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열지 않음

다사랑중앙병원

전국 최초 3회 연속 보건복지부 지정

알코올전문병원 다사랑중앙병원

생생다사랑

  • home
  • 생생다사랑

환자회복수기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치료받은 환자분들의 생생한 회복 경험담입니다.
알코올 중독 치료를 통해 새 삶의 희망을 찾으신 환자분들의 진솔한 회복 수기가
알코올중독으로 고통받고 있는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환자회복수기는 회원가입 후 로그인하셔야 보실 수 있습니다.

[2016 다사랑 재활수기 공모전] 저도 행복할 수 있을까요?

[2016 다사랑 재활수기공모전 4등 평온함상]   저도 행복할 수 있을까요? 이OO   “엄마 이번엔 잘하고와~ 울지 말고 잘 지내고 있어! 내가 매일 전화하고 주말마다 보러 갈게”   내가 대답이 없자 17살 난 아들이 큼직한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아줍니다. 눈물이 납니다. 이번엔 두툼한 손으로 제 눈물을 닦아줍니다.   아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그런 자신의 얼굴을 들키기 싫었는지 형부 차에서 급하게 내려 터미널을 향해 뛰어갑니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몰라 뒷모습을 하염없이 보고 있는데 아들이 뛰어가며 팔꿈치로 눈물을 훔치는 게 보입니다.   “휴~ 또 저 아이에게 상처를 줬구나" 항상 문제를 일으키고 일은 벌여놓고, 그래도 엄마라고 아이 걱정에… 미안함에… 고개를 숙입니다.   2015년 8월 12일 이곳 다사랑중앙병원에 오기 전 아이의 모습이었습니다. 병실로 올라와 병원 기본수칙 등을 듣고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화장실에 갔습니다. 거울속의 내 꼬라지를 보니 부끄러워 쳐다볼 수가 없습니다. 이마 사이의 미간은 찢겨져 큰 칼자국처럼 보이고 입술이 터져 피가 말라 붙어있고 벌어진 입술사이로 보이는 부러진 앞니…. 퉁퉁 부은 얼굴에 하룻밤 사이 생긴 낮선 상처들…. 내가 아닌 것 같습니다.   병원 입원 하루전날 남편이 통보를 합니다. 집에서 이어진 몇날며칠의 술로 취해 무기력해 있는 제게 서울 친정집으로 가라고 합니다. 내일 당장 가지 않으면 아주 멀리 떨어진 지방의 섬에 있는 무허가 기도원으로 보내겠다고 합니다. 무서웠습니다.   쫓겨나듯 집을 나와 아들과 함께 서울행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감히 나를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며 쫓겨났다는 자책감에 소주 두 병을 마시고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버스에서 내리다 넘어져 이 꼴이 된 것입니다. 버스에서부터 저는 기억이 없습니다. 넘어진 것도, 아들이 나를 부축해 큰언니에게 연락한 것도…. 아들이 옆에 없었다면 그 순간 저는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이번이 세 번째 입원, 이번엔 얼마나 있어야 하나…. 한 달? 석 달? 일 년? 저는 2014년 4월 처음으로 전라도 광주에 있는 알코올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처음 보는 원장님은 나에게 알코올 의존이라며 3개월 동안 입원 치료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헛웃음만 나옵니다.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고 맞장구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저도 어느 정도 나에 대해 술 문제가 있다는 예상은 하고 병원에 간 것이었으니….   처음 접해본 폐쇄병동! 무서움도 잠시,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이제 끝났구나. 여기에 3개월만 있으면 술을 끊을 수 있다는 거지? 술 생각이 안 나고 술을 거부하게 하는 약을 먹고, 그동안 술에 찌든 몸은 수액을 맞으며 몸을 해독시키고 정신과전문의와 1:1 심리치료를 하면 3개월 안에 술이 자동적으로 끊어진다는 거지? 그러다 몸도 회복되고 하면 한 몇 개월 안 마시다 조심해서 조금씩만 마셔야지.’ 제가 의사가 되어 마음속에 내린 처방이었습니다. 저의 완전한 착각의 시작이었습니다.   저는 2개월 보름 만에 퇴원을 하고 조절망상에 빠져 맥주만 마시면 괜찮을 거란 합리화에 넘어가 5개월 만에 두 번째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6개월 동안 배운 받아들임, 알코올 중독자임을 인정, 12단계 프로그램, 위대한 힘… 저에게는 모두 딴 세상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아무리 교육을 받아도 상담을 해도 저의 마음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받아들임이 무엇인지, 나의 술 문제에 대해 걱정은 했지만 알코올 중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저 병동생활에서 규칙 잘 지키고 수업시간 빼먹지 않고 몸만 잘 따라주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시간이 되면 지난번처럼 남편이 빼주겠지. 여기 있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네! 하루 2번의 2시간 산책, 남자 환우들과 히히덕거리며 교육시간 잘 때우면 열심히 한다며 권익도 올려줘 외출?외박도 자유롭고, 삼시세끼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시간 맞춰 밥 주고, 먹고 싶은 거 간식 다 시켜먹고…’   이런 마음으로 병원생활을 하니 술에 대한 무서움도, 내가 어떤 상황인지도 느낄 새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1년간 직장생활을 하다 관둔 저에게 병원생활이 휴식이라 생각하며 그 시간을 즐겼던 것 같습니다.   저는 4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19살이 될 때까지 부족함 없이 아쉬울 것 하나 없이 자랐습니다. 방학 전날 집이 떠나갈 듯 울면 언니 세 명이 모두 달라붙어 방학숙제 등을 해결해 주었고, 학창시절엔 문제아로 학교에서 술 먹고 담배 피우고 여러 사고를 칠 때마다 엄마가 바로바로 달려와 해결해주었고, 다른 친구들 몇몇이 학교를 그만두고 전학을 갈 때에도 저는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하지만 19살에 12살 많은 남편을 만나 전라도 맨 끝으로 내려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혼란스런 시기를 맞았던 것 같습니다. 19년을 그렇게 풍족하게 살진 않았지만 결혼을 해서 이렇게 없이 살아본 적도 없었습니다. 경제적, 물질적으로 힘들 때마다 매번 친정집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전 부탁이라고 했는데 그때그때 만족이 되지 않을 때엔 술을 먹고 엄마, 언니들에게 인연을 끊자, 난 이 시골 촌구석에서 혼자 속상해 죽어버린다며 협박 아닌 협박, 막말을 해가며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야 했습니다. 경제 관념뿐만 아니라 생활처리 또한 스스로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친구들이 보고 싶을 때나 놀고 싶을 때엔 멀쩡한 아들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서울 친정집엘 밥 먹듯이 드나들었고 한 달, 두 달씩 아이를 맡기고 친구들을 만나 흥청망청 술을 마시러 다니기 바빴습니다. 결혼생활을 17년간 하면서도 밥상을 차려도 상 한번 든 적이 없습니다. 내가 밥만 차리면 됐지 구부려 상까지 드는 건 힘들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생각했으니깐…. 사소한 집안일, 장보기, 아이 병원가기, 시골이란 여건을 핑계로 모두 남편과 함께 했습니다. 결혼을 하기 전엔 엄마, 언니 세 명, 결혼을 해선 남편이 있어야만 생활할 수 있는 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34년의 나의 인생은 나를 아주 교만하고, 이기적인, 자기중심성이 강한, 혼자선 아무 것도 스스로 알아서 제대로 뭐하나 할 줄 모르는, 의존성이 강한 인간으로 살았습니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든 환경이 나를 영적으로 병들게 하였다는 것을…. 문제점이 닥칠 때나 어려운 일등을 직면했을 때엔 두려움을 먼저 느껴 술에 의지해 지금의 나를 알코올 중독자로 결론 내렸다는 것을.   첫 입원을 하고 한 달 만에 첫 외박을 나가자마자 몰래 술을 마시고 블랙아웃이 되어 다시 병원으로 끌려오고, 퇴원을 한 뒤에는 병원 환우들 사이에서 들었던 말을 그대로 행동에 옮기는 일등이었습니다. 술을 한꺼번에 사놓고 장롱 이불안, 싱크대, 침대 밑에 숨겨두고 몰래 먹는 일, 비타민 음료와 섞어 마시는 일. 술이 없을 때엔 옆집에 몰래 들어가 술 훔쳐 먹기 등등…. 두 번째 입원을 한 뒤에는 원인모를 저혈당 증세가 계속되어 검사를 위해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는 이틀 동안 무단 외출을 해 만취가 되어 병원에 들어와 침대에서 소변보기, 화장실에서 담배피우기 등을 저질러 입원 4일 만에 강퇴를 당했습니다. 미.친.정.신.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이번만은, 삼세번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정말 잘 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이젠 정신 차리고 싶어졌습니다. 지난 병원에서도 12단계, 온전한 생활, 빅 북 등의 책을 보았지만 다사랑중앙병원에서 관리병동 생활을 하며 다시 보게 된 책들은 마치 처음 보는 책들처럼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제 마음의 문을 열어보려는 용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몸만 병원에 두며 지난번처럼 ‘척’만하며 지내지 않고 마지막 아들의 눈물을 생각하며 마음을 열었습니다.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질 것은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처음 만나는 상담사 선생님과의 면담에서 그 전에 받아보지 못했던 칭찬, 격려에 용기도 얻었습니다. 재발 또한 성장의 과정이라 다독여 주시며 잘 왔다는 말씀하시는 선생님을 보고 저는 비로소 나의 알코올 중독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교도소에 가기 전에, 더 추접하고 몹쓸 일은 저에게 더 이상 일어나게 하지 말자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술로 인해 남편과 아들에게 버림받은 저는 이윽고 밑바닥치기를 본 것입니다.   “저도 행복할 수 있을까요?" 제 질문에 상담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행복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였을 때 맛볼 수 있어요."   있는 그대로의 나, 비참하고 부끄럽기만 한 내 자신….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상담사 선생님을 따랐습니다. 개방반 생활을 하며 뭔가를 잘하려고 하는데 나 자신에 대해 만족감을 느낄 수 없고 내가 남들보다 항상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번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직장생활, 집안생활을 잘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술의 양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남들은 이만큼 먹고, 고통스러운 금단증상을 겪고, 집을 나가 모텔을 잡아 장취를 하고, 법적문제 등도 일으켰지만 난 그런 적이 없다. 술을 적게 먹어서’라고. ‘남들은, 남들은 이러한데 난 아니다’라며 또 내 안의 비교의식에 맞춰 나를 합리화시키고 술 앞에 항복하지 않으려 하는 내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 100% 항복…. 전 1단계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100% 완전한 항복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잘못된 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고 꾀를 부리며 좋은 결과만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내 마음은 열었지만 신을 의지하지 않고 내 의지를 더 믿었다는 것…. 그렇게 저는 개방반에서 가치 있는 두 가지를 얻었습니다. 100% 항복, 신을 의지하는 것.   단계지를 쓰며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내 삶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 마음에 그렇게나 많은 감정들이 저장되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언니들에 대한 열등감, 결혼 후 수도 없이 지속되는 외도문제에 대한 분노, 가정불화, 그러면서도 남편이 나와 아들을 떠날 거란 불안함에 더 남편의 약점만을 잡으려 집착하고 더 의존해 매달려 있는 내 찌질한 모습….   ‘내가 한 남자로 인해 이렇게 못난 나로 살 수 밖에 없나’라는 후회와 어리석음에 한참을 울었습니다. 남편에 대한 분노감이 일어날 때마다 4단계 기도문을 외우고, 아이가 걱정되고 보고 싶을 때마다 평온함을 청하는 기도문을 외우고, 내 마음이 요동칠 때마다 3단계 기도문을 외웠습니다. 에니어그램을 통해 내가 왜 이런 성격으로밖에 살지 못했는지, 예전의 ‘나’를 버리고 진정한 ‘나’를 찾아 자유로움과 행복감을 느낄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하려 노력했습니다.   하루하루가 지나 어느덧 제가 입원한지 6개월이 지났습니다. 제가 병원의 9주 과정 프로그램 수료를 마치고 재활을 선택한 이유는 아직 술에 대한 저항능력이 부족한 것을 알기에, 재활의 훈련과정을, A.A.모임을 중심으로 나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이곳에서 매일 두 군데 이상의 A.A.모임에 참석하며 단주의지를 굳히고, 퇴원을 해서 바깥세상 몸이 된 이후에도 감정적 숙취로 인한 음주충동이 일어날 때 자동적으로 모임에 갈 수 있는 습관을 익히는 훈련을 하기 위해 재활치료(훈련)을 선택하였습니다. 또한 알코올 중독자인 내가 평생 술을 마시지 않고 살기 위해 12단계 프로그램 실천 안에서 생활해야 하는 것…. 앞서 가신 선배님들은 말씀하십니다. 방법은 두 가지 뿐이라고.   저는 모임에 오면서부터 나는 불치병 환자라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믿는, 내가 이해하게 된 대로의 신을 믿으며 기꺼이 열린 마음으로 A.A.모임과 12단계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 12단계 프로그램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프로그램을 하면서 나의 성격적 결점들을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관리, 개방과정과 달리 재활반이 된 지 두 달째 되는 요즘 앞으로의 저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는 깨달음에 큰 감사함을 느끼며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재활을 선택하지 않고 9주 수료를 하고 퇴원하였다면 신의 영역인 A.A.모임 안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고 12단계 프로그램의 신의 은총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두 번의 재발 끝에 이곳 다사랑중앙병원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번이 삼세번, 신이 나에게 주신 마지막 기회란 걸 알았습니다. 받아들임이 늦은 만큼 남들보다 10배, 20배 더 노력을 해야 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두 번의 재발, 가족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저는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남을 의식하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었습니다. A.A.모임 안에 서는 그런 내가 부끄럽지 않습니다. 모임 안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알코올 중독자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모두 성격적 결함을 가진 사람들로 자신의 회복을 위해 모인 사람들로 가장 가까운 친구, 가족에게도 말할 수 없는 문제점들을 털어놓고 나를 고백함으로써 해방감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모임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임을 나 또한 A.A.멤버로서 소속감을 갖게 해주었고, 한 번, 두 번 경험담을 할수록 나의 자존감도 올라간다는 것을 실험해 볼 수 있는, 저처럼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에겐 꼭 필요한 모임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저에겐 좋은 습관이 생겼습니다. 하루일과를 시작함과 끝마치기 전 하느님께 오늘 하루 술 마시지 않은 맑은 정신을 주심에 감사함의 기도를 드리고, 오늘 하루 내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자기 점검표를 작성하는 일입니다. 매일 짜증과 투정만을 일삼던 저의 생활을 긍정적인 면(감사, 사랑, 관용, 자기 성찰), 부정 적인 면(교만, 분노, 게으름, 원한, 이기주의), 감사목록 등을 작성하여 하루를 올바르게 정직, 겸손하게 살았나, 또 나를 반성하고 칭찬하며 잠자리에 드는 습관을 키웠습니다.   만족함이 없었던 저에게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습관이 감사함으로 다가오기까지 돌고 돌아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때때로 빨리 잠자리에 들고 싶은 게으름도 올라오지만 이곳에서 교육받은 대로 게으름도 심리적 재발이라 느끼며, 내가 지금 나를 돌아보는 시간조차 귀찮게 여긴다면 예전에 술 마시던 알코올 중독자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에, 그런 일은 죽기보다 싫기에 하루도 빠짐없이 자기검토를 합니다.   저에게 이러한 생각과 변화는 기적과도 같습니다.단주생활을 하기 위해 병원 안에서의 규칙적인 생활과 모임활동, 12단계프로그램 실천, 자기 점검…. 직장생활을 할 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열심히 살아보려 했던 제가 아니었습니다. 제 마음이 평온해지니 이런 일들을 긍정적으로 잘 받아들일 수 있음이 가장 감사한 일입니다.   저는 요즘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저에겐 A.A.모임과 후원자 선생님, 항상 절 믿고 응원해주시는 상담 선생님이란 든든한 ‘빽’이 있기 때문입니다.   6개월 동안 제 모든 것이 바뀌진 않았습니다. 아직도 많이 배우고 앞으로 제가 해결해야 할 문제점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동안 감정의 힘이 없어 미뤄왔던 남편과의 관계정리, 아들에게 많은 고통의 시간을 준만큼 진정으로 보상하고 평온함을 되찾는 일…. 그동안 의존성이 누구보다 강했던 저는 홀로서기 연습이 필요합니다.   최소 1년 동안 A.A.모임에 나가 매일매일 술에 대해 항복하며 후원자와 12단계를 마친 후 일도 서서히 시작해 내 힘으로 돈을 모아 살 집을 구하고 신앙생활을 하며 무엇보다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갈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초심자 딱지가 떼어질 때쯤 예전에 일했던 사회복지사 경험을 살려 한 집안의 알코올 중독자로부터 받았던 상처를 숨겨야만 했던 청소년,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담사가 되고 싶습니다.   저의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고통을 주었던 내 아들을 매일 만날 순 없지만 이 또한 보상이라 생각하고 알코올 중독자 가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선물해주는 산타클로스 중독자가 되고 싶습니다.   저는 있는 그대로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며 회복되어 가는 알코올 중독자로 살고 싶습니다. 35살에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내 인생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저는 37살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내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이런 상황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를 사랑할 줄 알며 아끼고 내 자신을 알아차릴 수 있게 해주신 위대한 힘에게 매일 기도하며 간청합니다.   하느님   제가 과거에 행한 일을 반성할 수 있게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내가 누구인지를 내면의 나를 드러내 주심을 감사합니다.평온함을 찾아 온전한 생활로 이끄심에 감사합니다.언제, 어디서라도 당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 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회복으로의 첫 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주님, 당신의 길을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다사랑 2021-02-09

