 교재까지 구입하라고 권했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일단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다 했습니다. 3~4일 후부터 수업을 듣기 시작했는데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도 없었고 또, 왜 들어야 하는지의 이유도 몰랐습니다. 이후 관리병동도 상담사님과 상담 후 반이 두 반으로 갈라졌습니다. 저의 상담사는 여자분 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특별히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그냥 병원에서 시키는 것은 모두 다했습니다. 그런데 이 병원은 정말 웃겼습니다. 학교도 아닌데 교재를 읽고 요약정리를 하고 그 요점정리에 맞는 저의 느낌이나 경험을 써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참으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수업만 참석하고 근 한 달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 지내다보니 나름 병원생활에 적응이 되어져 가면서 요점 정리하는 것을 해가기 시작했습니다. 교재를 읽어 나가면서 그 교본에 있는 내용들이 저랑 비슷하거나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내가 알코올중독자가 맞긴 맞나보네 하면서 고개를 갸웃 둥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병원 생활을 하면서 외부에서 들어오는 AA메시지를 접하게 되었는데 남자 세분이 와서 말을 하는데 꼭 미친놈들 같고 사이비 종교단 같아 이상했습니다. 이들의 말인 즉, 장례식장에 가서 술과 안주를 구걸한 사건을 말했고 또 한사람은 여자얘기나 하고 또 한사람은 입에 거품 물고 하나님을 찾고 한마디로 그냥 미친놈들이었습니다.


  그렇게 AA라는 것을 처음 접해보았고 이후 주말에는 여자 분들이 와서 AA메시지를 했는데 같은 여자라서 그런지 고개가 끄떡여지는 말들을 하고 저도 그 말에 조금은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여자 분들이 와서 말하는 것들을 듣고 AA모임이라는 것에 대해 처음 제 생각과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생활을 계속하면서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코올중독이라는 것에 대해 병원에서는 저로 인해서 상처받은 가족들 즉, 그것이 가족병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족들에게 피해를 끼친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병원 생활을 하면서 저는 입원시켰던 남편, 큰딸, 친언니 그리고 이웃에 사는 절친 이 사람들이 저를 살리기 위해서 입원을 시켰다는 사실을 차차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당시 큰 용기를 내어 가족들이 만약 강제입원을 시키지 않았다면 지금 현재 나는 존재할 수 있을까? 만약 존재하고 있다면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쓴 웃음을 지어봅니다.


  병원생활을 하면서 1단계를 발표하고 4개월 만에 개방병동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개방병동에서는 수업 후 저녁때 의무적으로 AA모임에 참석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말에 보호자 허락 하에 외박도 가능했습니다. 저는 저녁마다 매일 모임에 다녔습니다. 나름 즐겁게 다녔던 것 같습니다. 아니 사실은 병원을 벗어날 수 있어서 모임이 좋았던 것이었습니다. 상담사 선생님 허락 하에 외박을 나가면서 혼자서 AA모임을 찾아가 보기도 했습니다. 그곳은 분당 야탑에 차병원에서 하는 청솔 그룹이었습니다. 당시 계면쩍어 하면서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노인정인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 분들이 얼마나 반갑게 맞이해주는지 바로 민망해졌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개인적 모임생활이 시작되었고 그러다 명동성당에서 하는 모임도 찾아가 보았습니다. 명동 모임은 다른 모임과는 달랐습니다. 정말 저와 같은 유의 많은 분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이 하는 경험담도 다른 곳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저는 명동성당 모임에 홀딱 반했습니다. 매주 주말마다 명동모임과 야탑모임은 꼭 갔고 그리고 다른 분들께도 추천해서 함께 다녔습니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음주생활이란 뭔가라는 생생한 경험담들이었습니다.