[2016 다사랑 재활수기 공모전] 우리에게는 다사랑과 A.A.라는 울타리가 있다

[2016 다사랑 재활수기공모전 5등 충만함상]   우리에게는 다사랑과 A.A.라는 울타리가 있다김OO   2009년 11월 중순, 음주운전 단속에 걸린 나는 단속경찰관을 폭행하고 잠수를 타며 지내다 가족들과 상의 끝에 일산 모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됐다. 여러 가지 검사 결과 중증 알코올 의존증과 조울증, 지방간이라는 진단을 받고서 격리병동에서 병원생활을 시작했다.‘내가 알코올 의존증 환자라면 내 주변에 나보다 더 많은 음주를 하는 많은 사람, 또 친구들은 뭐야?’ 라는 의구심과 신빙이 가지 않는 의료진, 연락도 할 수 없는 생활. 꼭 교도소와 같은 환경이다. 교도관(보호사)와 죄수(환자) 같은 기분이 든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식구들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밀려왔지만 ‘일단은 참자, 우선 이곳을 나가야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끝장을 볼 수 있다’는 생각뿐이다.   시간은 흘러 자유가 있는 병동으로 옮겨져 정해진 규칙대로 여러 교육을 받고 A.A.모임에도 참석했지만 아무 흥미가 없다. 김포나 마포, 영등포 등 원외로 구경하러 다니는 기분으로 다닐 뿐이다. 특히 A.A.모임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사이비 종교집단도 아니고 자랑거리라도 되는 양 자신의 치부를 들어내고 떠드는지, 또 웬 여자들도 그리 많은지 전부 정신이상자 같기만 했다.   결국 추운 겨울을 따뜻한 곳에서 보내고 봄꽃이 만개한 4월 말경 퇴원을 하게 되었다. 변하지 않은 나의 음주습관과 툭하면 이어지는 사고(폭행)로 인해 또 다시 강서 모 병원과 강화 모 병원 등을 거치며 성격은 더욱 난폭해지고 음주는 늘어만 갔다. 이러는 사이 점점 더 식구들과의 관계는 멀어져만 갔고, 술에 취하면 주사가 시작되어 “너희들 때문에 내 신세가 이렇게 되었다”며 “이 꼴이 원하는 길이면 얼마든지 더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협박성 발언과 생트집을 잡고 늘어지기 일쑤였다.   자업자득인지 2013년 4월 말경 처의 투병 생활이, 그것도 암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독한 항암제 때문인지 표적치료제 때문인지 구토가 심하여 수액주사로 연명을 하니 아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뭉턱뭉턱 빠져 버리는 머리, 뼈와 피부 껍데기만 남은 미라 같았다. 그런 처를 보면서도 무기력하고 어찌할 도리가 없는 나는 틈만 나면 술에 의존하며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었다. 오전 주치의 회진시간에만 맑은 정신이었을 뿐 그 시간 이후로는 멍한 정신으로 시간을 보냈다. 식음을 전폐하다보니 나 역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점점 통증을 호소하는 아내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 진통제 주사로 겨우 잠든 모습을 쳐다보니 그제야 미안했구나, 너무 잘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 30여년을 같이 살았고 두 딸을 성장시켜 사회의 일꾼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나의 부모님을 모셔주었고 두 분의 임종까지도 지켜준 사람인데…. 나 하나 때문에 경찰서로 피해자 집으로, 술집으로, 너무 죄를 많이 지었다는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결국 처는 2014년 8월 임종실에서 두 딸과 이별을 고하는 말을 하고 나에게는 “이제는 나이도 생각하고 두 딸을 위해서라도 술 좀 그만 먹고 성질대로 싸우지 말고 좀 너그러운 사람으로 두 딸을 부탁한다”며 미안하다고 하더니 조용히 주님의 품으로 영원히 영면에 들어갔다. 처의 사후 무력감에 고삐가 풀린 나는 지금까지의 생활을 반성은커녕 처와의 마지막 유언도 잊은 채 두 딸이 출근하면 굶주린 개처럼 술판을 기웃거리고 늘 검은 봉투에 일용할 양식(소주)를 들고 다니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하루는 작은딸이 나와 말다툼 끝에 친구네 집으로 가고, 나는 편의점에서 사온 소주와 처가 먹던 수면제를 함께 먹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늦게 퇴근한 큰 딸 덕에 병원 응급실에서 위세척 등 고생만 잔뜩 하고 퇴원을 하게 됐다. (요즘 수면제는 많이 먹어도 죽지 않는 모양이다. 고생만 한다. 멍청한 일이다.)   한동안은 죽이고 술이고 먹기만 하면 속에서 거부 반응이 일어났고, 어느 때는 생수조차 구토로 이어졌다. 하지만 회복 이후에도 음주는 계속됐다. 연일 계속되는 술로 인해 공원에서 쓰러져 머리를 12바늘을 봉합하고 퇴원하기도 했고, 집에서 쓰러져 눈썹 부위를 6바늘 꿰매기도 했다.   12월 21일 만취 상태에서 깨어보니 또 다시 병원이었다. 그렇게 다사랑중앙병원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3병동, 전부 늙은이만 득실거렸다. 무슨 요양원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틀 지내보니 별반 나이 차가 나진 않은 듯했다. 동년배로 있고 한데 행동거지는 시세말로 완전히 꼰대들 같았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술 때문에 금단증상과 알코올성 치매가 있는 환자가 많다고 한다. 그 말에 참 한심하다고 여기는데 문든 ‘그럼 나는 무엇인가, 나 역시 저런 모습으로 안 된다는 보장이 없다. 정말 이제는 단주해야 내가 남은 생이라도 반듯하게 살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계속되는 교육과정과 수시로 상담사와 상담, 폐쇄병동에서 개방병동으로 전동하여 9주 과정을 마쳤다. 원장님과 상담사님은 퇴원하지 말고 재활병동에서 더 생활을 하라고 계속 권유했지만 자만심에 빠져있던 나는 모든 과정을 마치고 5월 24일 퇴원해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귀가 후 3일째부터 음주를 시작했고 ‘개 버릇 남 주나’ 하는 말처럼 또 다시 장취에 빠져버렸다. 실망한 두 딸의 어두워진 모습, 두려워하는 표정, 큰딸의 눈물어린 호소가 이어졌다. 너무나 불안하단다. 출근을 해도 아빠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아니면 또 어디서 쓰러졌다고 연락이 올까봐 손에 일도 잡히지도 않다며 아빠도 힘들겠지만 다시 입원하여 병을 고치면 어떻겠냐고 내게 물어본다. 우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고 생각에 빠졌다. 한 잔 술에 재입원, 또 한 잔 술에 아니라고 부정하기를 반복했다. 일주일 만에 재입원을 한다는 것이 너무나 창피하다는 생각과 내가 정말 결단력이 없나 하는 생각으로 밤새 뒤척이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그래, 12단계에 나오는 밑바닥치기부터 시작하자. 내 얄팍한 자존심부터 버리자’를 각오로 새기고 관리병동, 개방병동 과정을 마치고 8월 31일부터 재활병동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9단계 발표 때 원장님이 주신 매일의 명상을 꺼내 하루에 한 페이지씩 써 내려가자는 생각에 9월 1일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오고 있다. 노트 여백에 간단한 메모를 곁들이니 생활에 도움도 많이 됐다. 여러 책에 있는 것을 요약해 놓아서 외우기도 쉬웠다.   내 경우는 일종의 부적처럼 A.A.수첩을 외출이나 외박 시에 지참하고 다닌다. 술자리 같은 곳에서 갈등이 일어날 때는 수첩을 꺼내 서문부터 읽어보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덕분에 이제는 술자리이건 모임이건 피하지 않는다. 살아가려면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술자리가 있겠는가. 정면으로 부딪쳐야 한다. 연민이나 과거에 흔들리지 말고, 술 대신 음료수나 생수 등 대체할 방법은 있다. 흡연자가 있고 비흡연자가 있듯이, 술 역시 마실 사람도 있고 못 마시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원내 재활로 벌어드린 수익금으로는 잊고 있던 나의 취미를 찾아 미흡한 부분에 투자를 해서 나의 것, 나의 즐길거리를 만들고 있다. 또 요양 보호사에 등록하여 자격증 취득을 목표로 공부를 할 예정이다.   다시 시작이다. 제2의 노년의 인생을 위해   환우 여러분!좌절과 시련이 와도 포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붙잡을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입?퇴원을 반복하는 환우들을 보면 가슴이 안타깝고 나는, 내 자신은 어떤가하는 생각에 두려움도 느낍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A.A.라는 울타리가 있습니다. 타인에게 친인척에게 창피하고 마음이 아파서 꺼내놓지 못하고 감추어 놓은 상처 받은 이야기를 나누고 듣다보면 어느새 서로가 보듬고 이해하며 마음의 상처를 어르고 달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이라는 전문 의료기관과 A.A.모임이라는 공동체가 아니면 어디 어느 곳에서 이와 같은 심정을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서로 삶의 이야기를, 넋두리를 들어주며 또한 자신의 이야기도 하며 서로의 고통을 나누면서 단주라는 목표를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더욱 성장해 나아가야 합니다.   저 역시 근간에 알았고 그렇게 지내고 있지만 술 없이도 얼마든지 여흥도 즐길 수 있고 보람되게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게 단주라는 목표를 가지고 회복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빌어드립니다. 

다사랑 2021-02-09

[2016 다사랑 재활수기 공모전]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2016 다사랑 재활수기공모전 참가상]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강OO   “대체 날 왜 알코올중독자로 낳은 거야!! 왜 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거야!!"   차라리 나란 놈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숨을 쉬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도 싫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빛을 바라보는 것 또한 너무나도 싫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평범하게, 그저 평범하게 지내고 싶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외쳐대던 '제발 이런 나를 살려 달라'는 외침에도, 나의 손끝은 술을 갈구함에 내 자신을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 기나긴 장취 끝에 술에 젖어 마지막으로 울부짖어 외친 이 한마디는 어머니의 심장에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찢겼으리라.   한 생명이 나로 인해 세상의 빛을 마주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다는 깊은 죄책감. 이에 대한 믿음과 고통의 집착으로 시작된 알코올 중독이라는 10대부터의 기나긴 광야의 삶은 수많은 자살시도와 가출, 폭행, 자기 학대, 사랑이라는 탈을 쓴 집착적인 애착, 2000여만 원의 사채 빚 등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표면적으로 드러난 살고자 발버둥치는 모순적인 행위일 뿐이었다. 그 뒤에 감추어진 외로움, 깊은 죄책감으로 인한 자기 존재의 부정, 억압된 분노와 수치심, 극심한 우울과 무기력들은 내 영혼의 심장을 날카로이 도려내어 그 자리에 암흑 같은 공허함을 새기고 무의식 속에 깊이 자리 잡아 제발 날 죽여 달라고 끊임없이 소리치며 살려 달라고 피눈물을 흘렸다. 중독은 이렇게도 모순적이고 이기적이다.   26살이 되던 2009년 2월, 이곳 다사랑중앙병원에 처음 입원한 후 2016년이 된 지금 이 순간까지 만 7년이 지났다. 여섯 번을 넘어지고 일어서는 과정 속에서 반복된 고통과 환희는 나라는 자아의 겉을 둘러싼 겹겹의 두꺼운 포장지를 뜯어내는 세월이었다. 상담사 선생님과의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통한 억압된 원한과 분노와의 마주침은 어린 시절 해결되지 않은 주관적 상처가 나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왔는지를 직면시켜 주었다. A.A.에서의 100일 작전과 12단계 프로그램의 직접적인 실천은 나의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바라보게 해주고, 미래에 닿은 나의 시선을 지금 이 순간으로 이끌어주었으며, 마음 챙김 명상은 생각과 감정과 무의식에 무기력한 나를 바로보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지난 세월동안 여섯 번을 넘어졌다.   그래서일까. 마지막으로 입원했던 지난 2014년 9월 29일, 2인실인 606호에서 하신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에, 살고자 하던 의지와 용기에 허탈한 서늘함이 스며들어 칼에 베이는 아픔과 함께 고개를 숙인 채 눈물만 흘렸다.   “널 왜 알코올 중독자로 낳았냐고? 네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냐고? 그 답을 찾아서 네 스스로 굳건히 일어설 때까지 너에겐 가족조차 없다고 마음속에 새기고 살거라. 더 이상 네겐 가족은 없다.”   어머니가 떠난 후, 나는 텅 빈 2인실 안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울부짖고 눈물만 흘렸다. “하느님, 대체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요…"   이후 1년 반이 지났다. 지금 나는 모 사이버대학교에서 상담심리학을 전공으로 4.3이라는 학점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올해 한 상담심리센터 인턴으로 최종 합격했으며 부모님과 남동생과도 너무나 따뜻하게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며 살아가고 있다.   고통은 언제나 나의 곁에 있었다. 아니, 내가 고통이라 여기는 것들은 항시 나와 함께 있었다. 삶의 물결에 자연스레 부딪히는 바윗돌의 출렁임에도 나는 쉽게 쓰러지고 쉽게 무너져왔었다.   이번 재활기간동안 수없이 내 자신에게 물었다.“너, 진짜 알코올 중독자 맞니?”“너는 왜 살고 싶은 거니?”   지난 1여년이 넘는 재활기간 동안 수없는 물음표들에 대한 느낌표를 얻으려 자연스레 향하게 된 의지의 방향은 명상으로 향했고, 철학과 인문학에 대한 탐독으로 향했으며, 심리학의 여러 분야를 공부하며 나의 내면과 나의 행동을 교과서삼아 매 순간을 지켜보고 숙고하게 됐다.   나라는 인간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다. 내가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나의 가치관과 세계관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고 무의식적인 판단과 비교 속에 그 사람들을 세워놓았다. 내 눈으로 들어오는 상대방의 모습에는 나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게 덧씌운 여러 겹의 색안경에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했으며, 이것은 물건이나 음식과 같은 사물이나 형태가 없는 대상 등 나의 외부에 있는 모든 것에 동일하게 작용했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색안경을 낀 내 시선의 대가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감정에 묶여 죄 없는 감정이란 아이에게 합리화시키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 나의 가치에 합리화시키고, 합리화시킨 가치에 포장된 대상에 투사하며 이런 것들이 다 옳다고 고집을 피우며 술을 마셨다.   많은 이들은 이야기 했다. 감정 때문에 마셨다고, 또는 나도 모르게 마셨다고.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과거 어느 시점에 벌어진 사건에 나의 생각과 감정이 반응하고 이끌려 나도 모르게 술잔을 잡았다고 이야기해왔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니, 적어도 나만큼은 아니었다. 언제나 내가 먹고 싶어서 마셨다. 나도 모르게 술잔을 잡아 마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치 나는 학습심리학에 나오는 '파블로프의 개'와도 같았다. 나중에는 종소리만 들려주어도 침을 질질 흘리며 식욕에 대한 생리적 반응을 보이던 그 개와 같았다. 나는 화가 나거나, 누군가와 헤어져 마음이 슬프고 우울하거나, 외롭거나, 사회에 대한 불만 또는 현재 내가 속한 조직 안에서의 갈등 등이 내게 여러 가지 감정들을 일으키면 머릿속에 ‘오늘 하루는 술로 풀어야겠다’는 무의식적인 반응으로 매일 밤을 맞이했고, 나중에는 24시간 내내 그러했다.   너무 허무했다. 내가 개와 같다니, 정말이지 다를 것이 하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다고, 더 이상 힘들고 싶지 않다고 외치는 추동의 힘이 흘렀다.   병원에 입원한 많은 이들이 병원에서 나가고 싶어한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이 힘든 상황이라 여긴다. 나 또한 그러했다. 또한 수없이 알코올에 무력했다고 1단계를 외쳐도, 알코올 중독자인 자기 자신의 모습을 실은 무의식의 깊은 수준에서는 부정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나의 질병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면 현재의 알코올 중독자로서의 삶이 고통스러울 이유가 없었다. 내가 고통스러웠던 이유는 알코올 중독자라는 사실에 나는 더 이상 술을 마실 수 없다는 것과, 이로 인해 내게 덧씌워진 것으로 여기는 낙인에 대한 앞으로의 삶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은, 나는 술을 한 잔이라도 목으로 넘기기 시작하면 그게 언제가 되었든지 결말은 죽음으로 향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말은 나는 분명히 알코올에 무력한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것이었으며, 이 사실은 앞으로 내가 인간답게 살아가고 싶다면 더 이상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내 자신에게 다시 물었다. ‘너, 정말 인간답게 살고 싶은거니?’   나는 술을 마시던 지난 시절동안에도, 가슴 시리도록 부모님의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고, 내 동생이 나를 든든한 형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싶었으며, 가족이란 굴레 안에 나 또한 일원이 되고 싶었고, 미소를 지으며 매일 아침 햇살을 마주하고 싶었고, 미래에 결혼을 할 수 있다면 따스함으로 나의 자녀를 감싸고 나의 아내에게 책임을 다하는 그런 삶을 나도 살아보고 싶었다. 이젠 진심으로 인간답게 살고 싶은 소망이 간절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나를 술로 이끄는 원인과 근본을 정확히 보아야 했다. 나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만히 바라보며 그것이 정말로 맞는지 스스로 물어보고 내 안의 인지적인 오류들을 끊임없이 바라보았다.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감정이란 물결의 허상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원내와 원외 재활을 하며 수없이 마주한 갈등들 속에서, 그리고 병원 밖에 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들 속에서 일어나는 나의 생각과 감정들을 자각하고 바라보았다. 어떤 때는 그 생각과 감정에 이끌려 화를 내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요구하기도 하고, 고집을 피울 때도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았다. 붓다가 이야기하던 삶은 고해라는 진리를, 삶은 고통이라고 이야기하던 그 진리를 깊이 깨닫고 싶었다.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자각하며 살며 나의 생각과 감정에 이끌리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다면, 술로 이끄는 내면의 추동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난 심리학을 선택했고, 많은 철학적 질문의 책들과 인문학적인 탐구를 위한 책들을 읽어왔고, 매 순간 자각하는 명상의 훈련들을 해왔으며, 무엇보다 운동을 꾸준히 하려 했다.   A.A.에서는 이야기 했다. 판단하지 말라. 비교하지 말라. 하루하루에 살라. 나의 세계관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판단하고 비교하며 다가오는 생각과 감정에 붙들려 살다보면 어느 순간 나는 다시 술잔을 잡고 있을 것이고, 하루에 살지 못하고 과거에 붙들려 살거나 미래에 붙들려 산다면, 또다시 그에 따라 다가오는 생각과 감정에 어느 순간 나는 술잔을 잡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불완전한 인간인 나는 고통이란 영양분으로 신이 내리는 햇볕 아래 세상이라는 수분을 흡수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제 내겐 고통이란 단어는 인간이 만들어낸 의미에 따른 표상일 뿐이며, 알코올 의존증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는 나는 지금 이 순간에 온전하고 평온히 살아가지 못한다면 죽음으로 간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기도한다.   하느님,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시고, 어쩔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주시고, 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자각하며 겸손히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다사랑 2021-02-09