  AA모임에서는 제일 큰 행사는 라운드 업 이었습니다. 주로 1박 2일로 하는 모임인데 처음 가보았고 그곳에서 마라톤(밤새하는 경험담)도 해보았습니다. 처음 참석당시 어찌할지 모르는 저에게 상담사 선생님께서 올라가 이름이라도 말하고 내려오라고 했고 이는 저에게 반 협박처럼 들리며 대단히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겸연쩍었지만 어설프게나마 경험담도 했습니다. 또한 타인들의 그런 경험담을 들어 본적이 없었던 저는 매시간 마다 습관적으로 담배 피는 것도 잊은 채 그 자리를 쭉 지켜봤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행사가 자주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저는 병원에 있다 보니 이런 행사의 참여가 자유롭지는 않았습니다.


  한번은 AA모임에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이때 동료 환우가 같이 가고 싶다고 해서 상담사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여 끝까지 책임지겠다. 약속을 하고 일요일 2시 모임까지 하는 것으로 허락을 받고 간 것으로 AA모임을 잘 마치고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환우와 저는 각자 볼일이 있어서 흩어져서 일보고 병원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습니다. 사적인 일을 보고 제가 병원 앞에 제가 먼저 도착했는데 같이 외출한 동료 환우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순간 그 환우가 탈출했다 속단하고 병원근처를 뒤지며 찾아다녔습니다. 그 환우가 사라졌다 생각되니 하늘이 노래졌습니다. 이것은 책임감이었습니다. 생각 없이 말했던 책임지겠다고 한 한 말에 대한 무게감에 얼마나 병원 주변을 돌아다녔는지 모릅니다. 이에 찾는 것을 포기하고 병원 앞에 도착했더니 그 환우가 병실창문으로 손을 흔들면서 저를 처다 보며 언니라고 불렀는데 반갑기도 했지만 홧김에 그만 제 입에서 쌍욕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만약, 당시에 그 환우가 병원이 아닌 다른 곳으로 샜다면 하면...! 끔찍해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반면 병원에 잘 도착한 사실에 안도감이 들긴 했지만 당시 저의 생각이 복잡해서 그만 저도 모르게 그 환우에게 욕부터 했던 것 같습니다. 예전엔 저는 말과 행동이 따로 였고 그냥 건성으로 약속했는데 이런 언행은 모두 알코올에 지배당한 미친 정신으로 살아왔을 때의 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병원생활중 당시의 이 사건은 최고 두려운 사건이었고 저의 말에 대한 책임감이 크다는 것을 그 때 깨달았습니다. 말을 한 후에는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병원생활 6개월쯤 돼가는 중에 남편이 이제 퇴원하자는 말이 먼저 꺼냈습니다. 그러나 저는 퇴원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고 4단계 준비하고 그것만 발표하고 퇴원하겠다고 말하니 남편도 더 이상 말을 안 하고 알겠다면서 열심히 준비하라고 응원해줬습니다. 입원 후 6개월 동안 병원생활을 하면서 외출 외박을 해보는 중에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가족애를 많이 느꼈습니다. 이것은 술에 미쳐서 살고 있을 때 저에게 냉대했던 딸들이 말을 걸어주고 관심을 주고 하는 것들이었는데 제가 중독자시절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 이었습니다. 


  4단계 발표를 준비하면서 잊고 묻고 싶었던 과거들 또 저만의 상처를 들추고 싶지 않았지만 가슴 밑바닥에 감춰두었던 사실들 그리고 가족과 주변인들이 몰라도 되는 내면의 깊은 상처들이 들춰지는데 것에 대한 부끄러움에 많이 힘든 4단계 준비기간 이었습니다. 이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4단계 준비는 슬픔과 기쁨을 모두 느껴보는 소중한 과정들의 기록이었고 특히 그간 저의 내면 깊은 곳에서 두려움이 많았었다는 사실을 4단계를 준비하면서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다른 많은 희비의 감정들이 교차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저는 3개월 동안 준비한 4단계 발표를 하고 그날 바로 퇴원을 했습니다. 2019.07.02. 퇴원해 짐을 정리하고 그날 바로 성남시 복정동에 있는 모임으로 찾아갔습니다. 퇴원 후 처음으로 혼자서 찾아가는 모임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