[2016 다사랑 재활수기 공모전] 평온함을 찾아가는 여정

[2016 다사랑 재활수기공모전 참가상]   평온함을 찾아가는 여정권OO   알코올 중독 회복을 위한 재활과정을 하는 도중 작년 5월경부터 최근까지 상대방으로부터 비롯된 공격적인 발언이나 문서를 접하면서 심한 모멸감, 불쾌감, 그리고 분노를 느꼈던 일이 크게 세 번 정도 있었다. 이로 인한 감정적 후유증상이 회복 과정에 적지 않은 부작용으로 나타났던 것 같아 이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려고 한다.   이후 그 일들이 떠오를 때마다 느껴지는 감정들은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작동하기도 전에 서로 뒤범벅되어 나를 압박하고 위축시켜 나약하고 게으르게 만들어 일상의 많은 것들, 특히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하고 미루어 왔던 과제들(체납 세금 및 공과금, 은행대출 자금에 대한 원리금 상환, 외주비 지출, 병원비 납부, 생활비 지출, 신규 수주, 기성 청구 및 과업 수행 등 생활 전반에 관한 계획 및 실행)을 점진적으로 기피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 취한 정신이었다면 시간이 지난 후 나약함을 느끼는 단계까지 가기도 전에 모멸감과 불쾌감을 느끼게 한 상대방을 향해 거센 역공격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는 주장하는 바의 옳고 그름 따위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고 오로지 솟구치는 감정을 마치 배설하듯 쏟아내고는 시원함을 느끼는 것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세 번의 상황에서는 방법을 달리 하여 상대방이 감정 섞인 폭언을 빗발치듯 퍼붓더라도 끓어오르는 나의 감정을 누르며 참아보았다. 그렇게 퍼부어 대는 상대에게 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상대는 일방적으로 폭언을 하며 언성을 높여갔고 급기야는 자기 분에 못 이겨 숨을 몰아쉬며 인격모독에 해당되는 말까지도 거침없이 뱉어냈었다.   그래도 나는 마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해 대는 것을 구경하는 것처럼 지켜보고 있었지만 간간이 울컥하는 감정이 솟구쳤다.   ‘계속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걸까?’‘지금이라도 맞대응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반딧불처럼 희미하게 뇌리를 스치기도 했다. 하지만 끝까지 상대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은 채 그 상황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애써 무감각한 척 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된 후 시간이 흐를수록 당시 상황이 떠오를 때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당한 것처럼 되어버린 자신이 바보스럽다는 생각이 들면서 후회감, 억울함, 분노 같은 것이 뒤범벅이 되어 불쾌감을 유발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그렇게 생겨난 불쾌감은 해소되지 않은 채 잠복되어 있다가 해결해야 할 일상의 과제들을 만나면 교묘하게 용트림을 하며 나를 나약하고 게으르게 만들어 과제들을 미루게 한다고 생각되는 것이었다.   또한 재활 초기 한동안 운동을 통해 감정적 숙취로부터 벗어나는 느낌을 받으며 나름 재활훈련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이런 일들이 거듭되자 생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난 것처럼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원치 않는 상황이 반복될수록 중압감이 가중되어 사그라져가는 자신을 추스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까지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시간들은 무려 8개월 이상 지속되었고 불과 몇 시간 전까지 계속되었다. 때로는 억지로 운동이나 외부 활동을 통하여 극복해 보려고 했지만 그 효과는 지속되지 않았고 그런 노력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정리되지 않은 채 숨어있던 감정들은 어떤 과제들을 만나면 어김없이 정체를 드러내며 나를 허물어뜨렸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지금 쓰고 있는 재활수기의 작성에 관하여 담당 상담사 선생님과 상담을 한 다음에도 여지없이 나타났고 과제를 앞에 둔 나의 감정들은 잘 써보려는 욕심과 뒤엉켜 생각만 복잡하고 정리는 되지 않은 채 시간만 흐르는, 전형적인 최악의 모습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결국 마감 시간이 임박하게 되어서야 외부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나는 열흘 이상 붙잡고 씨름하던 원고를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상담사 선생님께 문자를 보냈다.   “재활수기 작성을 하다 보니 내용정리가 잘 안 돼서 제출을 못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외부 업무가 늦어져서 교육 참석은 늦거나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이따 뵙겠습니다.”   잠시 후 회신이 왔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기 제출을 포기한다고 문자를 주고받은 후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교육이 끝난 후 회진 때 원장님께서 말씀하셨다.   “요즘 선생님께서 닥치고 있는 어려운 일들에 대하여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는 것을 시도한다고 들었습니다.”“그런데 잘 안됩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쉽게 되는 것이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조급한 마음일 수 있습니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회진이 끝나고 나서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리가 맑아지고 오래 묵은 체증이 씻겨 내려간 듯한 느낌으로 테라스에 나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4시 30분, 바닥에는 밤새 내린 눈이 얇게 쌓여 있었고 싸늘한 공기 속에서 아직 깜깜한 하늘에 떠있는 별들을 보며 생각해 보았다.   ‘지금까지 나는 감정을 억제하며 참았던 나의 노력만 생각한 것은 아닐까?’‘나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 할지라도 나의 어떤 것이 상대방을 화나게 하지는 않았을까?’‘그렇다면 지금까지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그 원인을 제공한 나 자신일 수 있겠구나.’   비슷한 감정, 상황으로 힘들어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침착하게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라는 조언을 했지만 정작 숙취에서 벗어나지 못한 감정들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기 쉬운 나는 아직도 잘 하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해 쓰던 것을 정리하지 못하고 힘들어 했고 나에게 험한 말을 했던 상대방 때문에 내가 힘들어졌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직은 잘 되지 않아서 오랫동안 힘들기도 했지만 모든 일에 욕심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한 발 물러서서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마무리 할 수 있게 되어 기쁘고 감사하다.   하느님!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시고, 어쩔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주시고, 그리고 이를 구별하는 지혜도 주소서. 

다사랑 2021-02-09

[2016 다사랑 재활수기 공모전] 9번째 입원,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2016 다사랑 재활수기공모전 참가상]   9번째 입원,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김OO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냥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였으면 되지 않았나싶다. 술을 마시고 살아오면서 사회생활도 잘 했고 사업을 시작하면서도 술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생각이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판단력, 추진력 같은 것들이 낙후되어 가고 있는 것조차 모르게 되었다.   사업이 번창하며 나는 한 지역에 축구교실을 운영하게 되었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던 이루지 못한 꿈을 축구교실을 통해 아이들의 꿈으로 피워볼 생각이었다.   지역사회다보니 술자리 역시 매일 저녁 빠지질 않았다. 또한 사업상 술자리, 각종 모임의 술자리 등 하루 저녁에 두 탕, 세 탕씩 뛰는 건 기본이었다. 그렇게 사업보다는 술이 우선시 되어버린 나의 생활은 부도와 알코올 중독이라는 것을 얻게 되었다.   나는 끝까지 꿈을 이뤄보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과 상처가 항상 마음 속 어느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지 않았나 싶다. 꿈에 대한 얘기에 민감한 나는 술에 빠져 죽을 듯이 마시고 또 다시 과거 속 미궁으로 들어가 헤어 나오지 못하는 병적인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모임에서 술잔을 받는데 손이 갑자기 떨기 시작하면서 머리가 어지러워 술잔을 놓치고 말았다. 나를 잘 알고 있는 선배는 알코올 중독 같다며 정신과 치료를 요구했다. 하지만 나는 인정하기 싫었다. ‘내가 왜 알코올 중독이야’라고 부정하면서도 술잔을 들면 손이 떨려 모임이 있으면 먼저 술을 먼저 마시고 나가곤 했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다보니 성격 역시 변해가고 내가 아닌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을 무렵 지인 의사로부터 다사랑중앙병원을 소개받아 처음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다. 알코올 전문병원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 같아 너무 답답해 바로 퇴원을 했고 다시 입원하기를 이번이 9번째다.   그동안 입?퇴원을 하면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이기적인 생각과 행동들이 이 사회, 아니 나의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알 것 같았다. 특히 나의 아들, 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이들이 원하는 건 풍부한 재산이 아니라 아버지가 술을 마시지 않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다시 한 번 해보자, 아버지의 옛 모습을 기다리며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하고 있는 아이들이 원하는데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9번째 입원을 선택했고 재활은 2번째로 현재 10개월째 진행 중이다.   이번 재활을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로 힘이 들었다. 당시 상황으로는 해결책이 보이질 않았다. 고민 끝에 단주하며 상담사로 근무하고 계시는 선생님들께 고민을 얘기하고 도움을 요청했고 해결책을 받았다. 의외로 너무 간단했다. “재활하며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또한 “생각했으면 행동하라” “A.A.모임에 가서는 무엇을 가지고 오려 하지 말고 무엇을 주고 올까 하는 생각을 해라” 이런 이야기들을 해주셨다.   일단 선배들의 말을 믿고 무조건 따라보자는 생각으로 내게 해주신 말들을 되새기며 최선을 다했고 정말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국세청 일도, 신용보증기금일도 잘 정리가 되었다. 또한 일을 하다 보니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아갔고 아이들도 좋아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꽉 막혀있던 나의 머릿속이 맑아지고 있다는 것을 매일 아침 일어나면서 느끼게 되었다.   재활교육을 통해 여러 가지 지식과 방법을 알게 되었고 그 방법을 통해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게 되고 행동하게 되었다. 또한 재활하면서 A.A.모임도 위에서 말했듯이 무엇을 주고 올까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모임도 많이 편해졌다.   알코올 중독자들은 갈 곳이 없다. 외롭다. 술 없이 대화할 사람이 없다. 술 없이 친구를 사귈 수 없다. 하지만 평생 혼자 살 수는 없는 일이다. A.A.모임을 통해 술을 마시지 않고도 대화하고 사람을 사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앞으로 남은 재활기간 동안 여러 경험을 통해 퇴원 후 사회일원으로 돌아가 술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는 알코올 중독자, 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며 과거 상처 또한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살아갈 것이다.  

다사랑 2021-02-09

[2016 다사랑 재활수기 공모전] 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영영 단주할 것을 나와 내 가족에게 약속합니다

[2016 다사랑 재활수기공모전 참가상]   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영영 단주할 것을 나와 내 가족에게 약속합니다서OO   2015년 10월 30일, 나는 이곳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했다. 수원으로 시집 간 큰딸이 대구 집에 내려와 내 얼굴을 보더니 “아빠, 수원으로 가자. 내가 잘 아는 사람이 병원에 있으니 진찰 한 번 받아보자”고 해서 함께 올라왔었다.   그런데 대뜸 하는 말이 “아빠는 술을 한 모금이라도 마시면 얼마 못 살고 죽는다는데 계속 몰래 마실 거야? 자식들 생각은 안 하는 거야? 막내는 아빠 없이 못 산다는데, 군대도 제대하고 결혼도 꼭 아빠가 시켜줘야 한다고 눈물짓는 게 애처롭지도 않아?”라며 눈물로 호소하는 모습에 그날로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닐 곳은 복도 뿐, 타고난 성격이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사업도 늘 서울로 다니는 게 일이었던 나와는 맞지 않았다. 자식과 한 약속이라 참고 지내기를 한 달, 상담사 선생님에게 “개방병동으로 보내 달라” “여기 더 있다간 내가 교육도 받기 전에 먼저 죽겠다” “내가 어찌 살아왔는지 조사해봐라”고 하며 설득해 15일간 개방교육을 받고 내려오니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술만 먹지 않으면 바깥출입이 되니 나로서는 ‘술 정도야 안 먹으면 되지, 자식들과 약속했으니 지켜야지’ 하고 마음을 정리하니 편안하고 좋았다. 그런데 그까짓 술을 못 참아 마시고는 다시 3층으로 가는 사람도 있었다.   3층에서는 술 끊는 법을 가르쳤지만 이곳 2층에서는 술을 왜 끊어야 되는가를 가르쳐 주었다. 예사롭게 생각했던 간경화 초중기와 알코올성 당뇨까지 지닌 나는 교육을 받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은 갈 때가 아닌데, 자식들의 애틋한 눈빛과 막내의 소원은 들어주고 가야하야지 싶어서 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영영 단주할 것을 나 자신과 자식들에게 약속하고 꼭 지키리라 결심했다.   왜 내가 이렇게까지 생명조차 유지하기 힘든 상황까지 오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니 죽으려고 작정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술을 마시지는 않았을 터였다. 29살 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나는 값싼 중국제품의 갑작스러운 수입으로 인해 감당 못할 큰 부도를 맞고 내가 이루어왔던 나의 공장, 4층 건물, 집들이 법원의 딱지가 붙어 넘어가는 모습에 너무나 허탈하고 허망감에 죽고만 싶었다.   수많은 기업, 장사꾼들이 견디다 못해 줄줄이 도산하거나 도망가 버리는 상황 속에서 나 역시도 견뎌낼 수가 없었고 정부가 너무 원망스럽기만 했었다. 이웃나라 일본처럼 미리 정부에서 소식을 알려주고 대비할 시간만 주었어도 이토록 처참하게 수많은 기업체, 장사꾼들이 무너지진 않았을 텐데 정부는 기업, 상공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준 게 없었다.   그때부터 앞으로 살아갈 희망이 영영 없어져버렸고 술로 내 자신을 달래고 위로하기를 3년, 술에 빠져서 하루하루를 살다보니 완전히 인간이라 할 수 없는 타락된 인간으로 변해버렸다. 적어도 하루에 소주 3~4병은 마시는 게 보통인 술꾼이 되어버렸다.   딸들이 내 모습에 놀라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담당의사가 정밀검사를 해봐야겠다고 했다. 검사 결과 간경화 초중기에 알코올성 당뇨까지 있다고 당장 입원하라고 해서 6개월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퇴원 후 당장 할게 없다보니 다시 술에 손대기 시작했고,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 내 자신을 탓하고 정부를 원망하며 술에 젖어 살아갈 뿐이었다.   그때 큰딸이 집에 내려와 보니 역시나 술을 끊지 못하고 살고 있는 아빠를 보고는 “역시나 아빠를 못 믿겠어. 자식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 모두가 술 끊기를 간절히 바라는 애절한 눈빛들이 보이지 않나요. 막내의 소원을 들어주기 싫나요. 이대로 저 세상으로 가고 싶나요. 건강하게 사시다 자식들 소원을 들어주고 가실래요. 자식들 보기 부끄러운 줄 알면 저 따라 수원에 가요. 술 끊는 병원이 있어요. 거기로 가요”라고 해서 뭔가에 홀린 듯이 오게 된 곳이 다사랑중앙병원이었다.   나를 담당하신 원장님과 상담사 선생님이 지금까지 잘 보살펴 주셔서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분들의 보살핌으로 개방병동에서 교육을 받고 기한이 끝났지만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좀 더 건강을 살피며 몸이 좋아지면 그때 나가는 게 좋겠다고 의향을 묻길래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여기 재활병동에 왔었다.   재활병동이란 이곳은 몸소 스스로 행동으로 모든 것을 실천하는 곳이라 개방병동에서 배운 이론을 잘 활용하면 현실과 부딪쳐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이 든다. 하루라도 빠르게 재활의 뜻을 깨우쳐 올바른 재활인의 삶을 살아 모두에게 실망시키지 않는 재활병동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 망가진 내 몸을 돌보며 선배님들에게 배우고 가르침을 받을 것이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다니며 몸소 체험하며 평생을 배우는 재활인이 되고 싶다. 

다사랑 2021-02-09

[2016 다사랑 재활수기 공모전] 재발은 깨어짐의 축복입니다

[2016 다사랑 재활수기공모전 참가상]   재발은 깨어짐의 축복입니다송OO   2016년 새해를 시작함과 동시에 한 해를 계획하고,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받아들이며 온전하고 맑은 정신에 재활수기를 쓰고 있는 지금이 현재 저에게 가장 큰 축복이며 큰 열매인 것에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회복의 길을 걷는 많은 환우분들이 각자가 언제 시작하였는지 또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얼마의 기간 동안이었는지는 모두가 다르겠지만, 술 앞에 무력하고 자기 삶을 수습 할 수 없는 상태를 경험한 우리들은 여러모로 많은 것을 잃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로 인해 빚어진 사건들은 너무나도 다양하고 참으로 부끄러운 일들이 많아 저를 아는 분들에게 많은 상처와 아픔을 주었기에 평생을 보상을 해야 함이 저에게 주어진 귀한 숙제임에도 분명합니다.   처음 개방병동 생활을 할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현실에서 얄팍한 지식으로 나 혼자 능히 단주의 길을 갈 수 있다고 스스로 단정 지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생각과 행동들이 치료진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고 스스로 야누스가 되어 고집과 아집 또 교만으로 저를 철두철미하게, 단단하게 포장하였습니다.   일례로 담당 상담사 선생님께는 잘 하는 것 같이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한쪽 귀로 듣고 ‘당신의 경험이나 조언 없이도 나 혼자 할 수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나 가서 하시오’ 라는 마음가짐과 행동을 갖고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회복의 길을 걸어야 할 내게 가장 안 좋은 자만과 교만이 가장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관리병동 생활과 개방병동 생활을 통해 육체적으로 회복되었을 때입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던 2월의 어느 날 다사랑중앙병원에서 A.A.모임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한 아기 엄마가 아이를 품에 안고 기저귀가방과 여러 가지 물품 가방을 양 손에 들고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애처롭기보다는 ‘이 추운 날 애하고 뭔 고생하려고 이 자리에서 저 수선을 피울까! 따뜻한 집에서 신랑 밥 해주고 기다리고 있으면 자기도 편하고 아기도 편할 텐데 참으로 알 수가 없네’ 라며 당시 저는 그 모녀를 동정심이 아닌 한심스러운 눈빛으로 평가 절하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임에서 경험담을 듣는 것보다 헬스장에서 바벨을 한 번 더 드는 것이 육체적으로 더 건강해져 단주의 길을 더 잘 갈 것이라고 제 스스로에게 답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여자분이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추운 날 아기를 안고 이곳에 오는 길은 너무나도 힘이 들었지만 이곳에 와서 다른 선생님들을 보고 또 소중한 경험담을 들어야 내일도 이겨나갈 수 있는 힘과 한 주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고.   당시 저는 그 아기엄마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하고 더러는 코웃음 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재발이 되고 재활수기를 쓰고 있는 지금 이 시간, 당시 여자분이 어떤 마음에서 한 말이었는지, 그 마음이 와 닿으며 그때의 고백이 제 마음 속에 새겨짐을 느낍니다. 나만이 할 수 있지만 나 혼자서는 절대 하지 못한다는 것을요.   돌이켜보면 보여주기 위한 행동, 정직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한 생활방식 등 당시 나의 행동과 생각들은 재발로 가기 위한 정확한 수순이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재발을 받아들이고 정직과 겸손이 회복에 길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아주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재발은 저에게 있어 깨어짐의 축복임을 제 스스로에게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고 많은 사람들의 눈치와 새로운 일을 잘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으로 긴장감 속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겸손과 정직이라는 것이 가장 우선시되어야함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직장생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직원의 손짓으로 인해 약간의 감정이 상한 것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 감정을 쌓아두고 있을 때쯤, 직원의 계속된 손짓에 며칠 참고 있었던 감정들이 드디어 폭발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거친 욕설과 분노, 삿대질을 그 직원에게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순간의 감정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기나긴 인생길에서 어찌 단주를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직원은 저에게 손짓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은 말을 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신 분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분에 대한 배려를 생각하지 못하고, 나의 잘못된 중독적 사고를 가지고 평가했던 것이었습니다.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인 것을 다시 한 번 체험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순간의 기분을 10초만 더 생각했다면, 그러한 일들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치료진들을 신뢰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고집, 자존심을 내려놓을 때만이 회복의 길을 갈 수 있는 첫걸음을 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환우들 앞에서 거창하게 약속했을 뿐, 그것들에 대해 너무 가벼이 여겼던 것이 사실입니다. 재발이 되고, 재활을 하고 있는 이 순간에는 예전과 같이 보여주기 위한 많은 것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상태, 나의 생각을 가장 잘 아시는 치료진 선생님들의 지시사항을 따르는 것이 제가 온전한 회복의 길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끼 식사와 치료진이 처방해주신 약, 최대한 하루일과를 규칙적인 시간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재활을 하는 이 순간에 알코올 중독자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굳은 다짐이라도 수십 년을 살아온 나의 성향이나, 성품이 쉽게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젊은 혈기에 경험했던 군 생활과는 또 다른 다름이라는 걸 재활생활을 하면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며, 살아온 환경, 지식이 다른 환우들과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것에 솔직히 여러모로 불편함을 느끼는 것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들이 알코올 중독자라는 병을 갖은 사람으로서 받아들여야 함을 인정하면서도 순간순간 치밀어 오르는 화도 있지만, 내가 만든 인생의 여정이기에. 그 또한 받아들이려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식으로 아는 것을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삶에 적용하는 단계에 있습니다. 배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무한 반복하여 습득하는 것은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입니다. 이것들이 힘들어 포기한다면 너무나도 아까운 삶을 되돌아가야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어진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해야함을 다시 한 번 상기해봅니다.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전 경험했던 아기 엄마의 고백처럼 A.A.모임의 중요성과 삶 가운데 정직과 겸손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되새기며 조급해하지 않고, 묵묵히 지금의 길을 걷겠습니다. 이루어진 것들이 보이지 않아도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닌 내게 쌓인다는 것을, 재발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빠른 길보다는 익숙한 길을 나 혼자가 아닌, 나와 함께 하는 이들과 같이 가다보면 나의 여백을 아름답게 채워나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해지는 낙조가 일출보다 밝을 순 없지만, 그 아름다움은 절대 뒤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여정이 술로 인해 많은 것을 잃었지만, 이제는 술 없는 삶을 통하여 남아있는 인생을 낙조같이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길은 지금 현재 나를 인정하고, 나에게 주어진 것 에 대해 감사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면 이루어지리라 생각됩니다. 내일 하루도 술 없는 삶을 통하여 조금씩 저를 다듬어 가는 하루를 보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제게 있어 재발은 깨어짐의 축복임을 감사 드립니다.

다사랑 2021-02-09

[2016 다사랑 재활수기 공모전] 터무니없는 약속인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2016 다사랑 재활수기공모전 참가상]   터무니없는 약속인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OO   “중곡동 국립병원 모임가고 있음. 왕십리 행당교회 거쳐 평촌 하루그룹에서 마무리합니다. 평온한 하루 되세요!!”“아빠 오늘도 파이팅!!”   버스를 타면 제일 먼저 딸과 주고받는 카톡이다. 물론 후원자 선생님이나 협심자 선생님과도 비슷한 내용의 카톡을 주고받는다. 딸을 포함해 카톡을 주고받는 멤버는 5명을 넘지 않도록 한다. 어느 멤버 선생님의 제안이다.   그리고 나면 매일 메시지를 정리하여 보내주시는 멤버 선생님의 카톡 글들을 읽어본다. 아침에 본 메일의 명상도 한 번 더 읽어본다. 찬송가를 들으며 다른 사람들의 잡담과 통화소리에 짜증을 내지 않으려 한다.   오늘, 2016년 2월 15일이 내가 100일 작전이라는 용의를 갖고 A.A.모임을 다니기 시작한지 93일째 되는 날이다. 다음 주 2월 22일이면 딱 100일이 되는 날이다.   나는 1961년생으로 올해 우리나이로 56세이다. 2008년 9월 다사랑중앙병원에 처음 입원한 이래로 2015년 9월 8번째 입원을 하였다. 한창 일할 수 있는 세월을 병원에서 보낸 셈이다.   2007년 11월 술 문제로 17년간 다니던 직장(직장생활은 20년 했음)에서 명예퇴직을 한 뒤 계속 문제가 된 유흥비로 인한 부채를 가족과 의논하여 해결할 생각은커녕 명퇴금을 갖고 도피할 궁리를 했었다. 원 없이 돈이나 써보고 죽자는 미친 생각으로 5개월간 가출까지 하였으나 결국은 죽지도 못한 채 돌아온 나는 2008년 6월 이혼으로 딸과 처에게 부채로 인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당장 살아갈 집을 구하는 것과 생활비에 대한 문제는 고스란히 애엄마가 떠맡았고 나는 계속 알코올 중독의 늪에 빠졌다. 급기야 2008년 9월 자살소동으로 처음에는 한 일산 병원의 정신병동에 입원하였으나 형의 정보망을 동원하여 알코올 전문병원을 찾아 이틀 만에 다시 다사랑중앙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처음 입원한 나는 다른 환우들과는 다르게 모든 것이 편했다. 전부터 스스로 알코올 중독자라고 생각했고, 항상 술 취한 상태에서는 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지만 술이 깨면 행동으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1단계는 바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받아드림은 완전한 항복이 아니었다. 그리고 개방병동에서의 나머지 단계들은 재활병동을 가기 위한 과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병원에 있는지를 망각하며 그저 혼자 살기 싫으니까 병원생활을 한 것 같다. 정직과 겸손이 단주를 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세인데 나는 부정직과 교만으로 일관된 병원생활을 하였다. 즉 단주에 대한 절실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병원에 있는 동안에도 갈망감 이 오면 주저 없이 외박 시 몰래 음주를 하였다. 그 후로도 입원하면 회복은 뒷전이고 취업을 위한 재활과정만 2번을 거쳤고 단기 입?퇴원도 몇 번 했다.   7번째 입원 중인 2014년 1월 어느 날 외출 후 갈망감에 아무 죄책감도 없이 음주를 하고 귀원한 후 음주 측정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삑’ 소리가 났고 바로 7층으로 격리되었다, 측정치는 0.01. 이전에 공식적으로 음주 귀원이 한 번 있었고, 외박 시 음주도 했으나 이렇게 걸려본 적은 처음이다, 정직과 겸손이 땅에 떨어졌는데 어떻게 핑계를 댈 수가 없었다. 잠깐 갈등도 하였지만 더 이상 병원에 있을 수가 없었다. 바로 퇴원하고 다시 조절 망상을 하였고 생활비(술값)는 있어야 하기에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취직했다. 격일제 근무를 하면서 조절음주를 하다가 2~3개월 내에 사표를 내고 장취하고는, 집 근처 병원에서 1~2주 입원하여 몸만 회복하고 또 다시 취업하는 일을 반복하였다.   2015년 6월초 결심 끝에 나를 잘 아는 멤버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집에서 A.A.모임과 수원 다사모를 다니면서 단주를 시작하였으나, 두 달도 못 가서 다시 음주를 하고 바로 장취에 들어갔다. 아직 힘이 없는 상태에서 혼자 생활하는 것이 무척 힘들다고 생각했었지만, 원인은 우리의 길을 철저하게 따라가지 않은 것이다. 또한 A.A.의 약속을 절대적으로 믿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된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딸에게 병원에 보내달라고 할 용기도, 또 입원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으로 계속 미봉책으로 일관했다.   2015년 9월 4일, 7월에 재발한 이후 세 번째로 동네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이번에는 당직 간호사가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딸에게 연락하여 밤늦게 나의 상태를 보고 가서는 다음날 엄마와 함께 병원에 왔다. 나의 심한 금단현상을 처음 보는 두 사람은 무척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 사람은 살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는지 결국 다사랑중앙병원에 연락을 했고 9월 7일에 입원을 하였다. 내 수중에 남아있던 45만원을 간식비로 다 넣자, 애엄마는 개방병동까지 입원비는 힘들지만 부담하겠다고 약속하였고 그 다음부터는 알아서 갈 길을 찾으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담뱃값까지는 못 주겠으니 끊으라는 당부도 했다. 나는 약속했다. 그렇게 하겠노라고. 그리고 약속 하나는 지금까지 잘 지키고 있다. 담배가 끊어졌다.   입원 첫 주에 예배에 참석했다. 신앙심 때문에 참석한 것은 아니었는데 찬송가를 부르니 한없이 눈물이 났다. 다음 주에도 참석했는데 계속 눈물이 났다. 돌아온 탕자가 되어 회개하는 기분이었다. 성령이 내게 임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지금은 찬송가를 들으면서 모임에 다닌다. 평온함이 유지된다.   재활병동으로 전동을 하였으나 원내재활을 뒤로 미루고 100일 작전을 계속 했다. 후원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우연한 기회에 한 멤버 선생님의 제안으로 의미를 갖고 모임에 다니기 시작했다. 어느 선생님은 병원 약을 빼먹지 말라고, 효과는 분명히 있다는 경험을 알려줘 이번에는 정말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약을 먹고 있다. 아직까지 심한 갈망감은 오지 않았다.   후원자 선생님도 내 제안을 받아주었다. 딸도 모임에 관심을 갖고 나에 대한 믿음을 조금씩 보이게 되었다. 나는 이제 든든한 후원자도 있고 매일 A.A.모임을 독려하는 딸도 있다. 그리고 그 딸에게 한 약속을 지키려는 용의를 갖고 노력하고 있다.   입원 초기에 상담사 선생님에게 부탁한 것이 우리가 매번 모임에서 읽는 A.A.약속이 <빅북> 몇 페이지에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냥 처음부터 읽어보면 될 것을 아직 술이 깨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빅북> 83~84쪽에 있었다. 읽고 또 읽었다. 12가지 A.A.약속을 믿기로 했다. 아니 믿어졌다.   딸을 생각하면 쓸모없다는 느낌이 사라지고, 경제적 두려움이 먼저 없어진다. 새로운 자유와 행복이 펼쳐진다. 약속이 하나하나 천천히 내게 다가오고 있다. 이것은 결코 터무니없는 약속이 아니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자기 성장의 과정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반도 끝나기 전에 놀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자유와 새로운 행복을 알게 될 것이다. 과거를 후회하지도 않고, 과거를 감추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평온함을 이해하고 평화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타락이 아무리 심한 것이었다 해도, 우리의 경험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쓸모없다는 느낌이나 자기 연민은 사라질 것이다. 이기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동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자기중심주의는 사라질 것이다. 삶에 대한 우리의 전반적인 태도와 관점이 바뀔 것이다. 사람들과 경제적인 불안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떠날 것이다. 우리를 괴롭혔던 상태들을 즉각적으로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들 스스로를 위해 하지 못했던 것을 신이 해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터무니없는 약속인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때로는 급속히, 때로는 천천히, 그것들을 위해 노력하면 항상 이루어질 것이다.   다음 화요일에는 홈 그룹에서 떳떳하게 백일칩을 받을 것이다. 단주 백일이 아니지만 그 백일의 의미가 듬뿍 담겨 있는 그 칩을. 나의 홈 그룹은 멤버가 많지 않다. 큰 부담이 없어 백일떡도 돌릴 계획이다. 딸과 대화 중에 모임에서 단주 기념일에 떡을 돌린다는 얘기를 하니까 서슴없이 “아빠도 떡 주문해”라고 한다. 백일에 떡을 했다는 얘기는 못 들었지만 백일이니까 괜찮다싶다. 매달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얼마 되지 않는다. 내가 돈을 갖고 있는 것을 딸이 불안해하기 때문에 내 체크카드를 딸에게 주었고 매주 교통비 정도만 입금해 준다. 떡값이 사만원인데 아빠 단주에 도움이 되는 돈은 하나도 안 아깝단다. 어떤 협심자는 떡은 1년칩 받을 때 많이 한다고 제안해 주시는데, 후원자 선생님은 본인이 하고 싶을 때 하란다.   3월 5일이면 A.A.에서 우리가 흔히 표현하는 막잔 놓은 지 6개월 되는 날이다. 술을 마시기 시작한 후 처음 지나온 시간이다. 앞으로 내가 마지막으로 술을 마셨던 그 날 2015년 9월 4일을 기억하려고 한다. 전에는 항상 그 기억을 의도적으로 지우려고 했기 때문에 쉽게 첫잔을 다시 잡았던 것 같다. 병원에서의 단주기간은 의미가 없다고 하시는 선생님들도 계시지만, 내 짧은 생각으로는 폐쇄병동에 있었던 생각만 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단주 기념일은 본인이 정하고 본인이 그 기간에 대한 책임을 가지면 된다고 하시는 멤버 분들도 많다.   2월 23일 화요일부터 원내재활을 하게 된다. 처음은 3개월 일정이지만 딸에게 아빠도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줄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하고자 한다. 일하는 동안에는 저녁모임만 가지만, 쉬는 날이나 원내 일을 대기하는 동안에는 낮모임을 계속 다닐 수 있다. 시간이 나면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만들어서 가야한다는 것을 멤버 선생님들의 경험담을 통해 깨닫고 있다. 병원에서 모임 다닌다는 열등감은 안 가지려 한다. 내가 언젠가 혼자서 생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면서 퇴원 후에도 지속적으로 모임과 직장을 다닐 수 있는 힘을 길러야하기 때문이다.   A,A.모임, 가족, 직장은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물론 모든 것이 잘되는 것은 아니다. 후원자 선생남의 제안은 마치 방학숙제를 계속 미루면서 놀고 있는 초등학생으로 만든다. 오래된 생활습관의 변화와 오늘 할일을 미루지 않는다는 것을 무척이나 강조하시는데, 나는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 내 안의 게으름이 항상 보인다. <빅북>을 읽으면서 A.A. 슬로건을 보면서 이대로 꼭 실천하겠다고 반복해서 다짐하기보단 “우리가 성장의 과정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나의 행동이 나의 생각이 <빅북>에 그대로 써져있어, 내가 잘못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어느 멤버 선생님의 말씀처럼 그렇게 닮아가고 싶다.   오늘은 월요일, 밤 9시에 재활병동 원장님의 회진이 있었다. 나에게는 백일작전을 잘 진행한 것에 대한 격려와 함께 내가 알 듯, 모를 듯한 말씀을 하셨다. 백일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시고 그전에 반복했던 병원생활과 지금의 병원생활을 잘 비교해 보라는 것이다. 과연 무엇의 달라진 것인가? 어떻게 더 달라져야 하는가?   모든 것에 감사한다. 내가 다시 회복하겠다고 용의를 갖게 해준 다사랑중앙병원 식구들과 후원자 선생님, 협심자 선생님, 그리고 다시 기회를 준 우리 딸과 그 엄마에게.   2016년 2월 15일

다사랑 2021-02-09

[2016 다사랑 재활수기 공모전] 다사랑중앙병원을 만나고 기적이 일어났다

[2016 다사랑 재활수기공모전 참가상]   다사랑중앙병원을 만나고 기적이 일어났다황OO   저는 경상도 OO시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나이는 43세, 직업은 미용사, 이혼하고 아이는 하나, 지금은 혼자 생활하고 있으며 종교는 기독교입니다.   저는 심리적으로 자신감 상실에 자기존중감이 낮고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었으며 마음속에 있는 생각들을 의사소통하지 못하고 혼자서 그것을 마음속에 묻어두는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세상과 부딪히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먼저 이해하기보다 이해받길 바랐고, 열린 마음이 아닌 닫힌 마음으로 살았기에 늘 외로웠고, 외로웠기 때문에 술을 마셨고, 술로 인해 불면증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병원에서 수면제 처방을 받아 술과 함께 먹고 잠을 청했고, 이런 일이 반복되다시피 하면서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갔습니다. 술로 인해 부정맥이라는 병을 얻었고 병원에 입원하기 전 2주간의 장취에 들어가면서 삶의 수습이 전혀 되질 않았습니다. 보다 못한 큰오빠의 도움으로 이렇게 저는 다사랑중앙병원에 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9주 과정을 마치고 재활을 하게 된 동기는 술 없이 잘 살아가는 미래를 준비하기에 앞서 나의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시간은 좀 더 걸릴지라도 안전하게 가고자 함입니다. 또한 저의 소심한 성격 탓에 퇴원 이후에도 혼자서도 A.A.모임에 잘 참석하기 위해 병원에 있을 때부터 조금씩 행동으로 실천해 나갈 수 있도록 하고, A.A.모임 안에서 올드 멤버 선생님들과 대화를 가져보는 시간도 많이 갖고, 후원자와 12단계 프로그램을 실천하고 싶어서입니다.   술에 저항하지 않고 완전히 행복하고 퇴원해서도 재발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 자신을 좀 더 단단히 다질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재활을 하기로 선택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 건 저의 새로운 희망인 A.A.12단계 프로그램을 잘 실천해 나가고 더불어 영적각성이 되어 나의 삶이 한층 더 성숙해져 나가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퇴원해서 혼자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12단계 공부의 깊이를 알게 될수록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에 있어서 후원자 선생님과 상담사 선생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의 체험과 현실에 적응하는 과정의 경험, 삶을 재구성하는 과정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인격체로서 거듭나야만 단주와 회복이 가능하고 생각합니다. 재방방지 수업을 통해 고위험상황이 왔을 때 어떻게 지혜롭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좀 더 명확히 판단이 내려지고 매일의 명상 수업시간을 통해 자기중심적인 생각들을 점차적으로 제거하게 됩니다. 특히 신과 하나가 되기 위해 신의 뜻 중심 안에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내 삶의 중심이 바뀌어가고 있는 느낌이 들면서 요즘은 마음이 너무나 평온하고 예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감마저 느껴집니다. 영적 체험을 통하여 내적으로 조금씩 내가 성장해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느껴질 때마다 나는 너무 행복하기만 합니다.   나는 술 문제로 크게 작용했던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그 빈틈을 다시 술로 메우기에 열성이었습니다. 허나 신에 대해 알아갈수록, 신에 대한 나의 믿음이 성장할수록 공허함은 나에게서 떠나감을 느낍니다. 이 모든 것이 신의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복이 최고의 복이고 눈에 보여지는 것만이 사랑이라 믿었고 눈에 보여지는 것만이 행복이라고 믿었던 나의 어리석음을 매일 명상의 글들을 통해 나의 잘못된 생각과 그릇된 판단에 대해 하나하나 깨우쳐가고 있는 지금 현실에 만족하고 뿌듯하고 신께 감사합니다.   술을 마실 땐 늘 혼자라고 느꼈고 시베리아 벌판 한복판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 들을 땐 술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신은 이 문제로 이미 해결해주셨음을 재활을 하고 있는 이 기간, 최근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나와 같은 ‘술’ 이라는 공통된 분모를 가진 A.A.를 만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신의 영감을 받는 프로그램이고 A.A.모임 안에 신은 항상 저희와 함께 하심을 저는 믿습니다. 이곳을 만나게 해주신 건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재활을 하면서 환우분들과 서로 대화도 많이 가지면서 이 안에서 저는 서로를 위한 배려가 무엇인지, 용기가 무엇인지, 포용이 무엇인지, 기쁨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를 서로 부딪혀가며 조금씩 배워나가고 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과 장기간 함께 생활을 해본 건 처음입니다. 사람들과 말다툼이 생기거나 머리 아픈 일이 생기면 연락도 안하고 피해버리기 십상이었는데 병원생활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봐야하는 상황 또한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피해서 해결이 될 문제는 아무것도 없으며, 술 없이 감정 조절하는 법과 내 스스로가 스트레스를 다스리는 법을 터득해 나가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이 함께였을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누군가 나에게 뭐라고 안 좋은 말을 할지라도 그 말에 예민해지지 않는 법을 재활을 하면서 터득해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저 역시 재활생활을 잘 해나가고 있는 기간 동안 나도 모르게 고위험상황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심리적인 재발을 하게 된 것입니다. 큰오빠네 집에서 주말을 보내고 주일 11시 예배를 마친 뒤 2시 과천 A.A.모임을 간 어느 날이었습니다. 후원자 선생님과 단주한지 4~5년 된 올드 멤버 선생님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모임이 끝나고 애프터 시간을 갖기 위해서 다들 버거킹으로 향하고 있는데, 나는 다른 때와 달리 우울한 감정이 순간 강하게 올라오는 걸 느꼈고 왠지 혼자 있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몸이 좋지 않으니 병원에 일찍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고 후원자 선생님은 “왜 그러느냐,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이럴수록 혼자 있으면 위험하니 함께 있다가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찍 병원에 들어가기를 선택했고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이름 모를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그저 모임 안에서 적응을 잘 하지 못하는 것만 같고 내 자신이 한심스레 느껴졌습니다. 마침 그때 술 생각이 떠올랐고 시원하게 술 한 모금만 마시면 이 모를 답답한 감정들이 한 순간에 사라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현재 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절대로 술을 마셔서는 안 되었기에 술에 대한 욕구를 참아낼 수 있었고 병원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시간이 지날수록 예민해지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같은 방을 쓰는 환우분에게도 감정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이곳 다사랑중앙병원마저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게 다 무기력해지고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공간에 있고 싶어졌습니다. 급기야 가족에게 “앞으로 술을 안 마실 자신이 있으니 빨리 퇴원시켜 달라”며 부정직하게 가족을 조정하려 하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술에 대한 욕구나 나의 그런 감정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 리 없었던 저를 담당 상담사 선생님이 단번에 알아보신 듯 상담 신청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술에 대한 욕구가 올라왔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던지 선생님에게 짜증을 내고 내 자신을 방어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에게 내 감정을 들켜버린 이상 거짓말을 할 수가 없게 되었고 술에 대한 갈망감이 올라왔다고 솔직하게 고백을 한 후에 관리 점검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활을 하다가 관리 점검이라니, 정말 창피하고 내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고 다른 환우분들의 시선, 비아냥거림, 뒤에서 수근거릴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 너무 괴롭고 힘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관리점검지를 쓰면서 “내 자신을 되돌아보라”고 말씀 하셨지만, 나는 대체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단지 갈망감이 올라왔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지, 왜 해야만 하는지 뚜렷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검토를 하지만 집중이 되질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심리적인 재발을 했을 수도 있는데, 자시 자신을 속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내면을 숨기고 술 생각이 안 나는 척 할 수도 있는데 왜 하필 나야’라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고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이 들었고 순간 내 자신이 너무 불쌍하고 초라하게 느껴져서 눈물만 났습니다. 그래서 가족에게 전화를 하게 되었고 “차라리 죽고 싶다”며 “퇴원을 시켜주지 않으려면 날 죽여라”라고 나도 모르게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도 서슴없이 하게 되었습니다.   죽고 싶을 만큼 술이 마시고 싶었던 상황이었다는 걸 본 정신이 돌아오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병원이 아닌 집이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술을 마시고 한 병이 모자라 또 한 병을 사다 마시고 반복하다가 장취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병원이었길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병원생활을 하면서 이런 심리적인 재발을 겪게 하신 신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렇게 미친 정신이 조금씩 수그러들 때쯤 선생님이 주신 자기검토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검토에 관하여… 진정으로 내가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변화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 건 무엇인지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술에 취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고 내가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상처받는 것이 두렵고 상처 받을 것을 미리 짐작했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깊은 관계를 지속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문제였습니다. 관리점검을 받으며 자기검토를 하면서 나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게 된 것에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저는 기존에 가지고 살아왔던 나의 오랜 습관들과 생각, 행동, 사고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곧 내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인 것인지, 새로운 나의 모습으로 가는 과정이 힘들기 때문인 것인지, 노력하기도 전에 쉽사리 포기해버리려고만 하는 내 마음의 감정 상태를 정확히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정직한 모습으로 속에 있는 아픔을 힘겹게 간직하며 혼자 감당하고 힘들어하며 술 마시던 과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A.A.모임의 경험담을 통해서나 후원자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프로그램을 통해서 나의 숨통을 막히게 했던 과거의 원한, 고통, 연민, 죄책감, 후회 등을 한 꺼풀씩 벗겨내는 작업을 통해 자유로워지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재활을 하면서 알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심리적인 재발 발표 경험을 통하여 술에 대한 혹시나 하는 조절망상을 해서도 안 되고 A.A.모임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 발표를 하기 전엔 사회공포증으로 인해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 한다는 것 자체에 두려움이 컸고 제겐 많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사회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피하기보다 적극적인 태도로 발표를 통해 자신감을 회복해야만 했고 이 기회는 신이 주신 선물이자 발표를 통해 내 자신이 변화하는 데 있어서 발판이 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발표를 하기 전 많은 두려움이 앞섰지만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발표가 끝난 후엔 정말 많은 깨달음이 나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하는 것을 생각만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고, 이전엔 선생님을 무서워하고 피해만 다녔었다면 선생님을 대하는 마음의 태도가 달라진 것 같았습니다. 또한 얼렁뚱땅 시간이나 때우고 오가던 A.A.모임의 소중함에 대해 느꼈고 모임의 올드 멤버 선생님들에게 먼저 친근하게 다가가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항상 정직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려는 마음의 태도가 바뀌니 요즘은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즐겁기만 합니다. 저는 점검을 받으면서 상담사 선생님께 “나는 내 자신을 믿으니 퇴원을 해서도 잘 할 수 있다. 치료진도 가족도 아무도 날 믿어주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고 나는 도움이 필요한 힘이 없는 초심자이자 잘 할 수도 없을뿐더러 퇴원해서 술을 마시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단주에 대한 내 자신의 어떠한 확신도 없이 퇴원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세우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저는 술이 미치도록 마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번 계기를 통해 술이 왜 교활하다고들 하는지를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내 자신을 속이고 남도 속이려 들고 온갖 교만함이 술 한 잔과 내 인생을 맞바꾸려고 했습니다. 아무런 노력조차 하지 않으려 했으면서 저는 저절로 단주가 되기만을 바라는 나쁜 사람, 거지근성이 있는 사람임에 불과했습니다. 말로만 바른 삶을 살길 원했고, 눈앞에 행복이 있어도 행복을 바라볼 줄을 몰랐으면서 나는 늘 불행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고, 그러면서도 후회스런 생활을 청산하고 싶어 했습니다. 오로지 한 잔의 술을 마시기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우려고 정성과 노력을 다했습니다. 조금만 어렵고 힘이 들면 문제를 회피하려했고 나의 허한 마음을 술이 주는 욕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그때도 잠시만 긴장을 늦추면 나의 몸과 마음은 술을 마시던 당시로 다시 돌아가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술로 인해 그동안 잊고 지냈던 내 안의 신을 이곳 다사랑중앙병원에 오게 됨으로써 다시 만나게 될 수 있었고 수업을 통해 술의 무서움을 알게 된 것에 대해 너무나 감사함을 느낍니다. 앞으로 남은 재활기간 동안 심리적인 재발로 인해 흐트러진 내 마음을 바로잡고 현재의 내 모습과 술로 인해 잃어버렸던 과거의 나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퇴원 후에도 그 누군가 나에게 술을 한 잔 마시자고 유혹을 해오더라도 과감하게 뿌리칠 수 있는 내 안에 내적인 힘을 기르는데 집중할 것입니다.   재활기간 동안 나에게 필요한 훈련으로 두려움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 남들 앞에서 당당하게 나의 의사를 밝히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할 것이며, 기도와 명상을 통해 내 안의 나를 더욱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을 많이 가지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검토하기보다 내 자신 안에서의 문제점들을 인내를 가지고 진득하게 찾는 연습을 하고,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고통을 회피하기보다 받아들이고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길 바랍니다.   저는 주님의 택하심을 받고 태어난 축복 속의 자녀이고 든든한 백그라운드이자 늘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계심을 믿으며 힘들 때나 슬플 때나 기도로써 간구하고 나의 아픔을 아시는 신께 늘 의지하며 살길 바랍니다.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무엇이든 따뜻하고 친절하게 말씀해주실 상담사 선생님께 그때그때 질문을 할 것이고, 그동안 많이 외로워서 술을 마셨다면 이제는 후원자 선생님과 가까이 하는 연습을 통해 더 이상 외롭지 않을 수 있도록 A.A.모임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또한 술에 가려진 행복을 내 발로 걷어차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 무엇이 되었든 하나하나 배워나가야 할 것들과 내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일들을 알아가기 위해서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해 살 것이며 영구적 단주를 위해 술에게 나의 빈틈을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고 순간순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오늘 하루만 무사하길 순간순간 틈틈이 신께 기도하며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을 만나게 되어 술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기회와 방법을 터득하게 된 것이 저에게는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습니다.  

다사랑 2021-02-09